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대한바둑협회 회장. [사진 제공 · 대한바둑협회]
대구 덕영치과병원 이재윤 원장(71). 이가 아픈 환자를 고치는 탁월한 의사였지만 정작 자기의 바둑 중독은 제대로 고치지 못했다. 올 1월 아마추어 단체인 대한바둑협회 회장으로 선출돼 최일선에서 뛰고 있다.
서울대 치대를 나온 뒤 대구에서 병원을 연 이 원장은 임플란트 시술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9만 건을 시술했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기록이다. 임플란트는 짧은 시간 안에 끝내야 부작용이 적다. 그는 3분에 1개를 심을 정도로 손이 빠르다. 그래서 고희를 넘긴 ‘원장님’을 찾는 환자들이 여전히 많다. 월요일 아침에 바둑 두느라 예약 환자들을 돌려보내도 그의 솜씨 때문에 병원은 승승장구했다.
“유일한 취미가 바둑입니다. 고스톱도 좀 치다가 끊고 골프는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것 같아서 아예 배우질 않았고…. 앉아서 하는 것 중 가장 재미있는 게 마작이라는데 바둑에 미쳐서 이러는데 마작까지 배우면 폐인 될 거 같아서 손도 안 댔어요.”
대학교 때 바둑을 처음 배워 1년 만에 1급이 됐다. 아마 최강자가 되고 싶다는 꿈도 키웠으나 어릴 적부터 배우지 못한 핸디캡이 있다는 걸 깨닫고 취미로만 두는 아마추어로 지내기로 했다. 지금 바둑 실력은 타이젬 7단 정도. 하지만 사람과 직접 대면하는 바둑을 둔다.
“대구바둑협회 기원에 나가면 호적수들이 7,8명 있어요. 토요일에는 무조건 가서 그들과 리그전을 둡니다. 승률은 비슷해요.”
아마바둑계에서 일 좀 하거나 바둑을 뒀다는 사람 중에서 이 원장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다. 그는 사비를 털어 ‘덕영배’라는 아마대회를 만들어 4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다. 한국기원 대구본부장, 대구시바둑협회장, 대한바둑협회 수석본부장, 한국기원 부이사장 등 아마추어가 맡을 수 있는 바둑계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주변에선 그를 ‘아마’와 ‘지방 바둑계’의 대변인이라고 부른다. 프로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기원에서 아마 바둑계의 목소리를 전했다. 대한바둑협회를 만든 것도, 바둑 발전이라는 대의로 한국기원과 합친 것도, 그리고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 시절 아마바둑계를 소외시키자 다시 분리독립한 것도 그의 주도 아래 이뤄졌다. 또 지방 바둑계 활성화를 위해 한국기원에 강력 요청해 지역연구생 입단제를 도입하도록 했다.
“한국기원이 바둑 발전을 위한 좋은 기회를 많이 놓쳤다고 봅니다. 아마와 지방 바둑보급에 조금만 더 신경 썼어도 지금 같은 침체는 겪지 않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9단으로 이어지는 황금기 때 아마를 육성하고, 바둑학교나 바둑 일자리를 만들었으면 달랐겠죠.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그는 현재 아마 최강자들의 전국리그인 내셔널대회에 덕영팀을 만들어 출전시키고 있다. 물론 100% 사비를 털어서다. 여기에 그는 아마추어의 참가율을 높이기 위해 동호회 대회도 추가해 바둑팬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지방 시군에서 바둑 대회를 여는 것을 반기는 게 바둑만큼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는 스포츠가 드물어요. 보통 수백 명은 기본인데, 이런 스포츠 대회가 어디 있나요.”
그는 바둑협회 차원에서 시군구 지자체과 함께 법인을 만들어 학생들과 소외계층에 바둑을 가르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업도 벌이고 있다. 또 정부 지원을 받아 축구와 당구 종목처럼 디비전 리그 시스템을 바둑에도 도입할 예정이다. 디비전 리그는 참가자들의 실력별로 리그를 나누고 승강급 제도를 둬 해당 종목 팬들에게 문호를 넓히는 제도를 말한다.
인공지능 바둑이 인간을 능가하면서 바둑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단호히 아니라고 답했다.
“인공지능 바둑은 오히려 바둑의 수가 무한함을 보여줬습니다. 바둑 발전에 엄청나게 기여한 것이죠. 더 나은 수, 곧 진리를 찾는 게임이 바둑입니다. 바둑은 그래서 재미있어요.”
인터뷰를 끝낼 무렵, 이 원장은 기자가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느냐는 듯 툭 화두를 던졌다. ‘바둑의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바둑은 민주주의요, 공정입니다. 장기 체스처럼 계급이 나뉘지 않아요. 모든 바둑돌은 평등하죠. 죽었다가도 살기도 하고. 바둑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정한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