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 1일 의약분업이 시작되고 어느덧 만 16년이 지났다. 당시 정부가 내놓은 의약분업의 대원칙은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의사도, 약사도 모두 약을 처방·조제해 팔 수 있는 기존 체제를 뒤집고 의사에겐 약 처방권을, 약사에겐 약 조제권을 줬다. 의사와 약사의 상호 협조 및 감시 속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항생제 등 내성 유발 전문의약품의 오·남용 관행을 뿌리 뽑겠다는 게 정부의 최우선 목표였다.
두 차례 ‘의료대란’을 겪고 전 국가적 내홍을 감내하며 지켜온 의약분업은 제도적 정책 목표를 과연 얼마나 달성했을까. 항생제 등 의약품 오·남용 관행이 계속되면서 병원 내 감염은 갈수록 늘고 있다. 약의 오·남용을 막고 감시해야 할 약사는 더 많은 처방전을 받고자 병·의원 코앞에 ‘문전약국’과 ‘담합약국’을 만들어 ‘영혼 없는’ 조제에 열심이다. 제대로 된 복약지도가 없으니 의료서비스가 좋아질 리 만무하다. 줄어들 것이라는 약제비는 제약사 리베이트의 창궐로 국민건강보험 재정에 부담만 주고 있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항생제 감소를 위한 특단의 대책’은 의약분업의 최우선 목표인 의약품 오·남용 방지가 16년이 지난 지금도 자리 잡지 못했음을 자인한 셈이다. 보건복지부는 8월 11일 ‘국가 항생제 내성 관리대책(2016~2020)’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의료기관 항생제 적정성 평가 강화 △감염에 취약한 진료 환경 개선 △주요 내성균 전수 감시 등이다.
갈 데까지 간 항생제 오·남용
또한 보건복지부는 이 대책에서 의원급을 대상으로 시행 중인 급성상기도감염(감기 포함) 항생제 적정성 평가에 따른 외래관리료 가감 지급 규모를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의원급은 급성상기도감염 항생제 처방률에 따라 외래관리료의 1%를 가감산하는데 이 수치를 2019년 말까지 3%까지 확대하겠다는 것. 쉽게 말해 항생제를 많이 쓰는 의원급 의료기관은 국민건강보험 재정으로 지원하는 외래관리료를 3%까지 줄이고 적게 쓰는 의원급은 3%까지 더 준다는 뜻이다. 따라서 항생제 사용량에서 ‘적정’과 ‘부적정’ 평가를 받은 의원급 간 국민건강보험 수가 차는 현재 연평균 200만~250만 원 수준에서 2019년 말 600만~750만 원으로 벌어질 전망이다.
보건복지부는 “항생제 내성균의 발생은 치료제가 없는 신종 감염병과 유사한 파급력을 지니며 사망률 증가, 치료기간 연장, 의료비 상승을 초래한다”면서 “특히 급성상기도감염 항생제 처방률은 2020년까지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반드시 낮추겠다”고 밝혔다. 급성상기도감염은 상기도(코와 후두)가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으로, 감기가 대표적 질환이다.
각종 통계에 따르면 의약분업 시행 전 우리나라의 항생제 사용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국민건강보험 환자의 58.9%가 항생제 처방을 받아 세계보건기구(WHO) 권장치 22.7%의 2.6배를 웃돌았다. 항생제 내성률(약물 복용을 반복함으로써 약효가 저하하는 확률)도 의약분업을 실시하는 국가보다 6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의약분업 시행으로 항생제 오·남용이 감소할 것으로 기대했다. 의사, 약사가 환자 치료를 위해 의약품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불필요한 조제 및 투약을 방지하고, 환자가 의사 처방 없이 전문의약품을 약국에서 사는 것을 금지해 무분별한 약 복용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정부는 의약분업 시행을 위해 1994년 개정 약사법에 ‘1999년 7월 7일 이전에 의약분업을 실시한다’는 규정을 포함하고 98년 의약분업추진협의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의약계의 찬반 여론이 워낙 팽팽한 탓에 의약분업 시행은 계속 연기됐다. 2000년 6월에는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의사들이 폐업해 전국 병·의원의 70% 이상이 문을 닫는 ‘의료대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문직종의 기득권 싸움’ ‘국민의 의료 선택권 침해’ 등 여론 분열을 낳은 의약분업은 수많은 진통 끝에 2000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의료분쟁 겪느니 일단 항생제 처방”
그리고 16년이 흐른 지금 첫 순위 목표였던 ‘항생제 오·남용 방지’는 이뤄졌을까. 절대수치는 감소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02년 감기 환자의 항생제 처방률은 72.6%에서 2015년 44%로, 전체 항생제 처방률은 41.7%에서 24%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4년 국내 전체 항생제 사용률은 1000명당 31.7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산출기준이 유사한 12개국 평균(23.7명)보다 약 34% 높다. 특히 감기 항생제 처방률은 네덜란드(14%), 호주(32%)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다.
의약분업을 시행한 지 16년이 흐른 현 시점에 정부가 왜 갑자기 ‘특단의 대책’ 운운하며 ‘항생제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일까. 항생제 오·남용에 따른 부작용이 갈수록 심화돼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항생제 오·남용은 필연적으로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내성균(슈퍼박테리아)을 만들고, 이는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감염병을 유발한다. 제약사가 내성균을 죽이는 ‘슈퍼항생제’를 개발하면 그에 대응하는 2차, 3차 내성균(울트라박테리아)이 출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결국 그 어떤 항생제로도 치료할 수 없는 감염병이 확산할 수 있다.
실제 2014년 질병관리본부 통계를 보면 한국은 항생제 일종인 ‘반코마이신(슈퍼항생제)’에 대한 장알균(VRE)의 내성률이 36.5%로 프랑스(0.5%), 독일(9.1%), 영국(21.3%)보다 훨씬 높다. 일반 항생제나 슈퍼항생제로도 듣지 않는 울트라박테리아가 출현해 우리 국민이 감염병으로 사망할 수 있는 확률이 다른 나라보다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김홍빈 분당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항생제는 적정한 처방에 따라 복용해야 한다. 몸속 세균은 항생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내성이 생기기 때문에 항생제 양이 과하면 내성균도 많이 생성된다. 또한 항생제를 복용하다 증상이 낫는 시점에 환자 임의대로 복용을 중단해도 내성균이 생성된다. 항생제를 끊어도 체내에 항생제가 일부 남아 세균이 저항하면서 내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의사가 처방한 기간 항생제를 남기지 말고 다 복용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의약분업 시행에도 한국의 항생제 처방률이 높은 이유는 감기 치료에 대한 전 국민적 몰이해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기는 세균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무조건 항생제를 먹어야 빨리 치료된다’는 잘못된 상식이 일반 국민에게 널리 퍼져 있는 데다, 감기(독감 포함) 원인을 빠르게 파악할 수 없는 병·의원의 의료 환경도 항생제 처방을 부추기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감기(cold)’의 원인인 병원체는 항생제로 죽여야 하는 세균, 즉 박테리아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오히려 그 원인 가운데 약 80%는 세균이 아니라 바이러스다. 다시 말해 감기의 80%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한 ‘독감(인플루엔자)’이다. 따라서 독감 치료에는 항생제가 아닌 항바이러스제제를 써야 한다. ‘신종플루’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해 전파되는 독감을 통칭하고, 여기에 쓰는 광범위 항바이러스제제가 바로 타미플루다. 다시 말해 실제 병·의원이 항생제 처방으로 치료할 수 있는 세균성 감기는 그만큼 드물다는 뜻이다.
처방 후 진단 명세 조작도
문제는 환자 인당 진료시간이 5분 이하인 국내 의료 현실에서 의사가 환자의 감기 증상이 바이러스성인지 세균성인지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김홍빈 교수는 “대학병원급 의료기관에는 감기가 세균성인지 바이러스성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검사 시설이 일정 부분 갖춰져 있다. 하지만 의원급 의료기관은 이런 검사 시설을 유지할 여력이 없다”며 “의료 수가가 낮아 환자를 ‘빨리, 많이’ 봐야 병·의원이 유지되는 환경에서 환자와 장시간 대화하고 병을 진단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종웅 서울시 개원내과의사회 회장은 “바이러스는 세균이 인체에 침투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 따라서 감기가 바이러스성에서 멈추지 않고 세균성 질환까지 동반할 가능성이 있거나, 바이러스와 세균이 거의 동시에 침투했다고 판단될 때는 항생제를 처방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감기의 원인과 치료에 대한 국민적 이해 부족도 항생제 오·남용을 부추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 많은 환자가 “빨리 나아야 하니 강한 약을 써달라”고 생떼를 쓰며 의사를 압박하곤 한다. 현직 의사 A씨는 “환자가 ‘시험을 앞뒀다’는 등의 이유로 강한 주사(항생제)와 먹는 항생제를 요구할 때가 있다. 그러면 의사는 ‘항생제가 필요 없다’며 환자를 설득하지만 환자가 고집을 부리면 어쩔 수 없이 처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의사는 “항생제 남용이 환자에게 안 좋다는 걸 알지만 의사는 성직자가 아니다. 치료에 대한 신념만 내세우며 환자와 싸울 수는 없지 않나”라고 토로했다.
감기라면 무조건 항생제 처방부터 하는 의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만에 하나 생길 수 있는 ‘오진’ 시비를 미리 차단하고자 항생제를 처방하는 경우다. 현직 의사 B씨는 “한 가지 증상에는 여러 질병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의사가 바이러스성 질환이라고 판단할 때도 세균성 질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의사가 항생제를 처방하지 않았는데 추후 환자가 ‘세균성 질환인데도 왜 항생제를 주지 않았느냐’고 따지거나 심한 경우 의료소송도 제기하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하는 의사는 일단 항생제를 처방하고 본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특단의 대책’처럼 외래관리료를 조정해 병·의원에 경제적 불이익을 주면 항생제 처방률이 낮아질까. 의약계 종사자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직 간호사 C씨는 “병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제출하는 진단 명세를 조작하는 경우를 봤다. 감기 환자에게 항생제를 처방했으면서도 항생제 처방률을 낮추고자 질환명을 ‘감기’ 대신 ‘편도선염’ 등으로 고쳐 쓰는 식으로 조작한다. 감시를 강화하지 않으면 이 같은 행태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송영구 연세대 의대 감염내과 교수는 “국민건강보험 수가 체계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의사들은 오·남용 문제를 알면서도 항생제를 계속 처방할 것이다. 10%의 세균성 감염을 놓쳐 의료분쟁을 겪느니 항생제를 처방하는 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감기 치료제=항생제, 국민 의식 전환부터
항생제 오·남용은 전문의약품 처방권을 가진 의사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의사들은 “우리만 비난하지 마라”고 말한다. 이 때문일까. 보건복지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감기의 원인 병원체를 가리는 진단 검사에도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 보건복지부 질병정책과 관계자는 “감기의 세균성 질환 여부를 판단하는 검사를 의원급 의료기관에서도 시행할 수 있도록 국민건강보험 수가 조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만약 이처럼 수가 체계가 변경되면 감기 병원체 진단 검사를 시행하는 의료기관은 경제적으로 이익을 볼 수도 있다.의사들은 외래관리료의 가감산 비율을 현행 1%에서 3%로 늘리는 것과 관련해서도 “경제적 압박만이 능사는 아니다. 의사의 처방권을 존중해달라”고 주장한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외래관리료 조정으로 불이익을 보는 병·의원은 감기 항생제 처방률이 80~90%에 달하는 극히 일부 기관이 될 것이다. 의사들이 걱정하는 만큼 경제적 손실이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항생제 처방률이 높은 의료기관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에 그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김양균 경희대 의료경영학과 교수는 “항생제 오·남용과 관련한 국민 의식을 바꾸는 게 급선무다. 일부 환자는 ‘감기를 빨리 낫게 하는 의사’를 명의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독한 약을 쓰거나 항생제를 과다 처방했을 때 일어나는 결과일 수 있다. 국민이 항생제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도록 정부 차원의 교육을 확산해야 한다. 아울러 의료 수가 체계의 개선과 병원 내 감염을 방지하는 시스템 등도 정부 지원으로 개선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