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문건’ 유출 의혹을 받고 있는 박관천 경정이 12월 4일 오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청사로 들어오고 있다.
“전부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수사가 아니고 상당 부분이 정보나 문건 유출이라는 점도 배당에 고려해야 하는 사안이었다. 정보 유출은 신속히 수사해야 할 필요성이 있고 특수한 수사 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에 특별수사부 배당도 검토해왔다.”(12월 1일 같은 검찰 관계자)
검찰 관계자의 말이 하루아침에 180도 달라졌다. 사건 배당을 하루 앞둔 11월 30일 “설마 언론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 사건을 특별수사부에 배당하는 일은 없겠지?”라는 기자의 질문에 검찰 핵심 관계자로부터 “안심하라”는 취지의 답이 돌아왔다.
사건 배당에서부터 드러낸 한계
그러나 그다음 날인 12월 1일 검찰은 이 사건에 권력형 비리나 대기업 비리를 수사하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秘線) 실세’로 지목받아온 정윤회(59) 씨가 국정에 개입했다는 내용의 청와대 문건 보도 관련 명예훼손 사건 및 유출 경위를 밝혀달라는 수사의뢰 사건에 대해서다.
11월 28일 ‘세계일보’가 ‘정윤회 동향’ 문건을 보도한 당일 이재만 대통령총무비서관과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 청와대 관계자 8명 명의로 고소장이 접수된 지 사흘 만의 배당이었다. 단 한 건의 명예훼손 고소 사건 배당 문제를 두고 검찰 수뇌부부터 일선 서울중앙지검 간부들까지 머리를 싸매고 사흘을 달라붙었던 것이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날 문건 유출 관련 부분을 특별수사2부(부장 임관혁)에, 명예훼손 부분은 전담 수사 부서인 형사1부(부장 정수봉)에 나눠 배당했다. 현 정권의 청와대 핵심 인사가 대거 고소에 나선 사건인 만큼 휴일에도 검찰 지휘부는 고소장 내용을 검토한 뒤 사건 배당을 놓고 수차례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전날까진 사건 전체를 형사1부에 맡기는 쪽이 우세했다. 통상적으로 명예훼손 사건은 형사1부에서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말 사이 문건 작성자인 박관천(48·전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경정과 서울지방경찰청 정보 분실 소속 경찰들에 의해 유출됐다는 의혹에 이어 ‘청와대 내부의 문건 도난 유출설’까지 보도되면서 사건이 복잡해졌다.
12월 1일 오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문건 유출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다. 속전속결로 빨리 밝히도록 하라”고 강하게 주문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검찰이 막 착수하게 될 사건을 놓고 박 대통령이 구체적인 수사 방법과 기간, 수사의 결론까지 못 박아버린 것이다.
“기초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내부에서 그대로 외부로 유출된다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이번에 문건을 외부에 유출한 것도 어떤 의도인지 모르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다. 이런 공직 기강의 문란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적폐 중 하나다. (중략) 이 문제는 하루빨리 밝혀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 이 문건 유출을 누가 어떤 의도로 해서 이렇게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조속히 밝혀야 한다.”(12월 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문건 내용을 ‘기초적인 사실조차 확인되지 않은 떠도는 루머와 시중의 민원’으로 단정했고, 유출 경로에 대해서도 대통령의 관심 사안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골머리를 앓던 검찰의 배당 문제는 그 후 신속하게 풀려나갔다. 형사부 전담 쪽으로 기울었던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이날 오후 늦게까지 회의를 거듭하던 검찰은 문건 유출 의혹 부분만 따로 떼어내 옛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특별수사부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통상 형사부에서 명예훼손 사건을 처리하면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1년까지 가는 경우가 많고, 다른 경찰 송치 사건도 많아 청와대나 언론 등 힘센 기관의 사람들과 줄다리기를 하면서 조사를 진행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문건 내용의 진위를 가려야 하는 명예훼손 사건은 형사부에서 진행하는 대신 수사 효율성을 위해 특별수사부 지휘라인인 3차장검사가 사건 전체를 지휘하게 했다.
검찰 관계자는 “국정운영 핵심 기관인 청와대의 내부 문서가 무단으로 유출된 것을 중대한 범죄로 인식하며,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이렇게 결정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박 대통령 발언의 뜻을 충실히 살린 배당이자, 그에 대한 검찰 측 ‘배당의 변’이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국민의 관심이 쏠린 사안은 정씨가 청와대의 ‘그림자 실세’로 국정에 개입했는지, 또는 이른바 문고리 권력이라는 실세 3인방이 인사에 개입했는지 여부인데, 검찰은 오히려 대통령 관심 사안은 특별수사부에, 국민 관심 사안은 형사부에 배당한 격”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국정 농단보다 문건 유출 수사에 초점
12월 3일 오전 검찰이 서울 노원구 하계동 박관천 경정의 자택 지하주차장에서 압수수색한 문건들을 차량에 싣고 있다(위). 12월 3일 오후 검찰이 서울 남산 서울경찰청 정보1분실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후 압수품을 옮기고 있다.
청와대가 이미 “근거 없는 풍문을 모은 ‘찌라시’”라고 선을 그어 놨기 때문에 검찰 처지에선 유출된 문건 내용의 진위를 확인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12월 4일 검찰이 유출 문건에 10인의 회동 장소로 언급된 중식당까지 압수수색했지만, 별 소득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10인 회동과 국정 농단의 증거를 찾으려면 언급된 10인의 청와대 출입 기록이나 통화 기록, 위치추적 등을 총동원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관련자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을 경우 증명이 쉽지 않다. 지난해 10월부터 문건이 작성되기 직전인 올해 1월까지 사건 관련자의 동선을 100% 복원하기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건 유출 문제도 상황이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12월 3일 청와대가 내린 문건 유출에 대한 자체 결론과 4일 출두한 박관천 경정의 진술, 정보 분실 소속 직원 등 모두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어 유출 경위 파악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검찰로선 사면초가 상황에 놓인 셈. 그렇다고 대통령의 주문처럼 “하루빨리” “조속하게” 수사를 마치자니 부실수사 논란에 휩싸일 공산이 크다. 앞에는 대통령, 뒤에는 여론, 양옆에는 서로 대립하는 파워 권력이 버티고 서서 검찰을 압박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법조계 전반에선 벌써부터 당초 문건 유출 수사로 출발했다가 국회 국정조사와 특별검사를 거친 뒤에야 마무리된 김대중 정부 시절의 ‘옷 로비 사건’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흘러나온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곤혹스러운 사건을 맡았다”는 말이 공공연히 새나오고 있다.
검찰은 법조계 전반의 예상대로 청와대 측에서 의심하는 문건 유출 경로(박 경정→서울경찰청 정보 경찰→일부 언론)가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 보고, 12월 3일 박 경정의 서울 노원구 하계동 자택과 그가 근무하는 서울 도봉경찰서 및 서울지방경찰청 정보1분실 등의 경로를 따라 압수수색하는 것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검찰은 ‘정윤회 동향’ 문건을 작성한 박 경정이 청와대를 떠나 경찰로 복귀하기 일주일 전쯤 자신이 작성한 주요 보고서 100여 건을 종이로 출력한 정황을 포착했다. 청와대에서 문서를 인쇄, 출력할 경우 신분증 등으로 인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누가 언제 인쇄했는지 기록이 남는다. 특히 박 경정이 한꺼번에 출력한 문서들은 정씨 동향 보고서를 포함해 대통령 측근과 친인척 관련 문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날 박 경정이 2월 청와대에서 복귀할 때 문건 유출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서울경찰청 정보1분실 직원 한모, 최모 경위 등 3명의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이들을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와 조사했으며, 박 경정을 12월 4일 소환해 조사했다.
정윤회 씨가 청와대 비서관 등을 자주 만났다고 알려진 서울 강남구 한 음식점. 12월 4일 검찰의 압수수색이 있었다.
정권을 좌지우지한다는 힘센 인사들이 검찰 수사를 앞두고 전례 없는 싸움을 벌이는 것도 검찰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검찰의 배당이 이뤄진 직후부터 정씨와 박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56) EG 회장의 측근인 조응천 전 비서관은 공개적으로 서로를 비난하는 ‘막장’ 난타전을 벌였다. 정권 내부의 권력투쟁이 만 2년 된 정권의 조기 레임덕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사건 핵심에 대해 정씨는 정권 인사 등에 불만을 가진 ‘조응천 또는 박지만의 난’으로 봤다. 정씨는 12월 2일 ‘동아일보’와 전화통화에서 조 전 비서관이 문건을 만들고 보고한 동기에 “사건의 핵심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대통령의 인사 등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인지) 내가 그것을 알아보려고 4월 조 전 비서관을 만나려고 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핵심 3인방이 정부 인사를 좌우한다고 본 조 전 비서관 측이 정씨를 공격해 청와대 3인방을 제거하려 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반면 조 전 비서관은 정씨가 이재만 대통령총무비서관 등 청와대 핵심 3인방과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는 12월 2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문건을 작성한 전 행정관이 정씨와 3인방의 회동 자리에 참석한 사람으로부터 (문건 내용을) 들었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조 전 비서관은 ‘정윤회 문건’의 신빙성이 “6할(60%) 이상이라고 본다”고 했다.
특히 조 전 비서관은 “4월 10, 11일 이틀 동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지 않았다”면서 “그 후 ‘정윤회입니다. 통화를 좀 하고 싶습니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고 말했다. 회신하지 않자 “4월 11일 퇴근길에 이재만 총무비서관이 전화로 ‘(정씨의) 전화를 좀 받으시죠’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씨와 서로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는 최근 정씨의 언론 인터뷰가 사실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 정씨는 “조 전 비서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이 비서관에게 한 번 사정한 것을 계속 연락하고 지낸 것처럼 몰아가는 건 오버”라고 비판했다. ‘정씨가 박 회장을 미행했고 민정수석 산하 공직기강비서실에서 조사했다’는 내용의 시사주간지 보도 이후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에 ‘민정’이 개입돼 있다는 걸 알았고, 나한테 왜 이러는지 알아보려고 조 전 비서관에게 연락했지만 못 만났다”는 것.
조 전 비서관은 “나는 저들과 싸울 만한 ‘총알’이 많지 않다”며 “나는 조직도 없고, 개인이다. 나는 오로지 진실 말고는 기댈 게 없다”고도 했다. 정씨 또한 “허위사실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는 것밖에 없더라”면서 “굉장히 무력한 사람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국민 눈엔 당대 최강자로 보이는 이들이 서로 약자를 자처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문건 유출 죄 처벌도 애매
12월 3일 검찰 수사관들이 서울 도봉경찰서 정보과장 박관천 경정의 사무실에서 압수 물품을 상자에 담아 나오고 있다.
실제 문건 유출 혐의에 대해선 검찰이 유출자 색출에 성공한다 해도 처벌이 애매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고소인(청와대 8인) 측은 “유출된 문건이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대통령기록물 관리법)에 따라 지정된 기록물이라면 이 법에 의거해 처벌할 수 있고, 지정되지 않았다 해도 청와대 기록을 유출한 것은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공공기록물법) 위반으로 처벌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제 법 적용은 만만치 않다.
일단 대통령기록물 관리법에 따라 지정된 대통령기록물은 대통령이 직접 결재한 문서 또는 대통령 발언을 정리한 문서를 가리키는데, 유출 문건은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될 수 없는 성질의 문서이기 때문에 해당 법의 적용이 실질적으로 어려운 상황. 또한 공공기록물법을 적용하려 해도 청와대가 스스로 이 문건을 근거가 전혀 없는 ‘찌라시’라고 선을 그은 데다 “정식 보고서가 아니다”라고 부인했기 때문에 논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공공기록물로 인정된다 해도 원본이 아닌 사본이 유출됐기 때문에 법 적용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선 검찰이 문건 유출자에게 공무상 비밀누설죄를 적용할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논란의 대상이다. 법상 정의된 ‘비밀’은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을 때만 적용할 수 있어 검찰이 문건 내용을 청와대가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비밀’로 인정할 경우 명예훼손죄의 적용이 어렵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문건 유출자에게 형법상 비밀누설죄가 적용된다면 처벌 수위는 다른 법 위반보다 많이 낮아진다.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의 경우는 7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형을, 공공기관의 기록물을 무단으로 은닉하거나 유출하면 3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돼 있는 반면, 공무원이던 사람이 직무상 비밀을 누설하면 2년 이하 징역, 5년 이하 금고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명예훼손 건의 경우도 허위사실 공표로 기소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후 재판 결과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설령 문건 내용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 해도 기사의 공익적 성격과 기사를 보도한 언론사 또한 기자가 기사 작성 당시 문건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정황 증거가 있다면 이마저도 적용이 어려워지기 때문. 또한 명예를 훼손할 고의적 의도가 있었느냐는 부분도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면초가 상황에 내몰린 검찰은 발 빠르게 움직이며 자신들의 수사력을 과시하고 있지만 아무리 빨라도 올해 안에는 결론을 내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설령 검찰이 어떤 결론을 내리더라도 ‘미완의 수사’라는 평가와 특별검사 도입 논란은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