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6

2013.07.15

아홉 마디 @오메가

제7화 적과 동지

  • 입력2013-07-15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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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오래전이다. 사이버머니를 나눠주고 깔끔하게 손을 털었다. 학생치고 거액이었기에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철방도 처음에는 버텼다.

    “개평은 줄게.”

    “안 돼! 우린 생돈을 박아야 해.”

    “그럼 겜 해서 따면 될 거 아냐?”

    “그렇게 나올래? 후회하지 마.”



    그게 경고였다.

    수입이 짭짤했던 어느 날 밤, 휘파람을 불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녀석과 어깨가 스쳤다. 몇 살 많아 보였다.

    “나 번돌이야.”

    그는 철방을 아파트 공터에 밀쳐 넣었다. 번돌의 아이들이 철방을 둘러쌌다.

    철방은 오기가 발동했다.

    “어쩔래? 할 테면 해봐!”

    철방은 주먹을 불끈 쥐고 악을 썼다.

    “제법인데!”

    “번돌이라며? 너도 따잖아?”

    “내 동생들은 다 잃었단 말이야.”

    번돌은 철방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오른손이 뒤로 빠지며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철방이 아냐 하는 소리가 들렸다. 판수 형 하며 뿌리치는데 주먹이 날아들었다. 게임에선 1대 다수도 이겼지만 주먹은 달랐다. 마무리는 세미가 했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철방은 스마트폰에서 세미의 전화번호를 찾으려다 그만두었다. 있을 리 없다. 서로의 흔적을 지우기로 했으니까. 그 대신 보라의 번호를 눌렀다.

    세미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미소 띤 얼굴에 엄숙함이 스쳐간다. 전화기를 왼손으로 바꿔 잡고 오른손으로 메모를 한다.

    “그건 할 수가 없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세요. 사례는 얼마든지 하죠.”

    “고액 사이버머니 현금화는 불법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더는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난 당신 행적을 잘 알아. 잘난 척 말아요. 조만간 만나게 될 테니.”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다 말해버릴걸. 외국에 서버를 두고 하는 환전, 모바일 이용 방법, 그리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이용 등. 그런 다음 해킹을 해 세상에 알리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억지로 잊고 지낸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기철방. 뭘 하고 있을까? 게임 조력자였고, 사이버머니도 함께 모았다.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멋진 커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뭐가 되어 있을까?

    “범죄자, 아니면 월가의 신흥재벌, 둘 중 하나겠지. 범죄자가 됐을 가능성이 높아. 왜냐고? 법을 어겨야 하니까.”

    중얼거리다 피식 웃었으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보고 싶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스마트폰이 진동을 한다. 모르는 전화번호다. 좀 전 그 고객이 떠올라 받지 않았다. 10분 후 다시 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도 받지 않았다. 바로 문자메시지가 떴다.

    ‘오랜만이다, 세미야. 나 철방이야. 일이 생겼어. 연락 바란다.’

    세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얼굴도 달아올랐다.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10분 후 다시 그 번호가 떴다.

    “여보세요.”

    스마트폰 너머로 철방의 음성이 들렸다. 세미는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세미야, 듣고 있니? 나 철방이야.”

    한강공원 벤치에 두 남자가 앉아 있다. 한 사람은 주판수인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누군지 알 수 없다.

    “꼭 그렇게 해야겠어?”

    판수는 그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도와줘, 친구야.”

    “잊기로 했잖아. 근데 왜?”

    “마음 한구석에 찌꺼기가 남아 있거든.”

    “뭘 도와달라고?”

    “각본은 내가 만들게. 네 침묵이 필요해.”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달리 당당했고, 말도 여물어 있었다.

    어느 여름날 귀갓길이었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발길이 저절로 호프집을 향해 가는데 누군가가 불렀다. 그 녀석이었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퇴근길인가 보다?”

    생맥주를 앞에 놓고 그가 물었다.

    “응. 넌 일찍 퇴근했나 보네?”

    “아니, 난 백수야….”

    그 후 처음이었다. 녀석은 뭘 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판수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를 만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20년 전 끝난 일이라고,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날이 생각났다.

    “찢어지자, 오빠!”

    “싫어. 아니, 안 돼!”

    철방은 일어나 앉으려다 다시 누웠다. 갈비뼈에 난 금 때문이었다.

    “찢어져야 해. 아님, 서로가 다쳐. 지금보다 몇 배 더!”

    “걱정 마.”

    “우린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쫓기는 범죄자가 될 거야. 난 무섭단 말이야.”

    “우린 멋진 커플이야, 세미야!”

    세미는 병실을 뛰쳐나왔다. 철방과 공동 관리하던 사이버머니를 다 넘기기로 결심한 것도 그날이었다. 그러나 번돌은 생각이 달랐다.

    “난 됐고. 동생들에게 나눠줘!”

    번돌은 매너도 깔끔했다. 그 후 그는 게임 세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세미는 철방을 잃었다. 그에게서 수없이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가 남긴 문자메시지가 지금도 기억난다.

    ‘세미야, 네 뜻이라면 수용할게. 난 너와 함께할 멋진 꿈을 꿔 왔거든. 그 꿈, 접을게.’

    그런 철방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와 번돌의 맞짱을 보기 위해서.

    아홉 마디 @오메가

    일러스트레이션·오동진

    방미의 전화를 받은 건 철방과 헤어져 돌아가는 길에서다. 나 방미야라고 해놓고 한참 말이 없었다. 기다리다가 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방미야, 아직 거기 있니?”

    “응, 우리 유아원에 한 번 놀러와.”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방미는 그냥 보고 싶다고 했다. 유아원에 들어서니 마당 한쪽에 작은 벤치가 보였다. 판수는 벤치를 향해 걸었다. 앉아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 그 사이로 그해 겨울이 보였다.

    교정에는 함박눈이 쌓여 있었다. 탐스러운 함박눈 위에서 조심스레 한 걸음 옮기려는데 살짝 옷소매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오빠, 같이 가자.”

    “방미구나.”

    교정을 지나면서 방미의 손이 판수의 파카 주머니에서 꼼지락거렸다.

    “오빠 손은 참 따뜻하다.”

    주점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얼마나 마셨는지…. 늦은 밤거리엔 행인도 없었다. 분명 눈빛만 마주쳤는데 맞닿은 입술 사이로 함박눈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어깨에 손길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방미가 활짝 웃고 있었다. 하마터면 벌떡 일어서 방미를 끌어안을 뻔했다.

    “들어가자.”

    방미가 안내한 곳은 작은 세미나실이었다. 전면에는 스크린이 내려와 있고, 좌우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철방이 일어섰다.

    “형 왔어? 번돌 있잖아. 여기서 붙재.”

    “…?”

    “오빠, 오랜만이야.”

    “세미 너도?”

    판수는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세미나실은 검은색 커튼이 내려오면서 소등됐다. 어린아이 음성이 들렸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 이름은 오한방. 한방미 원장님의 아들입니다.”

    스크린에 경찰관이 등장했다. 그는 유아원 마당을 거쳐 사무실로 들어와 거수경례를 했다.

    “이십 년 만의 만남, 무척 반갑습니다.”

    철방이 세미의 옆구리를 찔렀다.

    “번돌 아냐?”

    “맞습니다. 게임 명, 번돌!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요?”

    사무실 불이 켜지고 한방미와 오서방, 그사이에 어린 오한방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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