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골수기증등록자가 약 500만 명에 달해 백혈병 환자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사진은 세계 최대 골수기증센터를 찾은 기증자가 골수등록을 하는 모습.
독일 국민만큼 골수기증에 적극적인 사람들도 없다. 골수기증등록자 수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골수기증등록자 모집 행사장에는 여지없이 사람들이 몰리는데, 한 축구 경기장에서 열린 백혈병 어린이 돕기 행사에선 1600명이 검사를 받겠다고 나섰다. 백혈병 환자가 살해되는 내용의 수사드라마가 방영됐을 때는 골수기증단체로 온라인 신청이 쇄도했다. 예상치 못한 참여 열기에 독일 국민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두 아이 엄마이자 기증희망자로 등록한 멜라니 크라헤 씨는 “자기 아이가 백혈병에 걸렸다면 그 엄마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을 테니 저처럼 건강한 이가 기증하는 것은 무척 당연한 일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최근 골수를 기증한 마티아스 리스너 씨는 “제가 아는 것은 제 골수를 받은 사람이 영국에 사는 여덟 살 남자아이라는 것뿐입니다. 치료가 잘됐는지 결과가 궁금한데, 6개월이 지나야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하네요. 그 아이한테 골수가 더 필요하다면 한 번 더 기증하려고요”라며 행복해했다.
백혈병 환자들 희망의 땅
혈액 관련 난치병 환자에게 골수이식이 필요하다는 판정이 나면, 의사들은 골수기증등록자들의 혈액정보가 있는 기관에 문의하는데,‘독일골수기증자등록색인센터’도 그런 기관 가운데 하나다. 이곳은 독일 28개 골수은행이 보유한 골수기증등록자들의 자료를 통합관리한다. 주 임무는 요청받은 혈액성분을 보유한 등록자를 최대한 빨리 찾아내는 것. 현재 약 500만 명의 비혈연 기증희망자 자료가 등록돼 있는데, 이는 전 세계 등록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참고로 현재 한국의 등록자는 약 20만 명).
등록 자료 500만 건 가운데 실제로 골수기증이 이뤄진 경우는 5만 건으로 전체 등록자의 1%에 불과하다. 기증희망자와 환자의 혈액성분이 일치하는 경우가 1% 미만인 데다, 기증자 사정으로 취소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500만 명의 골수정보를 보유한 덕에 백혈병 환자 5명 가운데 4명이 한 달 만에 자신에게 맞는 골수를 찾을 수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환자라 해도 혈액성분이 일치하면 독일 기증자의 골수를 이식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골수의 3분의 1은 국내에서 이식됐고, 3분의 2는 외국의 백혈병 환자들에게 전해졌다. 전 세계 골수이식수술에 사용하는 골수의 절반가량이 독일에서 조달된 것이다. 다만 유전자가 비슷해야 이식 가능하므로 대개 유럽계 환자들이 행운을 잡는다.
독일의 골수기증 역사는 1991년 백혈병에 걸린 한 여자의 가족과 담당의사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독일의 골수기증등록자 수는 고작 3000명. 이 암담한 현실을 접한 사람들이 스스로 골수기증자모집운동을 벌이며 ‘독일골수기증자정보회’라는 시민단체를 설립했다. 22년이 지난 오늘날 이 단체는 독일에서만 300만 명, 스페인, 폴란드, 미국, 영국, 인도 등 해외지부를 통해 70만 명의 골수정보자료를 보유한 세계 최대 골수은행으로 성장했다. 이곳 말고도 골수은행 27개가 독일 전역에서 기증자를 모집하고 골수정보를 분석, 자료화한다. 독일골수기증자정보회는 지금도 기증자 모집 활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비싼 혈액성분 분석비용을 낮추려고 분석전문 의료기관들과 끊임없이 싸워온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독일 골수기증자 모집 행사장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왼쪽). ‘입을 열어서 혈액암을 퇴치합시다’라는 문구가 적힌 온라인 등록 홍보 포스터.
22년 전 백혈병에 걸린 올케를 떠나보내고 지금까지 이 단체를 이끌어온 클라우디아 룻(53) 대표는 골수기증에 대한 올바른 내용을 알리는 데 역점을 둔다고 했다. 골수기증 방법과 진행 절차, 부작용 등 누구나 궁금해하는 내용뿐 아니라 세부 사실들까지도 자세히 공개한다.
신규 등록자 수 늘리기 열심
관행상 여전히 골수기증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 필요한 것은 혈액줄기세포다. 한국에서는 조혈모세포, 즉 피를 만들어내는 어머니세포라고 부른다. 피에도 들어 있지만 주로 뼈에 많이 들어 있어 예전에는 기증자의 골반 뼈에서 주사기로 골수를 추출하고 그 골수를 환자에게 이식했다. 전신마취와 통증 때문에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즘엔 조혈모세포촉진제를 맞고 뼛속의 조혈모세포가 말초혈액으로 빠져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마치 헌혈하듯 팔에서 피를 뽑는 말초혈액채집방식을 쓴다. 마취가 필요 없고 통증도 거의 없다. 독일 내 골수기증의 80%가 이 말초혈액채집방식으로 이뤄진다.
많은 이가 골수기증등록을 해놓고 막상 기증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면 취소하곤 한다. 겁이 나고 불안해서다. 물론 사전에 철저히 검진받기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큰 사고나 후유증이 생긴 적은 없다. 골수나 혈액은 채취 후 2~3주면 완전히 회복되지만 기증자 처지에서는 여전히 불안하다. 이럴 때 기증자들의 생생하고 솔직한 경험담이 불안과 불신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단체는 홍보와 모집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TV는 물론 페이스북, 대형광고판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한 지속적인 홍보 외에도 대학, 회사, 단체, 공공장소 등을 찾아 골수기증등록자 모집 행사를 벌인다. 지난해에는 모집 행사 1500건을 열어 최다 신규 등록자 수를 달성했다. 최근에는 이민자들의 등록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독일 사회에 이민자가 증가하면서 이들의 유전자와 비슷한 골수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리라는 생각에서다. 이미 터키계 독일인 약 10만 명이 등록했다.
골수추출과 혈액채집 모두 기증자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말초혈액채집방식으로 조혈모세포를 기증한 톰 크리헬스 씨의 경험이다.
“영화 보고, 음악 듣고, 먹을 것 먹고, 다 할 수 있는데도 5시간을 앉아만 있어야 하니 좀 답답했어요. 그래도 백혈병 환자가 겪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이번 일은 저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될 거예요. 전 언제든 또 할 생각입니다.”
어쩌면 골수기증운동의 성공은 사람들이 간직한 선한 마음을 믿는 데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더 많은 사람이 골수기증희망자로 등록할 전망이다. 참여가 참여를 부르고, 기술은 더욱 발달할 것이다. 그럼 ‘백혈병 퇴치’의 꿈도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다. 독일의 22년 경험이 그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