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에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 강금실 법무부 장관(왼쪽). 부장판사를 포함한 소장판사들의 대법원 개혁 요구로 최종영 대법원장은 힘든 고비를 맞고 있다.
8월18일 전국 각지에 있는 2000여명의 판사들은 출근하자마자 법관 전용 인트라넷(코트넷)과 주요 인터넷 뉴스사이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코트넷’에는 ‘사법파동’에 대한 솔직한 의견이 넘실댔고 대법원은 이날 오후 3시에 전국 법관회의를 개최한다는 긴급소식을 전했다. 불과 며칠 전의 극단적인 대립각은 팽팽한 줄다리기로 변해 있었다. 징검다리 연휴기간 동안 어느 정도 물밑 접촉이 진행된 탓일까. 양쪽은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 싶다는 속내도 내비쳤다.
문흥수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코트넷에 올린 ‘국민 여러분, 법관 및 법원 직원 여러분과 대법원장님에게 법관으로서 드리는 마지막 글’이란 글을 통해 ‘조건부 사퇴 의사’를 밝혀 공방을 재점화했다. 대법원장의 ‘개혁 로드맵 제시’란 선행조건을 내걸면서 끝까지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상 최초의 전국 법관 회의가 열린 것은 오후 3시. 이강국 법원행정처장 주재로 전국 고등·지방법원과 서울지법 및 4개 지원의 부장, 단독·배석 판사 등 전국 판사 56명이 참석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 회의는 이번 사태를 주도한 이용구 서울지법 북부지원 판사와 문흥수 서울지법 부장판사까지 참석해 사법 시스템 전반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 사상 네 번째 사법파동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잠시 사법파동 출발점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8월12일 오후 3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6층 회의실에서는 생소한 이름의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회’(이하 자문위)가 개최됐다. 대법원이 대법관 인선방식 개혁 차원에서 법원 안팎의 제안을 받아들여 도입한 위원회로, 대법원장이 대법관 임명을 제청하기 전에 재야 법조계 등에게 자문하기 위한 자리였다. 전임 대법원장을 비롯하여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변협) 회장, 법무부 장관까지 위원으로 참여하는 이 기구는 대법원장의 대법관임명제청권의 허점을 보완해주리라 기대됐다. 하지만 방식이 문제였다.
당초 이 회의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했다. 회의 형식도 전례가 없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단지 자문위 의견이 최종영 대법원장에게 전달된다는 정도만 알려졌다.
8월18일 대법원에서 열린 헌정 사상 최초의 전국 법관회의. 그러나 양측의 이견만 확인한 채 파행으로 흘렀다.
“일요일(10일) 오후 한 기자로부터 ‘화요일(12일)에 자문위가 열린다는데 맞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자문위가 열린다는 것은 6월 말에 알려졌지만 개최 날짜는 금시초문이었다. 결국 하루 전인 월요일 오후 3시가 돼서야 대법원장 비서실장이 개최 날짜와 몇몇 문서를 전달했다. 그제서야 3명의 대법관 후보에 이근웅 대전고등법원장(사시 10회), 김동건 서울지방법원장(11회), 김용담 광주고등법원장(11회)이 추천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 분에 대한 인물평만 하라는 얘긴데 너무도 일방적이다.”
자문위서 자리 박찬 변협 회장과 법무장관
변협은 이미 7월 말 박시환 서울지법 부장판사와 최병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 회장을 대법관 후보로 추천해놓은 상태. 자문위에 추천된 세 명의 후보를 보면 변협의 의견이 철저히 무시됐다고 해석할 만했다. 변협은 “자문위를 열겠다면 적어도 여러 경로의 인사 추천안에 대해 경청했어야 옳다”고 반발했다.
강장관 역시 대법원과는 구원(舊怨)이 있다. 1993년 3차 사법파동 당시 사법부의 퇴행적인 사법부 개혁안에 반발하여 40명의 소장판사들과 함께 성명서를 발표했던 것. 이후 강장관은 사표를 제출하고 법원을 떠났다.
과거 세 번의 사법파동은 소장판사들이 법원을 떠남으로써 봉합됐다. 형사지법 판사들의 집단사표 사태(1971년), 대법원을 떠나는 김용철 대법원장(1988년)과 김덕주 대법원장(1993년)(왼쪽부터).
▷ 보-혁 갈등으로 확전 움직임
자문위 관련 소식이 알려지자 소장판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용구 판사(서울지법) 등은 곧 행동에 돌입했다. ‘서열 위주 대법관 인선 철폐’를 주장하는 연판장을 법원 내부 통신망 코트넷에 올려놓고 법관들의 서명을 받기 시작한 것. 이어 서울지법 박시환 부장판사가 대법원의 태도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한 것을 계기로 일부 부장판사들은 단체 행동까지 거론했다. 청와대측은 극도로 말을 아끼면서도 최종영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대법원측은 대법원장의 대법관임명제청권은 헌법에 보장된 대법원장의 고유권한이라며 양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최 대법원장이 새로운 후보자를 물색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9월11일 임기가 만료되는 서성 대법관 후임자에 대한 임명 제청은 8월20일까지 끝내야 한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소장판사들의 연판장 파동이 법원 내부의 문제를 청와대와 대법원의 정면충돌 및 사회 전반의 보수-혁신(이하 보-혁) 갈등으로 확전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법원 일각에서는 청와대측이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것을 두고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판사 출신의 노무현 대통령과 민변 부회장을 역임한 강장관, 그리고 강장관이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우리법연구회’ 출신의 박범계 민정2비서관으로 이어지는 삼각편대가 이른바 ‘코드 맞추기’식 개혁을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최 대법원장이 관례에 따른 제청을 강행하려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고 있다. 한 법조계 인사는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간 중에 대법원장을 포함해 현직 대법관 14명 중 13명의 임기가 만료되는 만큼, 대법원이 진보적인 인사로 대거 충원될 것을 우려한 최 대법원장이 자신의 임기(2005년 9월 만료) 동안 대법관 인선을 양보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 해결 가능성은 없나
“법관은 신성한 직업이다. 만일 정권과 시민단체가 개입하여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면 침묵하는 90%의 판사가 참지 못할 것이다.”(지방법원 모 부장판사)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훼손하는 것도, 나이 차별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외면하는 대법원의 구태가 안타까울 따름이다.”(서울지법 소장판사)
사법부가 3권분립의 한 축인 만큼 여론과 현직 판사들이 해법을 쥐고 있는 셈이다. 현재 대법관 인사개혁 요구에 서명한 159명의 판사들은 대법원장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159명이란 숫자는 전체 법관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해 손지호 대법원 공보관은 “법원이 보-혁 갈등의 중심으로 부각되면 결국 판결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그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간다”면서 “여론몰이에 휩쓸린 의사결정이 가장 위험하다”고 경계한다.
화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는 “과거 사법파동이 진보적인 판사들이 옷을 벗는 사태로 결말이 났기에 성과가 적었다”며 “이제는 한 발씩 양보하는 방안을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청와대와 대법원 모두 정면충돌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극적인 타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 대법원 쪽에서 “현재로선 대법관 구성을 다양화하라는 요구는 수용할 수 없지만 헌법재판관 인선에서 그와 같은 요구를 수렴하겠다”는 발언을 주목할 만하다. 법조계에서는 이를 두고 청와대와 대법원이 서로 한 발씩 양보하자는 대법원의 ‘제안’이라고 해석한다.
▷대법관 인적 구성을 다양화하려면
대법원장과 13명의 대법관은 사법부를 지탱해나가는 실질적이며 상징적인 존재다. 현행 헌법상 대법관 선임 과정에는 3부 권력이 모두 개입한다. 대법원장의 제청(사법)으로 국회의 동의(입법)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행정)한다. 하지만 소장판사들은 “현재의 대법관은 단순하게 법원의 내부승진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정부와 국회는 모두 국민과 시민단체의 감시를 통해 변화를 수용하고 있는데, 사법부만이 ‘사법 독립’이란 미명하에 자기만의 가치기준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
단적인 예로 현 대법관 구성의 경직성이 거론된다. 현 대법관은 ‘50~60대 남성, 서울 강남 거주,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는 유사한 삶의 토대를 가진 인물로 구성됐다는 것. 이같은 인적 구성으로는 급박하게 변화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게 재야의 지적이다.
그러나 현행 3급심 제도하에서는 사법부의 안정성과 대법관들의 풍부한 재판 경험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인 것만은 틀림없다. 최 대법원장이 관례에 따라 대법관을 제청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또 대법관에게 집중된 업무 비중을 줄이지 않고는 소장판사들이나 재야 법조계 등이 요구하는 대법관 인적 구성의 다양성을 논할 수 없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 중요만 문제만 대법원에서 다루도록 하는 ‘상고허가제’ 도입과 대법관을 측면지원하는 ‘재판연구관제’의 보완이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관 인선방식의 개혁을 요구하는 소장판사와 대법원이 힘을 합쳐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