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7일 어린이 2명이 서울 강남구 언북초 후문 쪽 보차혼용도로를 걸어가고 있다. [이슬아 기자]
보차혼용도로 보완이 급선무
기자가 찾은 이날도 같은 도로에서 위험천만한 상황이 자주 목격됐다. 은색 승용차 한 대가 한 아이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자 ‘당신의 현재 속도’라고 쓰인 속도 측정판에는 숫자 ‘44’가 찍혔다. 시속 20㎞ 이하로 주행해야 한다는 스쿨존 안내 문구와 표지판이 총 5개나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12월 들어 스쿨존과 스쿨존 인근에서 어린이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연달아 발생하면서 스쿨존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스쿨존은 1995년 처음 지정되기 시작해 2022년 서울에만 1741개로 크게 늘어났다. 서울 지역 초등학교 606곳 모두 스쿨존에 속한다. 2020년에는 ‘민식이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스쿨존 내 안전·단속 설비 의무화, 사고 운전자 처벌 강화 등 관련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변화에도 스쿨존 어린이 교통사고 건수는 줄지 않았다. 2021년 사고 건수는 523건을 기록해 2020년(483건)보다 되레 늘었고, 2022년 1~9월(누적 잠정치)에는 399건이 발생해 전년 같은 기간(395건)과 유사한 수준을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스쿨존 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좀 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잘만 활용하면 ‘보차분리도로’보다 더 안전할 수 있는 보차혼용도로를 보완하는 게 급선무라는 지적이 많다. 언북초 사고 원인 중 하나로 스쿨존 내 보차혼용도로가 지목됐다. 사고 이후 강남구가 언북초 주변 도로에 보행로, 방호울타리 신설 등 특별대책을 내놓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는 ‘차만 다니는 길’이라는 인식 때문에 보차분리도로에서 오히려 운전자가 제한속도 등 안전의무를 다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손원표 길 문화연구원장은 “가장 위험한 도로는 가장 안전해 보이는 도로라는 역설이 있다”며 “운전자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차로에서 더 빨리 달리게 되는데 보행자는 기존 좁은 도로에 1~2m 폭으로 설치된 보행로가 갑갑해 차로로 나가 걸어갈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교통심리학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보차혼용도로를 그대로 두고 해당 도로에서 차량이 속도를 더 줄일 수 있는 외부환경을 조성하는 편이 낫다”고 설명했다.
2022년 12월 27일 언북초 후문 근처 담벼락에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진 A 군을 추모하는 꽃과 메모, 간식이 놓여 있다. [이슬아 기자]
스쿨존 주행 차량에 자동제동장치 적용해야
블록 포장 도로, 지그재그 차선, 고원식 교차로, 둔덕형 건널목 등이 외부환경 조성의 예다. 실제로 2020년 서울시가 스쿨존 5곳(가양초, 소의초, 신현초, 양진초, 이수초)에 이 같은 시설물과 함께 보차혼용도로를 시범 도입한 결과 기존보다 차량 통행량은 10%, 평균 속도는 15.9% 감소했다. 블록 포장도로의 경우 아스팔트 도로에 비해 차량 주행 속도가 평균 13% 줄어든다는 국내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언북초 인근 보차혼용도로에는 착시효과를 기반으로 한 가상과속방지턱 이외에 차량 속도를 물리적으로 제어하는 시설물이 전무했다. 보차분리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대근 서울기술연구원 연구위원은 “언북초 앞 도로를 사괴석으로 포장하고 과속방지턱을 설치하겠다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며 “특히 사괴석 포장은 블록 포장에 비해 지반 투수율(透水率)이 낮아 또 다른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초기 시공에도 5배 넘는 비용이 든다”고 비판했다.완전한 사고 예방을 위해 차량에 자동제어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재 스쿨존에서 안전의무 준수 여부는 전적으로 운전자에게 달렸다. 따라서 음주운전, 악천후 등으로 운전자가 제한속도를 지키지 못할 때 발생하는 사고는 어떤 대책으로도 막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장일준 가천대 도시계획학과 교수는 “운전자에게 부과되는 안전의무를 준수하지 않는 사람이 1명이라도 존재하는 한 사고 발생 가능성은 ‘0’이 될 수 없다”며 “스쿨존에 진입하는 차량이 제한속도 이상으로 주행하면 자동으로 차량이 멈추는 시스템을 전면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학교 시설물 활용하는 것도 방법
이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한 기술력도 충분하고 비용도 과도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 시각이다. 2014년 이후 국내에 출시된 차량에는 대부분 ‘자동긴급제동장치’(충돌 위험 경고에도 운전자가 반응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주행을 멈추는 기술)가 장착돼 있다. 이를 적용하면 스쿨존 주행 차량에 대한 자동제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장 교수 설명이다. 장 교수는 “관련 첨단기술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미 개발된 상황이라면 필요한 곳에 적절히 써야 한다”며 “자동긴급제동장치가 스쿨존에서 활성화되도록 센서만 가동하면 되기 때문에 비용도 크게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어린이가 차로에 노출되는 정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학교 시설물을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학교 정·후문이 학생들의 주요 통학로와 가깝지 않거나 등하교 시 특정 문만 이용하도록 교칙을 정한 경우 아이들이 차로를 이용해 출입구로 걸어가는 시간이 추가로 소요된다. 이때 사고 발생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쪽문, 운동장 등을 적극 개방해 가능한 빨리 안전지대인 학교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신해 서울연구원 도시인프라계획센터 선임연구원은 “차로를 거의 접하지 않고 등하교가 가능하다면 차량으로 통학하는 학생이 자연히 줄어들 것”이라며 “그러면 스쿨존에 차량 통행량 자체가 감소하는 긍정적 연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원은 “스쿨존 내 차량 통행을 전면 혹은 시간제로 제한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차로뿐 아니라 차량 노출까지 줄일 수 있도록 스쿨존에서 차량을 최대한 배제하는 원칙적 접근도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서울 지역 일부 자치구는 이미 통학 시간대 스쿨존 내 차량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어린이가 활동하는 모든 공간을 ‘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해당 구간에는 차량이 일절 다닐 수 없다. 이 연구원은 “다만 차량을 배제할 때 그 우선순위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며 “차량을 이용한 통학은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기 때문에 학부모 차량을 가장 먼저 배제하고 그다음이 교직원, 마지막이 지역 주민이 돼야 반발을 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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