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헌재)가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린 3월 10일, 헌법학자인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석연 변호사(전 법제처장)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이날 헌재 결정에 대해 “헌법정신을 수호한, 역사에 남을 판결”이라고 평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가 그간의 분열과 갈등, 이념 대결을 극복하고 법치주의와 국민주권주의 원칙이 존중되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는 바람도 밝혔다.
▼ 헌재 결정이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했나.
이석연 / 탄핵심판이 시작될 때부터 만장일치로 대통령이 파면되리라고 봤다. 헌재가 결정문을 통해 ‘대통령이 최서원(최순실)의 국정개입을 허용하고 권한을 남용한 것은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밝혔는데 당연한 판단이다. 탄핵심판 과정에서 험난한 일이 많았지만, 헌법재판관들이 흔들리지 않고 헌법과 법률에 입각한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한다. 이번 판결로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인 것과 대한민국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 정신이 재확인됐다고 본다.
안경환 / 안창호 재판관이 보충의견을 통해 ‘이 사건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고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라고 했다. 이에 공감한다. 이번에 재판관들이 만장일치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것은 권위주의 시대를 청산하고 법치주의와 헌법주의가 확립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는 선언이다. 처음엔 재판 결론이 일방적으로 나올 경우 사회통합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헌재가 결정문에서 아주 정제된 문장으로 대통령 탄핵이 정치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바로세우는 문제임을 밝히지 않았나. 이것에 승복하지 못한다면 민주시민으로서 역량이 부족한 것이다.
▼ 헌재가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 퇴임 전으로 선고기일을 정해놓고 지나치게 서둘러 판단했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안경환 / 우리 헌법의 탄핵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트집이라고 본다. 미국은 탄핵이 최종 결정될 때까지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의결되는 순간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다. 그리고 국민이 선출하지 않아 민주적 정당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국무총리가 국정운영을 대행한다. 이런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헌법 규정은 탄핵심판이라는 예외적 상황을 되도록 빨리 해소하라는 헌법제정권자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석연 / 헌법을 공부하고, 헌재 판례를 봐온 사람이라면 이번 탄핵심판에서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데 공감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릴 사안도 아니다. 그런데도 헌재는 심리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측 주장을 충분히 청취하고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했다. 반면 대통령 측은 헌재가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은 검찰과 특별검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하는 등 법 위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헌법 수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할 만큼 절차 진행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을 일부 법조인이 진영논리에 매몰돼 헌재를 비판한 것이 안타깝다.
▼ 대통령 탄핵 인용에 반대하는 이들의 반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석연 / 헌재 결정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학문적으로 비판하고 논쟁을 벌이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그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헌재는 단심제다. 재심은 사실상 허용되지 않는다. 이미 헌재가 결론을 내린 사안에 불복한다는 건 헌정 질서 자체를 부인하겠다는 것 아닌가. 이를 선동하는 건 반헌법적 행동이다. 공직자가 탄핵심판 결과에 불복할 경우 탄핵 사유가 된다.
안경환 / 헌재 선고 직후 자유한국당(한국당)이 ‘헌법재판소의 고뇌와 숙의를 존중하고, (탄핵) 인용 결정을 겸허하게 수용하겠다’고 밝힌 것을 봤다. 한국당을 비롯한 모든 정당이 탄핵 결정에 승복하기로 한 상황에서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크게 확산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본다. 또 하나, 그동안 진행된 ‘태극기집회’에 참가한 사람 가운데 젊은 층이 많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싶다. 나이 든 세대는 그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걱정이 있고 우국충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헌재 판결이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전향적인 결정이고, 젊은 세대가 지지한다는 점에서 볼 때 혼란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이석연 / 아까 안 교수가 ‘대통령 탄핵에 대한 만장일치 결정이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지 않을까 우려했다’고 말했다. 아마 헌재도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만장일치 결정을 내린 것은 이제 진보와 보수, 좌와 우라는 이념적 대립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메시지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는 정치권이 새로운 통합의 시대를 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가능할까.
이석연 / 2000년 11월 미국 대선 상황을 떠올려보자. 당시 공화당 조지 부시 후보와 민주당 앨 고어 후보가 박빙의 대결을 벌였다. 개표가 끝난 뒤 플로리다 주 선거관리위원회가 부시 승리를 선언했는데, 플로리다 주 대법원은 재검표를 명했다. 재검표를하면 고어 쪽에 유리하다는 게 일반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 공화당 색채를 띠던 당시 미국 연방대법원이 부시 측 요청을 받고 이 사안을 논의해 5 대 4로 재검표 즉각 중단을 명했다. 누가 봐도 정치적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때 고어가 어떻게 했나. 바로 패배를 인정하고 지지자들한테 ‘결과에 승복하자’고 호소하지 않았나. 그때 고어는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분열을 막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박 전 대통령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비록 탄핵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물러나게 됐지만, 자신을 지지하던 국민에게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일상으로 돌아가달라’고 당부한다면,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할 수 있으리라 본다.
▼ 이번 사건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개헌이 필요한가.
이석연 / 이번 헌재 결정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 근거다. 그런데 국민은 그런 헌법을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다.’ 개헌 논의도 결국 국민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현행 5년 단임제 권력구조는 고쳐야 한다는 게 대체적 의견인 만큼 조만간 광범위한 여론조사를 통해 국민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볼 때 새로운 권력구조로 적합한 것은 4년 중임의 권력분산형 정·부통령제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외치와 내치를 나눠 맡는 방식의 이원집정부제는 한국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안경환 / 이 변호사의 의견에 대체적으로 공감한다.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국민 신임을 다시 한 번 물을 수 있도록 하는 4년 중임제가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현행 헌법의 5년 단임제 때문에 지금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짚어두고 싶다. 5년 단임제에서도 대통령이 헌법 원칙에 맞게 국정을 수행했다면 지금 같은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석연 / 제도에는 선악이 없다.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인 건 맞다.
▼ 차기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뭐가 돼야 할까.
안경환 / 헌법과 법률을 존중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도 존중하는 후보를 선출해야 할 것이다. ‘블랙리스트’ 같은 것을 만드는 지도자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석연 / 이번 사건을 계기로 돌아보니 대한민국 수립 후 대통령직을 맡은 11명 가운데 국민의 박수를 받으며 떠난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 왜 그랬을까. 일차적 책임은 대통령 자신에게 있지만, 그를 보좌하는 측근들의 잘못도 적잖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기 대통령은 절대 자기 편, 자기 사람에게 둘러싸인 인물이면 안 된다고 본다. ‘철 지난 이념조각’을 붙들고 대한민국을 분열시키는 사람도 안 된다. 헌법정신으로 대한민국을 화합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안경환 / 새로운 정부가 구성됐을 때 국민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인적 구성일 것이다. 차기 지도자는 내 사람, 네 사람 가르지 않고 각 직책을 수행할 최고 적격자를 골라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시장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이상, 정부가 바뀌어도 지금 정책의 90%는 유지된다고 봐야 한다.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일하는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이석연 / 이번 사건에서 드러났듯, 대통령 곁에 직언할 수 있는 인사를 배치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치통감’에 ‘군주가 어질면 신하가 곧다’는 대목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통령은 당선하면 자기 사람 챙기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이제 그런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통 큰 정치를 하는 대통령이 나와야 할 때다.
▼ 대한민국이 큰 터널을 지났다. 지금까지 혼란이 우리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이석연 / 우리 국민의 지혜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우리 국민은 여러 선거에서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절묘한 수를 보여줬다. 지난 총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 전 대통령이 당시 드러난 민심을 겸허하게 수용했다면 헌정 사상 최초 대통령 탄핵이라는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이를 묵살하려 했고, 국민은 그런 지도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70~80%가 탄핵에 찬성했다. 확고한 주인의식을 보인 것이다. 이런 현명한 주권자가 있는 한, 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낙관한다.
안경환 / 우리가 역사가 발전한다는 확신을 하려면 새로운 세대가 민주의식,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청년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탄핵국면에서 청년들이 정치적 의사를 적극 표현한 것에 큰 의미를 둔다. 부모와 자식이 대결하면 결국 자식이 이기게 돼 있다. 어른들이 시대 흐름에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이번 사건의 교훈이 될 것이다.
이석연 / 어느 사회에나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 갈등이 있다. 사회적 소통을 통해 이를 극복해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기에 이념논쟁, 색깔논쟁까지 더해져 있었다. 북한이라는 존재를 실제 이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정치권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심화됐다. 이를 넘어서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갈 수 있다. 이번 헌재 결정이 그걸 극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안경환 /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 또한 출발점은 비선 실세의 비상식적인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적 분노였다. 그런데 나중에 이념대결로 변질되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다. 이념 갈등과 헌법 문제를 구별하고 헌정질서 수호 의지를 명확히 밝힌 이번 헌재 결정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다행히 요즘 젊은 세대는 이념 문제에 휘둘리지 않는다. 이들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으로 믿는다.
안경환
● 1948년 서울 출생
● 서울대 법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 로스쿨(LL.M.), 산타클라라대 로스쿨(J.D.)
● 전 서울대 법대 교수
● 전 한국헌법학회장
● 전 국가인권위원장
● 수상 : 2012년 대한민국 법률대상(인권부문)
● 저서 : ‘좌우지간 인권이다’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
‘남자란 무엇인가’ 등
이석연
● 1954년 전북 정읍 출생
● 전북대 법학과, 서울대 법학대학원(법학박사)
● 행정고시 23회, 사법시험 27회
● 전 헌법연구관
● 전 법제처장
● 현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
● 저서 : ‘헌법의 길 통합의 길’ ‘헌법등대지기’
‘헌법은 살아 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