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의 상징으로, 두 곳 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특히 마린스키 극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막역한 친구인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총감독 겸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고향인 푸틴 대통령은 마린스키 극장에서 종종 오페라 공연을 관람했다.
푸틴의 ‘신동방정책’ 성과는 미미
제정러시아 시대인 1860년 개관한 마린스키 극장은 차르 알렉산데르 2세의 부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최근 이 마린스키 극장이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정반대쪽이자 러시아 영토의 동단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분관을 마련했다. 게다가 게르기예프는 7월 29일부터 8월 10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 분관에 저명한 예술가를 대거 초청해 제1회 마린스키 극동 페스티벌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게르기예프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마린스키 극장 분관을 설립한 이유는 바로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정책’을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신동방정책은 극동지역 개발로 러시아의 경제발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 극동지역을 개발하려면 많은 인력이 유입돼야 하는데, 러시아 국민은 대부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척박한 이 지역을 외면해왔다. 실제로 극동지역에는 변변한 문화·예술 공연장조차 없다. 게르기예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극동지역의 문화·예술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강조한 점도 푸틴 대통령의 의지를 대변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극동지역 개발을 국정 최우선과제로 정하고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왔다. 푸틴 대통령이 극동지역 개발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무엇보다 아시아·태평양(아태)지역이 세계경제의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원 개발이다. 극동지역은 자원의 20%만 개발됐고 나머지 80%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원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동토(凍土)가 녹으면 에너지자원 개발은 더욱 활기를 띨 것이 분명하다.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한 데 따른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를 돌파하려는 속셈도 있다.
러시아 정부가 현재 추진 중인 대표적인 개발 계획은 극동·바이칼 사회·경제발전 프로그램(국가프로그램 2025)이다. 이 계획은 2025년까지 3조5670억 루블(약 61조6700억 원·연방예산 5366억 루블 포함)을 투입해 일자리 42만7000개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크게 선도(先導)사회·경제개발 계획,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 계획으로 나뉜다. 선도사회·경제개발 계획은 우리나라의 자유경제구역(IFEZ)과 비슷한 개념으로, 먼저 개발지역을 선정한 뒤 각종 행정·세제상의 혜택을 주면서 국내외 투자를 끌어들이겠다는 구상이다. 연해주 나데즈딘스키(제조·물류), 하바롭스크 주 하바롭스크(식품가공), 아무르 주 프리아무르스카야(제조업) 등 9곳이 선도사회·경제개발 계획 지역으로 지정됐다.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 계획은 연해주 15개 도시를 홍콩, 싱가포르 등과 유사한 세계적인 자유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자유항에 입주한 기업들은 5년 동안 소득세가 면제되고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정부가 이처럼 극동지역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괄목할 만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노동력으로 활용할 인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극동지역은 전체 국토 넓이의 36%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623만 명으로 러시아 전체 인구 1억4367만 명의 4.3%에 불과하다. 옛 소련은 거주 이전을 제한했지만, 이제는 강제조치를 취할 수 없어 극동지역의 인구는 날로 줄어들고 있다. 반면 중국인은 대거 극동지역으로 몰려들고 있다. 2025년이 되면 중국인이 극동지역의 다수민족이 되리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인구를 늘리고자 극동지역 거주민이나 이주민 가운데 희망자에게 토지 1ha(1만㎡)를 무상으로 분배하는 특단의 대책을 제시했다.
또 다른 이유는 외국 기업들의 투자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외국 기업의 극동지역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9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2차 동방경제포럼을 직접 주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방경제포럼은 러시아가 극동지역을 발전시키고자 각국과 경제협력을 논의하는 연례회의를 말한다. 지난해에 이어 이번 제2차 포럼에는 ‘러시아의 극동지방을 열다’라는 주제로 각국 정부 인사와 기업인 등 30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한다.
동북아 질서의 새로운 ‘블루오션’
그러나 주목할 점은 푸틴 대통령이 극동지역 개발에 몸이 달아 있으면서도 중국과 일본의 투자를 무조건 환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과 준(準)동맹 수준까지 관계를 강화해왔지만 대규모 투자는 경계하고 있다. 자칫하면 극동지역이 중국에 종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일각에선 중국인이 극동지역을 접수할지도 모른다는 ‘황화론(黃禍論)’까지 제기되고 있다. 일본과는 쿠릴열도 4개 섬(일본명 홋포료도·北方領土) 영유권 문제가 걸림돌이다. 아베 총리는 푸틴 대통령에게 경제협력을 빌미로 쿠릴열도 4개 섬의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푸틴 대통령은 영토 문제를 일본에 양보할 경우 자국민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할 수 있는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다.반면 푸틴 대통령으로선 한국과 관계 강화는 아무런 정치·외교적 부담이 없다. 한국은 러시아에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는 데다 첨단기술을 갖춘 제조업 강국이라 경제적으로도 최적의 협력 대상이다. 또한 한국은 극동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필요로 한다.
한국에게도 러시아는 동북아 질서를 새롭게 구축하는 전략적 카드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경제협력이 양국 관계 강화의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한국 기업에게 땅이 넓고 자원은 많은데 인구가 적고 기술은 부족한 러시아 극동지역은 ‘블루오션’이 될 것이다. 현재는 북핵문제로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지만 러시아 극동지역에 대한 투자는 통일 이후 가장 좋은 방책이 될 수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도 있다.
중국은 사드 배치 반대와 관련해 러시아와 공동 연대를 강조해왔다.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일본이 공동 전선을 펴자 중국이 러시아를 적극 개입하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남중국해나 한반도에서 중국과 이해관계가 다르다. 남중국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데다 중국이 껄끄러워하는 베트남과는 냉전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다. 러시아는 사드 배치에 반대하지만 중국보다는 훨씬 강도가 약하다. 러시아는 중국처럼 ‘한국 때리기’에 나서지도 않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박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극동지역에 대한 대규모 개발 협력을 제시하면서 사드 배치 반대 입장을 누그러뜨리라고 설득할 필요가 있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우방도 없고 적도 없고 오로지 국익만 있을 뿐이라는 독일 출신의 학자 한스 모르겐타우의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