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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은 왜 ‘메구미 사망’ 인정 안 하나

“약물 과다 투여로 사망” 증언 내용 부인…언론도 철저히 외면 자율규제

  • 배극인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일본은 왜 ‘메구미 사망’ 인정 안 하나

일본은 왜 ‘메구미 사망’ 인정 안 하나

일본인 납북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부친 요코타 시게루(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씨가 2006년 5월 1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수협중앙회 강당에서 메구미 남편 김영남 씨의 어머니 최계월 씨, 누나 김영자 씨 등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1월 7일자 1면에 일본인 납북 문제의 상징인 요코타 메구미(橫田惠·1977년 납북)가 북한의 독극물이나 약물 과다 투여로 사망한 뒤 관(棺)도 없이 다른 시신들과 뒤섞여 야산에 묻혔다는 증언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사실은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북·일 교섭을 진행 중인 일본 정부의 극비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보도 내용은 고(故)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메구미 씨가 자살했다”고 주장한 것과 배치된다. 곤혹스럽기는 메구미의 생존을 전제로 납북자 문제 해결에 정치적 승부수를 던져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마찬가지다. 일부 대북제재를 풀면서 추진해온 대북 교섭이 “결국 북한에 농락당했다”는 비판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보도 이후 일본 정부와 언론이 보인 반응은 놀라웠다. 일본 정부는 즉각 “신빙성이 없다”고 부인했고 어느 언론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한 일본 언론인은 “메구미가 살아 있다는 증언이라면 기사가 되지만 사망했다는 정보는 기사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은 오래전부터 메구미 사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다만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라는 얘기다.

1977년 11월 15일 일본 니가타(新潟)현 니가타시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메구미는 학교에서 배드민턴 연습을 마친 뒤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저녁이 돼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북한 공작선에 실려 북으로 끌려간 사실은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97년 북한공작원 출신 탈북자 안명진 씨가 알려왔다. 일본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13세 어린 나이에 납치된 그는 곧바로 납북 피해자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결국 북한에 농락당했다” 비판



북한에서 대남공작부서에 배치된 메구미는 김철준과 결혼했다. 김철준의 본명은 1978년 전북 군산시 선유도에서 실종된 고교생 김영남(당시 16세)으로 알려졌다. 86년 두 사람 사이에 김혜경이란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5년 뒤인 2002년 9월 17일 북한 평양 백화원초대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방북한 고이즈미 총리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메구미를 납치했다고 인정하면서 메구미를 포함해 8명의 납북 피해자가 이미 사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나머지 4명의 피해자는 아예 입국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은 급격히 악화했고, 고이즈미 총리와 김 위원장이 국교 정상화를 염두에 두고 선언한 ‘평양 선언’은 진척이 되지 않았다. 다급해진 북한은 2004년 11월 메구미의 유골을 일본에 보냈지만 DNA 검사 결과 다른 사람 것으로 밝혀졌다고 일본 정부는 발표했다.

올해 3월 몽골 울란바토르. 메구미의 부모는 처음으로 ‘딸의 딸’인 김혜경을 만났다. 딸이 13세에 실종됐고 그 후 40년 가까이 보지 못하다 갑자기 26세 외손녀를 만난 것이다. 외손녀는 “엄마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메구미의 부모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조사보고서는 일본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와 한국의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9월 11일 메구미가 사망한 정신병원인 평양 49호 예방원 관계자 2명을 제3국에서 만나 조사한 내용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납치문제대책본부는 아베 총리가 본부장을 맡고 있다.

일본은 왜 ‘메구미 사망’ 인정 안 하나

요코타 메구미(가운데)가 납북되기 전인 초교 4학년 무렵의 모습(왼쪽). 요코타 메구미가 사망한 평양 정신병원의 건물 배치도. 가장 위쪽이 메구미가 있던 완전격리병동(점선)이다. 사망 당시 이 병원에서 근무했던 관계자가 9월 조사에서 직접 그린 그림으로, 증언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쓴 글씨는 활자로 바꿨다.

두 사람 증언에 따르면 처음 병원에 올 때 건강했던 메구미는 ‘완전격리병동’에 갇혔다 1994년 4월 10일 사망했고, 15일 인근 야산에 묻혔다. 증언자들은 “정신병 약인 정신진정제와 수면제 위주로 먹고 주사 받았다(주사를 맞았다)”며 수면제 하이미날 등 약의 종류와 복용량을 증언했다.

이들은 “환자가 죽었을 당시 온몸에 청색 반점이 있었다”면서 “독극물 또는 과다 용량의 약물을 먹거나 주사로 맞았을 때 볼 수 있는 소견”이라고 밝혔다. 이어 “(메구미 씨) 시체는 (국가안전)보위부 (노동)당 조직 지시로 뜨락또르(트랙터) 적재함에 다른 시체 5구와 함께 실어 산으로 옮기고 관도 없이 그냥 같은 구덩이에 묻었다”고 했다. 북한이 2004년 일본에 보낸 유골의 DNA가 메구미와 일치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열쇠인 셈이다.

A4 용지 9쪽짜리 극비 보고서 마지막 쪽에는 조사에 관여한 일본 내각관방 납치문제대책본부 기획관(한국의 국장급 또는 심의관급) 1명과 납치문제대책본부 사무국 내각사무관 2명의 명함이 최 대표 명함과 함께 붙어 있다. 명함 위에는 ‘질문들을 통해 얻은 정보에 대해서는 응답자 성명과 생년월일 등 정보를 일절 공개하지 않음을 확약합니다. 일본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 사무국’이라고 적혀 있다.

일단 부정 ‘치고 빠지기’ 구사

보도 직후 일본 정부가 메구미 사망과 시신 유기 증언이 담긴 조사 내용을 부인한 것은 아베 내각이 진행 중인 북·일 교섭이 메구미의 생존을 매개로 대북제재를 해제하는 ‘빅딜’ 방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메구미가 타살됐다는 증언을 받아들일 경우 북·일 교섭의 기본 전제가 무너지는 셈. 이렇게 되면 북한 핵실험에 대한 한미일 3국의 대북제재 공조 체제를 깨면서까지 대북제재를 일부 풀었던 아베 정권은 대내외의 비판을 피해나갈 수 없게 된다. 특히 아베 정권이 메구미가 사망한 사실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했다면 도덕성 문제로 확산돼 정치적 위기로 번질 수도 있다.

당초 아베 정권은 보고서 내용이 공개되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자국 국민의 ‘메구미 생존 신앙’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메구미가 돌아오지 않으면 현재 진행하는 북한의 납북자 재조사가 어떤 결과를 내놓아도 가족과 국민이 납득하지 못할 테고, 이 경우 아베 정권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릴 수 있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사보고서가 정권의 도덕성 논란으로까지 번지는 사태는 일본 정부 처지에선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 전개다. 이 때문에 아베 정권은 막상 보도가 나오면 일단 부정하는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 전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셈법은 그렇다 쳐도, 정작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증언 자체를 외면하는 일본 언론 태도다. 일본의 한 중견 언론인은 “탈북자 증언이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탈북자 증언이 메구미가 살아 있다는 내용이었대도 마찬가지였을까”라는 반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메구미 생존 신앙’ 앞에서 언론이 일종의 자율규제를 하고 있다는 고백인 셈이다. 메구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살아 있는 메구미를 내놓을 수 없는 북한. 아베 총리가 이 기이한 드라마의 결말을 어떤 식으로 그려낼지 주목된다.



주간동아 963호 (p54~55)

배극인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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