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7

2001.01.11

쓸 데는 꼭 쓴다 … 상류층 씀씀이

명품 브랜드 소유 부의 상징 이젠 옛말 … 남모르는 기부, 사회환원 진짜 돈 쓰는맛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5-03-07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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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 데는 꼭 쓴다 … 상류층 씀씀이
    박완서씨의 근작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에는 두 종류의 부자가 등장한다. 의사 심영빈을 중심으로 누이 영묘의 시아버지 송회장과, 기업사냥으로 돈을 번 재미실업가 영준(영빈의 형)이다. 건설회사 재벌인 송회장은 사돈댁에서 ‘사장(査丈)어른’이라 부르자 “사장이 아니라 회장이라오”라고 고쳐주는 수준의 속물이며 구두쇠다. 그러나 수십 년 만에 귀국한 사돈댁 장남이 모교에 선뜻 백만불을 기부했다는 소식에 입이 떡 벌어지더니 그때부터 사돈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 영빈이 형에게 “송회장 사람 보는 기준이 순전히 얼마나 가졌나인데 도대체 얼마나 뻥을 쳤느냐”고 묻자 영준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를 굴복시킨 건 내 돈이 아니라 내 돈의 씀씀이야. 그 졸부, 모교에다 조건없이 백만불 절대로 못 내놔. 하긴 지 이름이 붙은 건물이라도 하나 지어준다면 또 모르지만. 자기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을 하는 걸 보고 질린 거야.”

    진짜 부자인지 아닌지는 가진 돈의 규모가 아니라 돈의 씀씀이로 판가름난다.

    ‘돈은 쓰면 쓸수록 늘어난다’의 저자 나카타니 아키히로씨는 물건보다는 돈, 돈보다는 돈을 사용해서 얻은 ‘경험’이 훨씬 중요한 시대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 부유층은 여전히 ‘물건’에 집착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직업상 부유층과 대면이 많은 보석디자이너 홍성민씨는 몇 마디 대화로도 상류층과 부유층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고급스러움’과 ‘사치스러움’의 차이라는 것이다.

    쓸 데는 꼭 쓴다 … 상류층 씀씀이
    “보석의 가치를 몇 캐럿으로 따지는 사람들, 예술품을 보면서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얼마짜리냐?’부터 묻는 사람들은 ‘그냥’ 부자죠. 그런 사람들이 결혼예물로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맞춰요.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20대 여자가 큰 보석을 달고 갈 만한 곳이 없잖아요. 파티에 갈 때나 달아볼 텐데, 그렇다고 파티가 자주 열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놓고 꼭 ‘나중에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그러나 상류층이라면 보석의 가격을 확인하는 대신 딸이나 며느리에게 보석을 가르치러 찾아온다. 보석이 지닌 예술적, 시대적 흐름을 배우게 하고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구입한다.

    부자를 냉혹한 구두쇠이거나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그들은 여가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려고 노력하며 소박한 삶을 즐긴다. ‘백만장자 마인드’를 쓴 토머스 J. 스탠리는 60여명의 부자들이 30일 동안 어떤 일상활동을 했는지 조사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가장 빈도수가 높은 것이 ‘자녀나 손자손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응답이다. 다음이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린다.’ 세번째에 비로소 ‘투자계획을 세운다’는 항목이 나온다.

    스탠리의 결론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활동의 빈도와 자산의 정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 나눠주고, 노는 것처럼 일하고, 그 속에서 사업의 영감을 얻는다는 점에서 ㈜쌈지의 천호균 사장(51)은 탁월한 경영인이다. 그가 93년부터 ‘쌈지아트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이것은 단순히 지원이 아니라 알고 보면 일종의 거래다. 젊은 예술가들은 후원받는 대신 쌈지에 새로운 감각을 제공해 준다.

    한 외국계 기업의 경영인은 어린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물건을 3배 가격으로 샀던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돈을 언제 어떻게 쓰는 것인지 설명했다.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에게 케이크를 사다 준다고 약속한 걸 깜빡 잊었어요. 이미 새벽 3시였는데 셔터가 내려진 동네 빵집문을 두드려 주인을 깨웠죠. 투덜거리는 주인에게 손가락 3개를 흔들며 원래 가격의 3배를 주겠다고 했더니 물건을 팔더군요.”

    그는 자식들에게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기 위한 수단이라고 가르친다. 자신은 수억원의 연봉을 받고 있으면서도 직접 그랜저 승용차를 몰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자선은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돈을 버는 시간만큼 중요한 것이 돈을 사용하는 시간이다. 그 점에 관한 한 와이즈-내일인베스트먼트(벤처캐피털과 인큐베이팅 전문)의 김정실 회장(45)은 베테랑이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 벤처기업가로 큰 성공을 거두고 20년 만에 귀국해 99년 9월 와이즈-내일을 설립한 김회장은 수천억원 대의 재산가로 알려졌지만 돈을 멋지게 쓰는 점에서도 존경받는다.

    김회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련된 귀부인의 자태다. 수줍어하는 태도나 상냥한 어투에는 전혀 돈냄새가 나지 않는다. 또 미식가이기도 한 김회장은 리츠칼튼호텔 프랑스 식당을 즐겨 찾는다. 그렇다고 김회장이 고급스러운 호텔식당만 찾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집무실에서 패스트푸드에 콜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소탈함도 보여준다.

    김회장의 집무실 벽에는 그가 매달 5000만원씩 기부하고 있는 어느 복지재단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다. 또 그는 매주 하루씩 중증장애아들을 돌봐주는 봉사를 하고, 또 번 만큼 제대로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 다닐 만큼 열성적이다. “미국에서는 돈을 많이 번 사람보다 좋은 일에 돈을 쓰는 사람이 존경받습니다. 경영인 김정실보다 사회사업가 김정실로 알려지기를 원해요”라고 말하는 김회장은 진정 돈을 쓰는 쾌감을 아는 사람이다.

    한국텔레마케팅의 장순웅 사장(43)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성경 말씀대로 기업을 경영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세금을 잘 내고 법을 잘 지키며,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고(한국텔레마케팅은 통신판매의 꽃이라고 하는 섹스용품이나 야한 여성 속옷은 판매하지 않는다), 번 돈을 적절하게 쓰는 것이다. 장사장은 “어느날 성경을 읽다 많은 의인들이 부자였음을 알고 경영철학에 확신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는 돈을 벌면 우선 회사에 재투자하고, 나머지는 열심히 일해준 사원들과 사회에 환원한다. 단 사회에 환원할 때 절대 사장 혼자 폼내지 않는다. 사원들에게도 돈 쓰는 맛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다.

    “부서별로 500만원씩 나눠준 뒤 사회를 위해 써보라고 했어요. 지역양로원에 찾아가든 소년소녀가장을 돕든 그것은 직원들이 결정할 일이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도 훈련입니다. 직원들에게 만약 돈을 남겨오면 내가 대신 쓰겠다고 했죠. 저는 도와달라는 데가 너무 많으니까요.”

    돈 쓰는 법을 제시해 화제를 모은 나카타니식 철학에는 이런 말이 있다. “20%의 세금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전부 세금으로 내고 80%를 돌려받는 것이다”. 진짜 부자들은 애당초 이 세상에 있는 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주머니로 굴러 들어온 돈은 투자를 하거나 자선을 베풀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세상 밖으로 보낸다. 돈을 기꺼이, 아주 즐겁게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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