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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 명사들이 말하는 농촌 ④

“땅과 농업이 아닌 농민에게 당장 지원해라”

이상무 유엔 FAO 한국협회장

“땅과 농업이 아닌 농민에게 당장 지원해라”

“땅과 농업이 아닌 농민에게 당장 지원해라”

이상무
● 1949년 경북 영천 출생
● 1967년 경북고 졸업
● 1971년 서울대 농학과 졸업
● 1990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졸업(농경제학 박사)
● 농림부 기획관리실장, 유엔 FAO 필리핀주재 대표, 세계농정연구원 이사장, 유엔 FAO 한국협회장

이상무(63)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한국협회장은 농림부에서 27년간 일했다. 농업구조정책국장, 농어촌개발국장 등을 지냈으며 1998년 농림부 기획관리실장(1급)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농림부를 떠난 뒤에도 그는 중국 옌볜과학기술대학 부설 동북아농업개발원 원장, FAO 필리핀 주재대표, 세계농정연구원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농업현장을 지켰다. 2005년엔 통일농수산사업단 공동대표를 맡아 금강산과 개성에서 협동농장 사업도 했다. 그가 한국 대표를 맡은 FAO는 농업 관련 정책이나 기술을 발전시키고 이를 전 세계에서 교육하는 기관이다. 어려운 나라에 식량을 지원하는 유엔 사업도 FAO를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어린 시절 그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다.

“문리대에 가서 역사와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른들 반대가 심했죠. 아버님이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셨는데, 해방 직후 좌우 이념문제에 휩쓸려 그만 불행하게 되셨거든요. 저를 키우신 할아버지는 문리대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셨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법대에 들어가서 사법시험이나 고등고시를 보기를 바라셨는데, 그게 싫어서 농대에 갔죠. 농대 가서도 공부는 안 했어요. 대학신문사에서 일하고 연극반 활동만 하고요. 정연주 전 KBS 사장이 대학신문 1년 선배예요.”

청개구리처럼 이 협회장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고등고시를 준비했다. ‘살아생전 보여드릴걸’ 하고 후회하면서….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자마자 그는 학교 선배와 함께 짐을 싸서 고향인 경북 영천에 있는 은혜사라는 절로 들어갔다. 그리고 1971년 제10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다. 그렇게 청년 이상무의 공직생활이 시작됐다.

막 공무원이 돼서는 ‘기왕에 하는 공무원, 영천군수나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내무부에 1지망 지원서를 냈다고. 그러나 결과는 탈락. ‘농대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농림부에 배치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농림부 사무실에서 우연히 대학 시절 은사였던, 통일벼로 유명한 허문회 교수님(전 서울대 명예교수)을 만났어요. 반가운 마음에 꾸벅 인사를 드리며 ‘여기서 사무관으로 일합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 한숨을 쉬며 이러시는 겁니다. ‘자네 같은 사람이 농림부에서 일한다니 걱정이 되네. 농업공부는 하나도 안 했던 자네 같은 사람이…. 참 한심하네’라고요. 제가 농림부에서 일하는 게 그 정도로 웃기는 일이었어요(웃음).”



‘똥통부’로 불렀던 농림부

그렇게 시작한 농림부 공무원 생활이지만, 그는 시간이 갈수록 일에 빠져들었다. 같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동기 사무관들이 국세청, 내무부, 교통부로 빠져나갔지만 그는 농림부를 지켰다. 당시 농림부는 공무원들에게는 기피대상 중 하나였다. 일도 많고 탈도 많아서였다.

“농림부 차관과 기획실장이 이런 대화를 한 적도 있어요. 차관이 기획실장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농(農) 자를 이마에 붙이게 됐는가’라고 물으니 기획실장이 ‘그러게 말입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라는 거예요. 농림부 위상이 그 정도였어요. 아주 한심했죠. 공무원끼리도 교통부는 ‘꼴통부’, 농림부는 ‘똥통부’라고 불렀을 정도니까요.”

▼ 그래도 먹고사는 문제를 다루는 곳인데.

“농림부 장관 목(자리)은 쌀값이 올라가도 떨어지고, 쌀값이 내려가도 떨어지는 그런 시절이었으니, 어떤 사람이 농림부에서 일하고 싶었겠어요. 장관 평균 재임기간이 가장 짧은 데가 농림부였을 거예요. 그래서 더 오기가 생겼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사실 힘은 들어도 농림부 일이 재미는 있어요, 보람도 있고.”

이 협회장이 농림부 일에 슬슬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1975년 미국 연수를 갔다 온 뒤부터다. 당시 그는 축산국 기획과장이었다.

▼ 어떤 보람이 있었나요.

“농림부에는 냉탕, 온탕이 있어요. 밥도 좀 얻어먹고, 술도 좀 얻어먹는 곳이 온탕인데 대표적인 곳이 축산국이었어요. 축산국이 마사회 감독기관이었거든요. 마사회 사람이 와서 밥도 사고 술도 사고 그랬죠. 그런데 당시 마사회엔 복무규정, 인사규정 같은 게 없었어요. 대충하는 거지. 그래서 제가 있는 동안 각종 규정을 만들어줬어요. 밥 얻어먹을 만했죠(웃음).”

축산국에 있으면서 그는 전국 소시장 규정도 완전히 정리했다. 정부가 나서서 정책적으로 뭘 해본 적이 없는 곳, 심지어 소를 묶어놓는 말뚝이나 계량기가 있는 곳과 없는 곳 등 각양각색이었다. 당시 농림부 직원들은 소시장에서 예방주사 같은 사업을 하면서 공짜 술을 먹고 다녔다. 이 협회장은 이런 구조를 완전히 바꿨다. 먼저, 농림부가 간여하던 중개수수료(10%)를 지방정부로 다 내려보냈다. 충북 청주, 경북 경주와 영천, 강원 횡성, 전남 담양 같은 대규모 소시장에 표준계량기를 설치해 공정거래가 가능토록 했다. 생각하고 구상하는 대로 현장이 움직이자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은 사료과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료과는 온탕 중에서도 온탕이었어요. 민원인이 아주 많았죠. 당시 사료과는 모든 수입사료 원료에 대해 수입 추천을 할 권한이 있었어요. 그게 없으면 수입이 안 돼요. 사료공장들이 가격을 올리거나 내릴 때도 사료과 허가를 받아야 했고요. 문제가 있는 회사에 행정처분 내리는 것도 사료과 권한이었어요. 술 사고 밥 사겠다는 사람이 아주 줄을 섰죠.”

이 협회장은 사료과장이 되자마자 기존 운영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수입사료 추천권은 사료협회로 넘겼다. 농협계통의 사료공장은 농협중앙회에 가서 받도록 했다. 그 대신 농림부는 각 기관에 수입 물량 쿼터를 정해줬다. 행정처분 권한은 지방자치단체로 보냈다. 그러자 밥 사러 오는 민원인이 사라졌다. 직원들의 불만은 커졌지만 사료시장은 투명해졌다. 이 협회장은 당시 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룟값을 완전히 자율화했다.

“사룟값을 자율화하면 값이 오른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반대였죠. 가격자율화 이후 사료회사들이 본격적으로 품질경쟁, 가격경쟁을 시작했어요.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 사료산업이 세계 최고가 된 겁니다. 기틀을 닦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웃음).”

여자들이 살고 싶은 농촌 만들기

“땅과 농업이 아닌 농민에게 당장 지원해라”
인터뷰 내내 이 협회장은 “잘되기를 바란다면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묶어놓으면 카르텔과 비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매번 정부가 국민 건강이니 농가 보호니 하는 이유를 대면서 규제를 강화했는데, 다 핑계다. 규제 때문에 핑계가 해결되는 경우를 아직까지 못 봤다”고 강조했다.

▼ 불합리한 규제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1985년까지 우리나라에는 ‘지방육 반입제한’이란 규정이 있었어요. 지방에서 도축한 고기는 서울로 가지고 올 수 없다는. 이동하는 동안 고기가 부패한다는 게 이유였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사실 축산물 유통업자들이 구역을 나눠먹으려고 만든 일종의 카르텔이었어요. 그게 없어지고 나니까 축산물 유통시장이 확 바뀌었어요. 양곡상 허가제도 풀린 지 얼마 안 돼요. 쌀을 소포장 단위로 팔 수 있게 한 것도요. 히트상품이 된 임금님쌀이니 금쌀이니 하는 브랜드가 그래서 나올 수 있었던 거죠. 이런 게 다 이권 때문에 생긴 규제예요. 다 없애야 합니다. 농안법(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도 진짜 문제예요.”

▼ 어떤 점에서요.

“이게 모든 농산물은 도매시장에서 경매를 거친 다음에야 팔 수 있다는 제도예요. 가격 안정화가 이유인데, 요즘 같은 인터넷 세상에선 아무 의미가 없는 법이죠. 오히려 이 법이 유통시장을 방해해요. 실제로 배추 같은 건 도매시장에서 거의 경매를 못 해요. 그런데 법이 하라니까, 한 것처럼 장부만 만드는 거죠. 경매수수료는 중간도매상이 먹고. 이런 비용을 다 농민과 소비자에게 돌려줘야 해요.”

이 협회장은 우리나라 농업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 지원 대상과 방향이 농업이 아닌, 농민과 농촌에 사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농업정책이 아무리 잘돼 있으면 뭐 하나, 농촌에 사람이 없는데. 사람이 없는 농업 증산정책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업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농촌에 공장이 못 들어가게 해요. 쌀농사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논에는 다른 작물을 못 심게 하고요. 사실상 재산권 행사 방해죠. 식량증산이 아니라 농촌을 삶의 터전으로 삼겠다는 사람을 많이 늘리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해보셨나요.

“젊은 사람이 농촌에 모이게 해야죠. 특히 젊은 여성이 살 수 있게 해줘야 해요. 여자들이 가면 남자들은 자연히 따라가니까(웃음). 제가 한 20년쯤 전 농촌에 사는 젊은 여자들을 상대로 ‘왜 농촌을 떠나고 싶은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첫째 이유가 ‘노인 모시기 싫어서’였어요. ‘농산물 가격이 낮다, 높다’ 그런 게 아니고요. 농촌에 사는 젊은 여자들한테 물어보면 답이 나오는데, 그런 걸 조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고요. 하여튼 땅이 아닌 사람에게 지원해야 합니다. 노인 모시는 사람에겐 인센티브를 주거나, 노인에게 농촌 주거수당을 주거나 하는 식으로. 아무 정책효과가 없는, 논 가진 사람에게 무조건 주는 쌀직불금 같은 건 당장 없애야 해요.”

▼ 식량자급률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은데요.

“우리나라는 1명당 경지 면적이 150평(약 496㎡) 정도예요. 그런 나라가 무슨 식량자급을 하겠어요? 비싼 건 길러서 먹고, 싼 건 사다 먹으면 돼죠. 사 먹을 돈만 있으면 문제가 안 돼요. 농산물 가격도 그래요. 시장에 맡겨놓으면 잘 해결될 문제인데, 정부가 개입해서 역효과만 내고 있어요. 농협도 있잖아요. 농협의 판매기능을 강화하면 충분히 가격조절기능을 할 수 있거든요. 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고.”

농업에 관심 없었다는 이 협회장은 1990년 농경제학으로 박사학위(미국 미시간주립대)를 받았고, ‘농업경영학개론’ 교과서를 두 권이나 썼다. 전 세계 50개국 농업정책을 연구해 책(‘파워 농촌으로 디자인하라’)도 냈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게 팔자소관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남은 여생도 농업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자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2012.09.24 856호 (p66~68)

  • 글 |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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