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3

2014.11.17

동아시아 무역질서 ‘고차원 방정식’

한중 FTA 타결로 역내 주도권과 경제 교류 변혁 신호탄

  •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hjkim@lgeri.com

    입력2014-11-14 17: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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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무역질서 ‘고차원 방정식’
    11월 10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사실상 타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자리를 빌려 양국 정상이 FTA의 실질적 타결을 선언한 것. ‘실질적’ 타결이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에서도 나타나듯 최종 마무리까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잖고 국회 비준이라는 힘겨운 절차도 남았지만, 주요국 정상과 언론이 모인 자리에서 발표한 만큼 이제 한중 FTA 발효는 시간문제일 뿐 기정사실화 단계로 접어든 셈이다.

    한중 FTA 타결은 두 나라의 경제적 손익과 산업구조뿐 아니라 세계 무역질서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그동안 동아시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주도권 경쟁에서 중국이 유리한 카드를 한 장 더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APEC 정상회의 기간 중 발표

    이와 관련해 한중 FTA 타결 소식을 왜 APEC 정상회의를 통해 발표했을까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연말까지 좀 더 시간을 두고 논의해 합의 수준을 높일 수 있었음에도 ‘실질적’ 타결이라는 낯선 표현까지 써가며 서두른 이유는 세계 경제 구도에서 APEC 정상회의가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3년 전인 2011년 11월 미국 호놀룰루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노다 요시히코 일본 전 총리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 발표를 통해 미국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일종의 세리머니를 한 바 있다. 거꾸로 중국은 이번 APEC 정상회의 기간에 한중 FTA 타결 소식을 발표함으로써 자신들 역시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의 TPP 참여 선언이 TPP를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다자간 무역자유화 선언이었다면, 한중 FTA 타결은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출범을 목표로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실효성을 높이는 중국 주도하 다자무역 전략의 중요한 포석이라 할 수 있다. 2012년 한중 FTA 연구를 위해 만났던 중국 상무부 산하 연구소의 한 전문가는 필자에게 “중국이 한국과의 FTA를 추진하는 것은 미국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려는 외교적 목적이 크다”고 말한 바 있다. 이미 미국과 FTA를 체결했고 정치·경제적으로도 미국, 일본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한국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동아시아 내 세력 균형을 도모하겠다는 게 중국의 숨은 전략인 셈이다.

    그동안 양자 간 무역자유화, 즉 개별 국가와의 FTA에 주력해오던 중국과 미국이 다자간 무역자유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려는 외교적 목적 때문만은 아니다. 점점 더 복잡하고 정교해지는 글로벌 생산분업 체계(GVC·Global Value Chain) 확산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 전략도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양자 간 FTA 참여 국가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FTA 발효 초기에 누리던 배타적 이익은 점차 줄어들게 됐고, 이를 만회하려면 TPP나 RCEP 같은 지역 중심의 다자무역협정을 통해 새로운 ‘배타적 이익’을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 침체로 새로운 시장이나 사업 기회를 창출해야 할 필요성이 한층 커진 점도 최근 수년간 두 강대국이 다자무역협정에 앞다퉈 뛰어든 배경이다. 투자와 서비스 분야 진출을 자유화함으로써 국가 간 경제 통합이 심화하고 글로벌 금융 위기를 계기로 제조업이 고용과 경기 변동의 충격을 줄여주는 효과가 크다는 점이 부각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요컨대 양자 FTA를 통한 일률적인 상품시장 개방 확대보다 다자간 글로벌 분업과 무역협정을 통해 제조업 가치사슬(value chain)을 비교우위에 따라 정교하게 재구성하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다.

    이러한 급물살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아시아를 둘러싼 다자무역 질서의 변화다. 그 두드러진 특징으로 미국과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발언권, 특히 역내 주도권 경쟁에서 균형추 구실을 담당할 우리나라의 입김이 한층 강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우리가 FTA를 통해 중국이라는 거대시장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배타적 이익을 얻게 됨에 따라, 경쟁자에 해당하는 일본이나 미국 처지에서는 중국과 한국을 자신들과 같은 무역협정에 포함시켜야만 그러한 효과를 상쇄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곧 TPP나 FTAAP 협상에서 한국과 중국의 협상 카드가 늘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TPP에 비해 뒤처졌던 RCEP 추진 속도가 한층 빨라질 것으로 전망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과 한국을 TPP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미국의 통상전략이 수정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북·중 3자 통합 가능성도

    동아시아 무역질서 ‘고차원 방정식’
    TPP나 RCEP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우리 처지에서도 바람직하다. 한중 FTA의 개방 수준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많지만 현 상황에서 그 이상의 개방을 합의하기는 어렵고, 국회 비준의 어려움 등을 핑계로 재협상을 이끌어내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향후 다자간 무역자유화 협상 과정에서 두 번째 기회, 즉 다른 나라들과의 공동 노력을 통해 이번에 미흡했던 분야의 개방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북한 개성공단을 역외 가공구역으로 인정받았다는 점 역시 긍정적인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통일 혹은 분단’이라는 이진법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지만, 중국과 대만이 특혜무역협정을 체결했던 것처럼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통합만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제3의 길’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중 FTA를 계기로 남북한과 중국이 함께 참여하는 3자 간 경제 통합 방식의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은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중국 주도의 국제 금융질서에 대한 대응 방식도 새롭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제안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대표적이다. 이미 우리 정부는 당분간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한 바 있지만, 한중 FTA 체결이 촉매가 돼 미국, 일본 등과의 다자협력 구도가 바뀐다면 굳이 AIIB 참여를 미룰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중 FTA라는 협상 카드의 시너지 효과를 더 높여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주로 체결해온 양자 간 FTA 협상이 2차 방정식이었다면, 향후 직면할 TPP, RCEP 등의 새로운 무역자유화 협상은 참고해야 할 변수가 훨씬 많은 고차 방정식이다. 통상 당국의 더욱 현명하고 전략적인 대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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