주간동아 267

2001.01.11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누가 그래”

세계 분쟁지역서 언론인 희생 잇따라 … 지난해만 62명 피살

  • 입력2005-03-07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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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누가 그래”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믿는 언론인들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제3세계에서 일하는 언론인일수록 ‘총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여기게 마련이다.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국제언론인연맹(IFJ)에 따르면, 2000년 한 해 동안에 언론인 62명이 죽었다. 질병이나 자연사가 아닌 죽음들이다. 이 가운데는 분쟁지역 취재를 나섰다가, 반란군의 매복에 걸려 죽은 이들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는 그들이 쓴 비판적 기사들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고용한 살인전문 하수인들 손에 희생되었다. 부패를 폭로하거나 정치인의 흑막을 비판한, 말 그대로 정론을 편 데서 말미암은 죽음들이다. 하나하나 속사정을 알아보면, 보험사에서 언론인들의 생명보험 가입을 꺼리는 이유를 알게 된다. 지구촌 곳곳에서 언론인들은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시에라리온, 그 죽음의 교차로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누가 그래”
    2000년 첫 주에 들어서만도 모두 9명이 죽었다. 첫 희생자는 17년 내전에 시달려온 스리랑카의 현지 국영 라디오 방송기자 안톤 마리야다스(33)다. 그는 99년 12월31일 자정을 넘기자마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죽었다. 밀레니엄 새해를 맞아 가톨릭교회에서 봉헌한 미사를 중계 방송하러 나갔다가 괴한의 총에 맞고 죽었다. 범인은 스리랑카 분리주의 반군조직인 타밀호랑이(LTTE)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잡히진 않았다. 프리랜서 언론인인 밀바가남 니말라라얀(40)도 스리랑카 내전의 희생자다. 지난해 10월 그는 집에서 일을 하다가 괴한이 창문 너머로 쏜 총탄에 맞고 죽었다. 괴한은 그의 집에 수류탄을 던져 그의 부모도 다치게 했다. 영국 BBC방송 등에 현지사정을 기고해왔던 그는 타밀호랑이 전사였다가 지금은 스리랑카 정부군으로 돌아선 무장집단을 비판하는 글 때문에 보복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10년을 끌어온 내전으로 약 20만명의 사망자가 생겨난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도 언론인들에겐 죽음의 땅이다. 이곳 내전은 혁명연합전선(RUF) 소속 반란군 병사들이 비전투원인 시민들의 손목을 마구 자르는 만행으로 전세계에 악명을 떨쳐왔다. 소년병이 상당수 포함된 이 RUF에 언론인들이 붙잡혔을 때, 프레스카드를 내보인다고 달리 대접받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반군들은 99년 1월 한때 수도 프리타운을 점령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많은 시민들이 반군에 끌려가 손목을 잘리거나 죽임을 당했다. 기자 10명도 그 무렵에 죽었다.

    지난 4월 필자가 내전 취재 차 시에라리온에 갔을 때 만난 한 현지 신문기자는 RUF 반군들이 처치 대상 기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집집마다 다니면서 점찍은 기자들을 죽이고 집에 불질렀다고 증언했다. 이를테면 프리랜서 언론인 마바이 카마라(46)의 경우, 반군들이 수도인 프리타운 시내 중심가에 있는 그의 집으로 몰려와 부인이 보는 앞에서 그를 체포한 뒤 집에 불을 지르고 그를 죽였다. 일부는 어이없게도 진압군인 나이지리아군 주축의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ECOMOG)에 반군 연루 혐의를 쓰고 사살당했다. 압둘 주마 잘로(‘아프리카 챔피언’ 편집인)가 그렇게 죽은 불운한 언론인이다.



    시에라리온에선 2000년에도 외신기자 2명과 현지인 기자 1명이 희생당했다. 현지 언론인 사오만 콘테는 지난해 5월8일 반군 RUF의 두목 포데인 산코 집 앞에서 벌어진 데모를 취재하다 산코의 경호원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AP통신 소속 스페인 사진기자 미구엘 길 모레노(32)와 로이터통신의 쿠르트 쇼르크(53) 두 외신기자는 반군의 매복에 걸려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길 모레노는 AP통신이 1848년 창립된 이래 취재 도중 죽은 25명 가운데 하나다. 코소보전쟁과 체첸전쟁, 그리고 콩고와 이라크를 취재한 바 있던 그는 사건이 나기 직전 동료에게 “날마다, 어느 때든 죽는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로이터의 쇼르크 기자도 보스니아, 동티모르의 분쟁을 취재한 바 있는 노련한 기자였다.

    필자는 지난 4월 말 시에라리온의 전략 요충지 중 하나로, 반군과 정부군이 맞닥뜨려 싸우는 로그베리 장션에 간 적이 있었다. 수도 프리타운에서 동쪽으로 80km쯤 떨어진 그곳으로 필자를 안내하던 영국군 장교는 밀림 사이로 난 좁다란 도로에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만에 하나 매복이 걸릴까 걱정”이란 말과 함께. 그로부터 한달 뒤 앞서의 두 외신기자가 죽은 곳이 바로 그곳이다. 지금 시에라리온은 여전히 내전중이고 전세계 UN 평화유지군의 3분의 1 규모인 1만3000명의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누가 그래”
    2000년 한해 동안 언론인이 가장 많이 죽임을 당한 곳은 지구촌의 오랜 분쟁지역중 하나로 꼽혀온 남미 콜롬비아다. 40년 넘게 내전을 치르면서 수십만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낳은 이곳은 극우 준군사집단(paramilitary)인 민병대의 횡포로 악명 높은 곳이다. 모두 합쳐 2만명 규모인 콜롬비아혁명무장조직(AFRC)과 국민자유군(ELN)은 양대 좌파 게릴라조직으로 콜롬비아 국토의 40%를 지배하고 있다. 극우 민병대는 이에 맞서 싸우는 정부군을 돕는다는 구실로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납치 학살해왔다. 언론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좌익 동조 혐의가 납치 학살의 이유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 아래서는 정부나 민병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가 어렵다. 일단 밉보이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올 들어 방송기자 마리솔 레벨로 바론(25·여)과 후안 카밀로 구에라는 우익 민병대인 콜롬비아자위대(AUC) 단원에, 길레르모 아구달로는 강도를 가장한 괴한에게, 그리고 2주 뒤 그의 동료 알프레드 아바드(36)는 오토바이를 탄 괴한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일단 이곳 콜롬비아에서 언론인 암살사건이 일어나면, 경찰은 그저 형식적인 보고자료를 만들 뿐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충돌로 지난 9월 말 이래 300명 넘는 사망자를 낳은 중동지역도 언론인들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지금까지 희생된 언론인은 현지 통신사 WAFA에서 일하던 팔레스타인인 아지즈 알 테네(32) 한 명뿐이지만, 30명에 이르는 취재기자들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이스라엘 병사들의 마구잡이 사격은 시위군중과 취재진을 가리지 않는 걸로 악명이 높다. 그럼에도 지금껏 이스라엘측에서 취재기자들이 본 피해와 관련해 공식 사과한 것은 단 한 건에 지나지 않는다.

    AP통신 소속 미국인 여자 사진기자 욜라 모나코프는 지난해 11월 베들레헴 시위현장을 취재하던 중 이스라엘 병사가 쏜 실탄들에 온몸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고의는 아니었다”는 군 당국의 해명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군 규정상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이 아니면 실탄을 쓸 수 없도록 돼 있다. 모나코프 기자가 중상을 입을 무렵, 그녀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를 총기로 오인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필자도 지난 10월 중동 현지에서 12일 동안 머물면서 순간 아찔한 경험을 했다.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인 라말라에서 시위군중이 이스라엘 병사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자, 이스라엘 병사들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고무총알을 마구 쏴댔다. 당시 필자는 헬멧을 쓰고 방탄조끼를 입은 외신기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바로 옆의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고무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쏘는 것이 비록 고무총알이라 해도 심장에 바로 맞으면 쇼크사하는 위력을 지녔다. 그곳 라말라, 나블러스 두 곳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취재차 갔을 때 두 젊은 희생자는 모두 심장 부분에 고무총알을 맞아 죽은 이들이었다.

    러시아 정부의 부패와 마피아들의 비리를 폭로한다는 것은 현지 언론인들에게 상당한 모험이다. 한 격주간 신문의 이고르 돔니코프(42)는 바로 그의 아파트 앞길에서 괴한이 내리친 망치에 맞아 죽었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발표했고, 체첸에서 러시아 정부군이 저지른 인권침해에도 비판적이었다.

    지난 3월 모스크바 비행장에서 개인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다 죽은 러시아의 중견 방송인 아르티욤 보로비크(38)도 크렘린 고위관료들의 부패를 고발하다 보복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따른다. 방송기자 세르게이 노비코프(36)도 러시아 스몰렌스크지역 관리들의 부패를 보도한 뒤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아오다 지난 6월 그의 집에서 네 발의 총알을 맞고 숨졌다.

    러시아와 체첸 분리주의자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체첸전쟁도 취재기자들에겐 위협적이다. 1999~2000년에 모두 10명이 희생당했다. 지난 11월에는 러시아군이 설치한 지뢰로 두 다리를 잃은 체첸반군 사령관 샤밀 바사예프를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해 로이터통신에 제공한 바 있는 프리랜서 아담 테프수르가예프(24·체첸인)가 자신의 집에 침입한 괴한의 총에 맞아 죽었다. 체첸반군의 보복임이 분명했다. 세르비아신문의 체첸특파원으로 일하던 러시아인 알렉산더 예프레모프는 다른 두 러시아병사와 함께 차량으로 이동중 체첸반군 손에 죽었다.

    체첸전쟁은 언론인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위험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몸값을 노린 범인들이 외국 취재기자들을 납치 살해하는 경우다. 체첸지역은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이른바 ‘인질산업’ 종사들이 득실대던 곳이다. 이타르-타스통신의 사진기자 블라디미르 야치나(51)가 그러한 희생의 한 보기다. 납치범들에게 인질로 잡혀 갇혀 있던 야치나 기자는 다른 인질들과 함께 옮겨지던 중 그가 건강악화로 인해 제대로 걷질 못하자, 사살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범인들은 이타르-타스통신사와 가족들에게 몸값으로 2000만달러를 요구했었다.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정권이 2000만명에 이르는 다수 알바니아계의 자치권을 빼앗은 데서 비롯된 코소보전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입으로 일단 가라앉았지만, 소수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갈등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언론인들이 희생당했다. 코소보 수도 프리스티나에서 30km 떨어진 곳에서 현지 신문기자 셰프키 포포바(50)는 세르비아계로 추정되는 두 괴한으로부터 총격을 입고 칼에 찔려 죽었다.

    밀로셰비치 정권 시절 정치적 암살이 거듭 행해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언론인들도 암살자의 손을 비켜 가질 못했다. 밀로셰비치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왔던 슬라브코 쿠르비야(데브니 텔레그래프 편집인)은 세르비아 당국의 신랄한 비판이 있은 직후 암살당했다. 지난 1999년에 사망한 언론인 숫자는 87명. 이 가운데 25명이 코소보전쟁 기간에 목숨을 잃었다. 특히 16명은 99년 4월 NATO군의 유고 공습 때 벨그라드 시내에 있는 ‘라디오 텔레비전 세르비아’ 건물 안에 있다가 애꿎은 죽음을 맞이했다.

    ▶범인 안 잡히는 게 특징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라 말하는 미국에서도 언론인은 안심할 수 없다. 로스앤젤레스의 인터넷방송 기자인 제임스 리처드(55)는 지난 10월 집 근처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비록 영향력 있는 매체는 아니었지만, 그는 인터넷을 통해 LA 지역의 마약거래를 비롯한 각종 범죄를 다루어왔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범죄조직의 보복임은 분명하다.

    90년대 통계로는 1994년에 114명으로 가장 많은 숫자의 언론인들이 희생됐다. 그해엔 발칸의 보스니아 내전과 더불어 아프리카의 르완다 내전과 알제리 내전이 한창이었다. 르완다에서만 무려 48명이, 알제리에서는 19명의 언론인이 목숨을 잃었다. “언론인들의 희생 그 자체는 언론인들이 독립적인 견해를 나타내거나 잘못된 일들을 폭로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해마다 한 해 동안에 죽임을 당한 언론인 숫자를 발표해온 IFJ의 아이단 화이트 사무총장의 탄식이다. 언론인 피살사건의 큰 특징은 범인이 잡히거나 밝혀진 경우는 드물다는 점이다. IFJ에 따르면 2000년 한해 동안의 언론인 사망사건 가운데 20건은 지금도 조사중이다. 그런 사건들이 공권력의 손으로 말끔히 풀리길 바라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오히려 조사과정에서 ‘총칼이 펜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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