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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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구제금융 고통에도 한국 엘리트는 돈 빼돌렸다

조세정의네트워크 보고서 “한국 7790억 달러 조세피난처에 숨겨”

  • 구미화 객원기자 selfish999@naver.com

    입력2012-08-27 09: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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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구제금융 고통에도 한국 엘리트는 돈 빼돌렸다
    전 세계 슈퍼리치가 조세피난처에 숨겨둔 자산이 최소 21조 달러에서 최대 32조 달러에 이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자매지인 ‘더 옵서버’는 7월 21일, 조세정의네트워크(Tax Justice Network·이하 TJN) 보고서를 인용해 1970년대부터 2010년 말까지 세계 80개 이상의 조세피난처로 흘러들어간 금융자산 누적액이 최소 21조 달러라고 보도했다.

    21조 달러면 미국과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을 합한 것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2009년 4월 주요 20개국(G20) 금융 정상회의를 앞두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세피난처에 숨긴 자산 규모’라며 분석해 내놓은 1조5000억∼11조5000억 달러보다 적게는 2배, 많게는 30배 가까이 된다. 그럼에도 연구를 주도한 TJN의 제임스 헨리는 “이번에 도출한 규모는 아주 적게 잡은 것”이라며 “조세피난처를 통해 소유한 부동산이나 요트 같은 비금융자산은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TJN의 이번 보고서가 국내에서 화제가 된 이유는 전체 규모가 엄청나기도 하지만, 한국(7790억 달러)이 중국(1조1890억 달러)과 러시아(7980억 달러)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자산을 해외에 숨겨둔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부유층과 권력층의 ‘스위스 비밀계좌’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고, 최근 ‘구리왕’ ‘선박왕’ ‘문구왕’의 ‘역외(域外·offshore)탈세’가 문제가 됐지만, 조세피난처에 쌓인 한국인 자산이 이 정도로 많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한국수출입은행은 1968년부터 올해 3월 말까지 OECD가 지정한 조세피난처에 우리나라 내국인이 투자한 누적액이 210억 달러인 것으로 파악했다. TJN이 집계한 규모의 3%에 불과하다.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진 후 관세청에서 TJN에 한국인 관련 자료를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주간동아’가 TJN으로부터 추가로 입수한 ‘역외금융체제의 대가(The price of offshore revisited)’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결과는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유엔, 국제결제은행(BIS)과 각국 중앙은행 등에서 제공한 자료에 근거했다. 먼저 조세피난처의 주요 자금원인 세계 140여 개국 외환보유고와 경상수지, 만기가 1년 이상인 대외채무, 외국인 투자, 명목 국민총소득(GNI), 물가 디플레이터 등을 분석했다.

    외자 들여올 때 자산 도피 급증



    이를 유입된 자금(sources)과 사용된 내역(uses)으로 구분해 규모를 대조하고, 그 차액을 연도별로 더했다. 이를테면 대외채무와 외국인의 직간접투자 등 형태로 유입된 외국 자본, 그리고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고 외환보유고를 늘리는 등 외국 자본이 사용된 내역을 비교해 ‘기록되지 않고’ 역외로 흘러나간 자금 규모를 추정한 것이다. TJN은 그 결과를 다시 세계 50대 프라이빗뱅크가 추산하는 역외자산 규모와 맞춰보고, 역외 투자자들의 투자 형태 및 소득 증가분 등도 반영했다.

    OECD를 비롯한 국제기관이나 금융업계, 비영리기구(NGO)가 그동안 여러 차례 조세 회피 자산 규모를 파악하려고 시도했지만, 대체로 조세피난처 몇 곳을 정해놓고 그곳으로 흘러들어간 자금 규모를 추정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결과는 조세피난처가 아니라, 조세피난처로 자금을 흘려보내는 국가들의 연도별 재무상황을 분석함으로써 자금이 빠져나간 구멍을 찾아 크기를 가늠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쯤에서 TJN이 어떤 단체인지 살펴보자. TJN은 세계적인 은행이나 자산운용회사, 회계법인, 로펌 등에서 다년간 ‘실전 경험’을 쌓은 조세 및 역외금융 전문가들로 이뤄진 비영리단체다. 2003년 영국에서 설립돼 주로 영국과 미국의 금융 전문가들이 조세 기능과 조세 회피 폐해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계속해왔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제임스 헨리도 세계적인 컨설팅 그룹 매킨지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출신으로 지금은 미국의 유명 로펌에 소속돼 있다.

    TJN은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인에게 조세피난처의 실상을 알리고 세계 각국,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조세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TJN이 개발도상국을 강조하는 것은 역외자산이 이들 나라 재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2010년 현재 개발도상국은 대부분 채무국 신세지만, 이들 국가의 슈퍼리치들이 조세피난처에 은닉한 자산을 계산에 넣으면 빚을 다 갚고도 남아 부자 나라로 신분이 뒤바뀐다. TJN은 미국 연방준비제도 관리의 말을 인용해 “이들 국가의 문제는 자산이 없는 게 아니라 자산의 상당 부분이 자국이 아닌 뉴욕이나 런던 금융가와 제네바, 취리히,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같은 조세피난처에 있다는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주목할 점은 TJN의 이번 보고서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면서도 개발도상국과 함께 관심 대상으로 지목한 점이다. 보고서는 한국이 1970년대 이후 저성장에서 벗어나려고 공적자산을 매각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며 엄청난 외채를 끌어들인 점에서 다른 개발도상국과 같다고 보았다. 그러고는 “이들 국가 정부가 공식적인 통로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인 시기에 조세피난처로의 자본 도피도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TJN은 그 원인을 “각국 정부가 나라를 일으켜 세울 목적으로 들여온 외자를 소수 권력층이 상당 부분 사유화하고 해외로 빼돌린 탓”이라고 분석했다. 개발도상국은 선진화의 첫 단계로 외국 자본의 유입을 원활히 하려고 금융 장벽을 낮추거나 없애는데, 이 같은 금융 규제 철폐가 오히려 자본을 쉽고 빠르게 유출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TJN은 “외채 부담을 대다수 평범한 사람이 짊어지는 동안, 극소수 엘리트가 정보와 권력을 이용해 공적자산을 사유화한 것은 부당하다”고 강조했다.

    “국부 유출엔 여야가 따로 없었다”

    IMF 구제금융 고통에도 한국 엘리트는 돈 빼돌렸다

    6월 국내에 소개된 ‘보물섬(Treasure Islands)’(부키)은 조세정의네트워크 (TJN)의 또 다른 상근연구원 니컬러스 색슨이 조세피난처를 깊이 있게 추적한 책이다.

    TJN 관계자는 그러나 “한국은 다른 개발도상국과 비교해 1970∼80년대엔 공직자를 비롯한 권력층이 외화를 착복한 정도가 미미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오히려 “1997년 외환위기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 기업가와 고위 공직자는 물론 상당수 정치인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부를 해외로 빼돌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상황에서 정부가 공적자산을 헐값에 내놓고 외국 자본 혹은 외국인 투자자라면 두 손 들어 환영했는데, 이 점을 노리고 배를 불린 ‘검은머리 외국인(조세 회피를 위해 외국인을 가장한 내국인)’이 상당수였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 수 있는 공기업 매각 정보를 미리 입수한 정치 엘리트와 자본가가 금융 비밀주의가 보장되는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외국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공공재 매입에 참여한 것이다.

    이 관계자는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동남아 여러 국가에 비해 심도와 규모 면에서 더 많은 고통을 치른 데는 조세피난처를 거쳐 활동한 금융자본 탓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 엘리트를 비롯한 고급 정보를 쥔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조세피난처를 이용한다”며 “규제 대상이 돼야 할 사람들이 규제를 만드는” 사회 모순을 지적하기도 했다.

    TJN에 따르면 은닉 자산 21조 달러는 1000만 명이 안 되는 사람들 것으로 그중 10만 명도 안 되는 사람이 절반가량인 9조8000억 달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돈으로 1인당 1000억 원꼴이다. TJN은 전 세계 몇백만 명에 불과한 슈퍼리치는 “중국의 30대 부동산 갑부에서부터 미국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개발자, 중동의 오일 재벌, 러시아의 전직 지도자와 아프리카 독재자, 멕시코의 마약왕 등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아쉽게도 한국의 슈퍼리치 유형은 보고서에 언급되지 않았다.

    IMF 구제금융 고통에도 한국 엘리트는 돈 빼돌렸다
    이전가격, 지적자산 도피

    그러나 추정해볼 여지는 있다. 최근 국세청은 올해 상반기 역외탈세 105건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탈루세금 4897억 원을 추징했다고 밝혔다. 국세청이 적발한 사례는 대체로 조세피난처에 계좌를 만들어 자금을 은닉하거나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놓고 국내에 우회 투자하는 방식을 동원했다.

    한 중견기업 사주의 경우, 스위스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국내 상장기업에 투자하고, 배당소득 71억 원과 주식을 팔아넘겨 받은 283억 원을 또 다른 조세피난처 계좌에 은닉했다. 또 다른 자산가는 국내에 유령회사를 만든 다음, 미국법인을 세워 해외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유출해 호화별장 등을 구입하는 데 썼다. 이 자산가는 또 해외법인의 경비를 꾸며 비자금 136억 원을 조성해 홍콩의 비밀계좌에 은닉하기도 했다.

    과세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슈퍼리치들이 페이퍼컴퍼니나 비밀계좌를 주로 이용한다면, 기업들은 ‘이전가격(transfer pricing)’을 주로 활용한다. 이전가격은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장려되고 국제교역이 급증하면서 모기업과 해외 자회사 사이에 생겨난 일종의 꼼수다.

    기업이 세금을 회피하거나 적게 낼 목적으로 이익은 세율이 낮은 나라에 있는 자회사로 넘기고, 세율이 높은 자국 모기업엔 비용을 늘려 잡는 것이다. 올 초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도 이전가격을 조작해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국세청으로부터 수천억 원대의 세금 추징을 통보받았다.

    TJN은 “이전가격이 조세 회피 문제를 악화시킨다”면서 “최근엔 단순히 물품 가격을 조작하는 수준을 넘어 경영노하우, 브랜드가치, 특허, 소프트웨어 같은 지적자산을 조세피난처로 옮겨놓고 비용처리를 해 세금을 피하는 기업이 크게 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추세를 감안해 국세청도 “대기업이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국제거래로 세금을 탈루하거나, 대재산가 등 중견기업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는 역외탈세에 대해 끝까지 추적, 과세하겠다”고 공언했다.

    전 세계적으로 돈줄이 마르면서 국세청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 과세당국이 조세피난처로 관심을 돌리고 있지만, 역외금융 전문가들은 “조세피난처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 중 누구도 결코 겁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계 최고의 엘리트가 나서 그들의 부(富)를 지켜주며, 여러 나라가 앞으로는 조세피난처를 비난하면서 뒤로는 스스로 조세피난처가 되지 못해 안달하기 때문이다.

    진화하는 조세 회피 수법

    TJN의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스위스의 UBS와 크레디트스위스, 골드만삭스 등 세계 정상급 은행이 조세피난처로의 자본 도피를 적극 도왔다. 2010년 말 기준 세계 상위 50개 프라이빗뱅크가 관리하는 개인고객 역외자산 규모는 최소 12조1000억 달러.

    제임스 헨리는 최근 미국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역외자산의 상당 부분을 세계적인 은행이 관리한다”면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촉발해 미국 정부의 막대한 공적자금을 지원받고 임직원에게 엄청난 성과급을 지급한 은행도 다수 포함됐다”고 꼬집었다. 헨리는 보고서를 통해 “부티크 형태의 독립 자산운용사와 헤지펀드를 이용하는 자산가가 늘고 있으며, 아시아 부호가 매우 중요한 고객으로 떠올랐다”는 점을 소개하기도 했다.

    조세 회피 수단이 갈수록 진화하는 것도 추적을 어렵게 한다. TJN은 “조세피난처 혹은 역외 개념이 특정한 나라 혹은 지역을 지목하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프라이빗뱅킹 전략과 기술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조세피난처의 실체를 사실상 잡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스위스 비밀계좌’를 예로 들면, 그 계좌가 스위스 국경 내에 있을 수는 있지만, 그 계좌 명의는 익명의 외국 기업으로 돼 있고, 그 외국 기업은 또 다른 나라의 신탁회사가 소유하며, 이 신탁회사의 관리자는 또 다른 나라에 있는 식이다.

    TJN은 “이 정도는 아주 간단한 편”이라며 “보통 조세 회피 목적의 해외계좌는 특정 국가의 사법권이 영향을 미치기 어렵도록 소유 구조를 전 세계로 파편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역외 시스템을 “슈퍼리치 개인이나 기업, 때로는 범법자의 자산을 과세 당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도록 숨겨주는 ‘여러 가능성(a set of capabilities)’”이라고 표현했다.

    TJN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트렌드는, 1990년대 후반 이후 비밀주의와 조세 회피 보장을 내세우며 슈퍼리치의 자금을 유치하려는 경쟁이 본격화한다는 점이다. 특히 델라웨어, 알래스카, 네바다, 사우스다코타 등 미국 여러 주가 앞다퉈 ‘저렴한 비용으로’ 전통적인 조세피난처들과 동일한 혜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TJN은 “미국의 이 같은 역내(onshore) 조세피난처가 남용될 경우 이번 보고서에서 밝힌 조세 회피 은닉자산은 빙산의 일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많은 사람이 ‘조세’ 하면 “극소수의 부유층이나 고민할 문제”이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세력이 사유화한 공적자금이 월급쟁이의 유리지갑을 털어 마련한 것이며, 그들의 재산을 꽁꽁 숨겨주고 불리다 경영난에 빠진 은행을 위한 구제금융도 결국 서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니, 조세회피는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조세피난처에 쌓인 자산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금융시장의 건전성을 크게 훼손해 세계 경제위기를 심화한다는 지적이 있다. TJN의 한국 및 동북아시아 담당자인 이유영 연구원은 “유럽 경제위기의 발단이 된 그리스 사태 배후에는 런던 시티 금융가와 손잡고 조세피난처인 사이프러스를 통해 그리스로 스며든 러시안 오일머니가 있었다”며 “익명성과 투기성이 강한 상품에 큰돈이 몰리면서 안 그래도 취약한 그리스 금융체제를 더욱 망가뜨렸다”고 진단했다. 어느 때보다 위기와 변동성이 강한 상황에서 조세피난처를 거친 러시아 투기자본이 그리스 자본시장에 가한 일격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조세피난처가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나 제2, 제3의 그리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이 연구원은 “조세피난처는 탈세 또는 국부 유출과 관련한 조세 및 경제 정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며 “공공의 통제 너머에서 익명성과 비대칭적 정보력, 투자 집행 효율성 등을 무기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금융시장 건전성을 훼손하고 위기를 심화하는 만큼,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경고등을 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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