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성이 슈퍼마켓에서 유제품을 고르고 있다. [TASS]
전쟁 전보다 강세인 루블화
러시아가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서방이 강력한 각종 제재 조치를 내리자 경제 전문가 상당수는 러시아가 포템킨 경제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사상누각’이라던 러시아의 포템킨 경제는 전쟁 발발 6개월이 지나도록 붕괴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 경제는 서방의 각종 제재 조치로 어느 정도 약화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굳건하다. 수도 모스크바와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우 식당과 술집이 여전히 붐비고, 슈퍼마켓 등에는 일부 수입 품목을 제외하면 각종 제품이 가득 차 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6개월이 지난 현재 러시아는 그 나름 위기를 극복하며 잘 버티고 있다”면서 “러시아 중앙은행과 통계청이 무역, 투자 등 경제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서방 경제 관련 기관들이 내놓은 지표를 보면 러시아 경제가 붕괴하리라는 예측은 빗나간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경제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사용하는 현재활동지수(CAI)를 보면 러시아 지수는 3∼4월 급격히 떨어졌으나 이후 회복세로 돌아섰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체이스도 6월 러시아 산업 생산이 지난해와 비교해 1.8% 줄었으나 심한 불황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물가나 환율 지표도 안정적인 편이다. 소비자물가는 연초부터 5월 말까지 약 10% 올랐지만 지금은 떨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 기대치는 3월 17.6%였으나 7월에는 11%로 하락했다. 루블화 가치도 2월 말부터 3월까지 폭락했다 이후 서서히 상승해 지금은 전쟁 전보다 강세로 돌아섰다. 러시아 최대 은행 스베르방크는 러시아 국민의 중위소득이 봄 이후 상승했고 소비자 지출도 줄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서방이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했지만, 그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4%를 기록했지만 경제전문가들의 예상치인 -4.7%보다 양호한 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러시아의 올해 GDP 성장률이 -6%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는 개전 초기 경제전문가들이 예상했던 -10%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중국·인도·튀르키예, 러시아산 석유 수입 늘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맨 앞줄)이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의 석유 터미널 건설 조감도를 살펴보고 있다. [크렘린궁]
그럼에도 러시아 경제가 버티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 때문이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 가스 수출국이자 두 번째 석유 수출국이다. 러시아 경제개발부는 가스 가격이 상승하고 석유 수출이 증가해 올해는 지난해보다 에너지 부분 수출에서 더 많은 이익을 보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 경제개발부에 따르면 올해 에너지 수출 흑자 전망치는 3375억 달러(약 455조 원)로 지난해 2442억 달러(약 329조 원)와 비교해 38% 증가했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산 가스와 석유의 수입을 중단하거나 줄였지만 수출 금액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특히 석유 수출의 경우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산 수입을 줄이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오히려 수입을 늘렸다. 게다가 배럴당 100달러 안팎의 고유가 덕분에 러시아의 석유 수출 이득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7월까지 러시아 석유 생산과 수출이 예상보다 호조를 보였는데, 이는 중국과 인도, 튀르키예(터키) 등이 석유 수입을 늘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석 달째 대중(對中) 최대 석유 공급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까지 육상 송유관과 해상 운송을 통해 중국에 공급된 러시아산 석유는 총 715만t으로, 지난해 대비 7.6% 증가했다. 인도도 6월 러시아산 석유 수입이 하루 95만 배럴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도의 러시아산 석유 수입은 전체 석유 수입의 20%를 차지한다. 튀르키예는 올해 러시아산 석유 수입량이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늘어났다. 튀르키예는 올해 들어 지금까지 하루 평균 20만 배럴에 달하는 러시아산 석유를 수입하는 등 지난해 같은 기간 9만8000배럴과 비교해 수입량을 크게 늘렸다. 심지어 러시아는 아시아 국가들에 석유 장기 공급 계약 조건으로 공급가를 최대 30% 할인해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다. IEA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의 7월 하루 산유량은 우크라이나 전쟁 전보다 3%(31만 배럴)가량 감소했다. 러시아의 석유 수출량(원유, 석유제품)도 전쟁 전 수준보다 하루 58만 배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미국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아예 금지했고, 유럽연합은 12월 5일까지 해상을 통한 러시아 석유 수입을 금지하는 동시에 내년 2월 5일까지 석유제품을 수입하지 않기로 했다.
러시아의 가스 수출은 석유와 달리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은 올해 예상 가스 수출량을 1850억㎥에서 1704억㎥로 하향 조정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내년 3월까지 가스 소비량을 지난 5년 평균보다 15% 감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중 가스 수출량은 전체 수출량의 10%에 불과한데, 파이프라인이 추가 건설되지 않아 수출량을 늘릴 수 없는 상황이며, 이에 러시아가 유럽 이외에 가스를 수출할 지역은 없다.
러시아 시베리아에 위치한 유전 모습. [Stato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