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한국시리즈에서 최준석, 손시헌, 오재원(왼쪽부터) 등 두산 선수들은 눈부신 플레이를 선보였다.
‘프로 스포츠는 1등만 기억한다’고 한다. 2007년부터 2년 연속 KS에서 좌절을 맛본 김경문 당시 두산 감독(현 NC 감독)은 “KS에 올라가서 졌을 때의 참담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른다. KS에서 지느니 차라리 가을잔치에 못 나가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2등은 외롭고 슬픈 자리다. 하지만 올 KS에서 삼성 파트너였던 두산 베어스는 ‘아름다운 패자’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그들이 보여준 투혼과 감동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시즌 전 삼성, KIA와 함께 ‘3강 후보’로 꼽혔던 두산은 막판까지 치열한 2위 싸움을 벌이다 10월 5일 LG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패하면서 4위로 페넌트레이스를 마감했다. 이용찬이 팔꿈치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고, 마무리로 낙점했던 홍상삼이 발목 수술 여파로 뒤늦게 합류하는 등 시즌 초반부터 어려움이 많은 해였다. 힘들게 데려온 용병투수 개릿 올슨은 합류 직후 부상당해 중도에 짐을 쌌고, 에이스인 더스틴 니퍼트 역시 부상으로 두 달여 등판하지 못했다. 마운드 불안이 우승 후보 두산의 추락을 가져왔지만, 뚝심의 ‘베어스’는 페넌트레이스 4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2013 한국시리즈 4차전 1회 말 최준석(가운데)의 1타점 적시 2루타로 두산이 선취점을 얻었다.
넥센과 치른 준플레이오프(준PO), LG와 만난 PO, 그리고 삼성과 맞대결을 펼친 KS까지 두산의 올 포스트시즌(PS)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두산은 넥센과의 준PO에서 목동 1·2차전을 내주며 벼랑 끝에 내몰렸지만 내리 3승을 챙기는 ‘리버스 스위프’(Reverse Sweep·역전 싹쓸이 승리)의 역사를 썼다. 5차전 연장 13회에 터진 대타 최준석의 결승 홈런은 준PO에서 두산이 연출한 대역전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였다.
PO에서 11년 만에 가을잔치에 오른 LG를 상대로 3승 1패를 거두고 KS에 진출한 두산은, 3주간 휴식을 취하며 여유 있게 기다린 삼성에게 먼저 2승을 거두고 3승 1패까지 앞서가는 저력을 과시했다. 사상 최초 페넌트레이스 4위로 KS 우승을 노렸던 두산은 결국 3승 4패로 주저앉았지만 우승팀 못지않은 박수를 받았다. 두산은 준PO 5게임, PO 4게임, KS 7게임 등 이번 PS에서 무려 16경기를 치렀다. 이전까지 한 해 가장 많은 PS 경기를 소화한 팀은 2011년 SK(14경기)였다.
두산은 이번 PS 16경기에서 9번을 이겼다. 매 경기 뒤 선정하는 ‘데일리 최우수선수(MVP)’가 9경기 모두 다를 정도로 모든 선수가 골고루 활약했다. 어느 한 명에 의존하지 않고, 팀이 하나가 된 결과였다. ‘PS 최고 히트상품’으로 꼽히는 좌완 투수 유희관과 새로운 안방마님으로 떠오른 최재훈의 재발견 등 ‘화수분 야구’의 대명사답게 또 다른 스타플레이어도 탄생했다.
준PO가 현행 같은 5전3선승제로 진행된 2009년 이후 야구계에는 ‘준PO를 거친 팀은 KS에서 결코 우승할 수 없다’는 말이 등장했다. 준PO와 PO를 거쳐 KS에 오른다고 해도 체력적 부담을 이길 수 없다는 게 주된 근거였고, 이 말은 두산에도 적용됐다. 두산이 KS에서 3승 1패 절대 우위를 점하고도 삼성에 막판 3게임을 내리 내준 것도 체력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내야수 오재원은 10월 27일 잠실에서 열린 KS 3차전 7회 공격 때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다. 2루타를 친 뒤 누상에 나가 있다 후속 손시헌의 우전 안타 때 3루를 돌아 홈으로 뛰던 중 갑자기 왼쪽 허벅지 통증을 느꼈고, 힘겹게 절뚝이면서도 끝내 홈플레이트를 밟은 뒤 쓰러졌다. 눈물겨운 두산의 투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오재원은 일어나지 못한 채 결국 업혀 나갔고, 이후 게임에 출장하지 못했다.
오재원은 사실 PS에 들어가기 전부터 양쪽 허벅지가 좋지 않았다. 준PO 초반 선발라인업에 들지 못한 것도 그래서다. 주사를 맞으며 가을잔치에 임하다 팀이 긴박한 처지에 처하자 출장을 강행하기 시작했고,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게임에 계속 나서다 결국 탈이 난 것이다.
2013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삼성 선수들이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
오재원만이 아니었다. 체력 저하는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으로 이어졌다. 우승을 향한 정신력 하나로 버텼지만 불가항력적인 부상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오재원에 앞서 이원석은 KS 2차전 도중 왼쪽 옆구리 통증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가뜩이나 왼쪽 다리가 신통치 않았던 홍성흔도 KS 3차전에서 자신의 파울 타구에 왼쪽 종아리를 맞아 타박상을 입었다. 주전 3명이 동시에 부상을 당하면서 두산은 라인업 짜기가 어려울 정도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허슬두’(두산을 응원할 때 쓰는 말로 힘내다라는 뜻의 ‘Hustle’과 두산 베어스의 ‘두’를 합친 말)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초보 사령탑으로 2년째 지휘봉을 잡은 김진욱 두산 감독은 넥센과의 준PO 초반 김현수를 3번 겸 1루수로 선발 출장시키고, 거포 최준석을 라인업에서 빼는 등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종종 투수 교체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다. 승부를 걸었어야 할 KS 5차전에서 투수 기용이 과감하지 못해 시리즈 전체를 내주는 패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 감독 역시 이번 PS를 통해 좋은 공부를 했고, 한 단계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는 김 감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황병일 수석코치의 도움이 컸다. 이례적으로 감독이 공개적으로 코치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정도였다. 황 코치는 선수단 미팅을 통해 벤치 분위기를 이끈 것은 물론, 선발라인업 구성 등에서 김 감독에게 적극 조언하기도 했다. 준PO 3차전 이후 최준석을 중용한 것은 황 코치 아이디어였다. 김 감독은 1년 선배인 황 코치에 대해 “나는 말이 감독이지, 황 수석에게 정말 많이 배웠다. 안 계셨다면 KS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PS가 한창이던 10월 중순 서울 잠실구장 안에 위치한 두산 구단 사무실에는 신령스러운 꽃으로 불리는 우담바라가 피었다. 올해 두 번째로 우담바라가 꽃망울을 터뜨리자 프런트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주장 홍성흔은 준PO 시작 전부터 “올해는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가을잔치를 숱하게 많이 했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처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담바라의 좋은 징조도, 홍성흔의 행복한 예감도 모두 빗나갔지만 두산은 2013년 가을 ‘아름다운 패자’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