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53

2020.08.21

진중권 “기본소득 같은 새 정강정책이 DNA로 뿌리 박혀야 보수 세력 커진다” [진중권 직설-12]

  •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입력2020-08-18 15: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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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간동아’는 진보논객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한국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담긴 기고문을 매주 화요일 오후, 온라인을 통해 공개한다. <편집자 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미래통합당(통합당)이 새로운 정강정책을 발표했다. 첫 구절이 인상적이다. 

    ‘국가는 국민 개인이 기본소득을 통해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다.’ 

    진보주의자가 먼저 제기한 의제를 가로채버린 것이다. 사실 통합당이 말하는 ‘기본소득’은 아직 먼 얘기다.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소멸로 생산이 늘어나도 소비가 안 되는 상황이 오면 국가가 기본소득으로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원론적 얘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 보수가 자유지상주의 관념에서 벗어나 이념적 유연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선 평가할 만하다.

    보수의 급진적 개혁

    8월 13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새로운 정강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8월 13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새로운 정강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통합당에서 뇌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그 뇌를 당 외부로부터 모셔 와야 했다는 것은 보수진영에 제대로 된 이데올로그가 없음을 의미한다. 보수가 이 사회의 주류였을 때 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차별과 배제라는 다수자 전략을 활용했다.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고 빨갱이에 대한 ‘공포’와 호남에 대한 ‘혐오’ 등 주로 감정적 선동에 의존하다 보니, 굳이 전문적인 이데올로그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이념과 사상의 자유시장이 열리자 변화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 정치적 경쟁력을 잃고 만 것이다. 

    한국 보수의 이념은 크게 ‘반공주의+자유지상주의+권위주의’의 결합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반공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로 의미가 없어졌다. 공산주의의 죽음이 반공주의마저 죽인 셈이다. ‘권위주의’는 수평적 소통에 친화적인 디지털 문명에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남은 것은 ‘자유지상주의’뿐이나,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도 퇴조기에 접어든 지 오래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전 세계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재정 지출을 확대하고 있다. 긴급재난지원금도 과거라면 보수로부터 ‘퍼주기’라는 비난을 받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 



    통합당 정강정책에는 ‘경제민주화’가 포함돼 있다.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도록 정부가 개입할 필요성을 명문화한 셈이다. 자유지상주의는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절된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하지만 폴 크루그먼의 말대로 ‘시장의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새 정강정책에는 ‘노동존중 사회’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청년고용 증대를 위한 노동시장 개혁” 같은 방침도 들어 있다. 이는 재벌기업이나 대한민국 상위 1%만을 위해 노동자를 무시하고 적대시해온 과거 모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국회의원 4연임을 금지하고, 지방의회에서 청년 공천을 의무화하며, 주요 선거의 피선거권 연령을 18세로 낮추고, 장관급 국무위원의 남녀 비율을 동수로 하는 등의 방안도 담겨 있다. 이른바 ‘꼰대정치’, 즉 연령이나 성차에 따른 위계를 중시하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새 정강정책에는 그 밖에 친환경사회 구현, 초고령사회 진입에 대비한 계속고용제도 확립 등 미래사회 비전도 명시돼 있다. 이제야 보수가 시대 흐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정강정책 문구로만 본다면 통합당의 변신은 정의당의 혁신안이 무색할 정도로 급진적이다.

    물질적 저항

    문제는 이 개혁이 당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당 밖에서 안으로 인위적으로 이식됐다는 데 있다. 그러니 당연히 뿌리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현 통합당)은 ‘경제민주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지만. 집권 후 바로 그 공약을 폐기해버린 바 있다. 이번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설령 개혁의 진정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실현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추상적 강령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그렇지, 그것들이 정책이나 법안으로 구체화할 즈음에는 아마도 당 안팎에서 커다란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통합당과 그 지지자들은 아직 이 개혁안의 실천적 함의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아예 이번 개혁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일단 당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으니 당분간은 지켜보겠다는 태세다. 또 다른 이들은 이 개혁안이 당에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지만, 2012년 경제민주화 공약처럼 어차피 선거를 치른 다음에는 폐기해도 좋을 포장지 정도로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정강정책을 새로 채택했다고 해서 갑자기 당의 DNA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바위처럼 단단한 땅에 새 정강정책이 뿌리 내리는 일은 쉽지 않을 테다. 예상되는 저항은 관념적인 것이 아닌, 물질적인 성격의 것이다. 당장 경제민주화만 해도 보수의 물적 토대나 다름없는 대기업들이 반기는 정책은 아니다. 기업의 광고 수입으로 운영되는 언론사들도 그들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업의 이해를 대변해온 의원들 역시 국가가 시장에 조건을 설정하는 행위 자체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몇몇 의원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공산주의 정책’(주호영 원내대표), ‘레닌 전략’(이언주 전 의원)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을 생각해보라. 

    현재 통합당 의원들은 황교안 체제에서 공천받은 이들이다. 그나마 민심에 민감한 수도권 의원들이 이번 총선에서 전멸했으니, 당의 성격은 과거보다 더 보수적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 바깥에서라도 개혁을 지지해줘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지지자들은 어차피 통합당이 변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통합당 지지층은 당이 기능을 잃은 사이 유튜브로 정치의식을 형성하며 극우적 성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들은 ‘민주당 2중대를 만들려 한다’ ‘보수의 씨를 말리려 한다’며 벌써 김종인 체제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보수의 분화

    ‘개혁’이라는 게 달랑 문서에 적힌 정강정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 보수정치의 체질 자체를 바꾸는 문제다. 그러려면 의원과 당원, 지지자는 물론이고, 외부 환경인 기업과 언론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이 오래된 별자리를 바꾸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개혁은 불가능하고, 중도층을 획득할 수도 없을 것이다. 김종인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는 한시적인 지도체제로, 활동 기간이 1년도 남지 않았다. 그 짧은 기간 안에 새로운 정강정책을 당에 깊숙이 심지 못하면 언제라도 과거로 회귀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인 것이 통합당의 현실이다. 

    다행히 보수층에서도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이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 합리적 보수가 보수의 공론장을 회복해 보수진영의 여론을 주도하도록 해줘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이 엘리트층을 설득하는 일이다. 한국 보수에 모럴 코드가 없는 이유는 보수 엘리트층의 천민자본주의 의식 때문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상속세를 폐지하려 했을 때 미국의 저명한 갑부들은 상속세 폐지 반대 청원에 나섰다. 왜? “그래야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보수다. 보수가 곧 종합부동산세 몇 푼에 ‘세금폭탄’ 운운하며 조세저항에 나서는 천박함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조국 사태가 보여줬듯이, 심지어 진보마저 그 천박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적나라한 물질적 욕망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에도 ‘에토스’는 필요하다. 한국 보수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고 주문하며 국가의 개입 자체를 ‘공산주의’로 매도해왔다. 이는 국가와 기업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과 달리 정부는 공익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국가가 시장에 한계 조건을 설정하는 것은 시장경제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격차는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고, 독점은 경쟁을 방해해 시장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중도로 외연을 확장한다는 것은 곧 현 ‘1%의 초고소득·초고학력층+저소득·저학력층’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할 테다. 못사는 계층이 잘사는 계층을 지지하는 ‘계급배반’ 투표는 현대 국가에서 꽤 일반화한 현상이다. 이를 설명하는 가설 가운데 하나가 ‘어려운 계층일수록 개혁에 따른 일시적 고통을 견딜 여유가 없어 일체의 개혁에 반대하게 된다’는 것. 대한민국 1%도 민중의 이 강요된 수구성을 기득권 유지에 활용해왔다. 공포와 불안 선동으로 그들을 ‘안정희구세력’으로 만들기만 하면 되니, 따로 보수 가치를 긍정적으로 정립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그새 고학력사회가 됐다는 점이다. 과거 행태로는 높아진 유권자의 교육 수준을 만족시킬 수 없다. 모처럼 새로운 정강정책을 마련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당 체질을 바꾸는 데는 저항이 따를 것이다. 개혁의 성패는 그 저항을 극복하는 지도력에 달렸다. 태극기부대나 기독교 반공주의자 같은 극우세력이 보수를 대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당 입장에서 그들은 현찰이고, 이른바 ‘합리적 보수’는 지급 보증이 안 된 어음으로 보일 게다. 그렇다고 눈앞의 이익을 좇아 개혁을 포기한다면 보수는 영원한 루저로 머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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