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청춘’ 페루팀에 이어 ‘응답하라 1994’ 출연진이 떠난 라오스팀 여행기도 방송을 앞두고 있다(위). ‘꽃보다 누나’에 나온 터키도 방송 이후 국내 여행객의 방문이 늘었다. 사진은 터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
좋아하는 스타가 방문했거나 유명한 영화의 배경지가 됐다는 점도 여행지를 찾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장소인 이탈리아 로마의 스페인 광장이나 드라마 ‘겨울연가’가 방송된 이후 일본인 관광객으로 붐비기 시작한 강원 춘천시 남이섬이 대표적인 경우. 이런 효과 때문에 올해 초 할리우드 대작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촬영에 온 서울이 들썩였던 것 아니겠는가.
TV에서는 이런 기능을 여행 예능프로그램이 한다. 여행업계에서는 여행 예능프로그램 제작진이 다음에 어떤 여행지로 떠날지가 최대 관심사다. 그에 따라 관련 매출이 요동치고, 해당 항공 노선 이용객 수도 크게 차이 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국내 여행 예능프로그램으로 KBS 2TV ‘해피선데이-1박 2일’과 MBC ‘일밤-아빠! 어디가?’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방송 파급력이 두드러지는 건 나영석 CJ E·M PD의 해외여행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시리즈(‘꽃보다 할배’ ‘꽃보다 누나’ ‘꽃보다 청춘’)다.
이번엔 페루 신흥 시장 개척
‘꽃보다 청춘’의 세 남자(왼쪽)가 떠난 페루. 방송을 타기 무섭게 여행업계에서 관련 상품이 쏟아지고 있다. 페루의 고대 도시 마추픽추.
터키도 마찬가지다. ‘꽃누나’가 방송된 건 지난해 1월. 지난해 상반기 터키를 방문한 한국인은 18만7040명으로 1년 만에 17% 늘었다. 전체 출국자 수 증가율인 8%를 2배 이상 넘긴 수치다. 올해 상반기에만 터키를 찾은 한국인이 12만2175명이라 올해 안에 2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지금 여행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여행지를 알아맞히는 것도 어렵지 않다. 8월 방송을 시작한 ‘꽃보다 청춘’(꽃청춘)이 선택한 남미 페루. 지난해 방문한 한국인이 1만4000여 명에 불과할 만큼 우리에겐 아직 낯선 여행지이지만, 여행사들은 연이어 관련 여행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상품명에 ‘꽃청춘’이라는 말이 붙은 것도 많다. 열흘이 넘는 긴 여행 일정이 대부분이고 가격도 300만~500만 원대로 비교적 고가지만 그만큼 수요가 있다는 반증이다. 페루 관련 여행 상품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다 보니 여행 예능프로그램을 유치하려는 업계 관계자 간 경쟁도 뜨겁다. 동남아시아를 기반으로 하는 한 외국계 항공사 관계자는 “한국지사 대표가 ‘꽃보다’ 시리즈 제작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여행지의 장단점을 설명하는 등 ‘꽃보다’ 시리즈 유치를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잘 되지 않았다”며 “우리 회사 말고도 웬만한 항공사나 여행사는 대부분 제작진과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여행사뿐 아니라 각국 관광청에서도 제작진에게 촬영 문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제작진은 프로그램 콘셉트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어려운 배낭여행’ 콘셉트와 거리가 먼 협찬은 피하겠다는 태도다.
이처럼 여행 예능프로그램은 특정 여행지에 대한 ‘로망’을 시청자에게 심어주면서 해당 여행지에 관광객까지 모으는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사람들은 할배 혹은 누나, 청춘의 여행 과정과 이들이 나누는 우정을 보면서 여행지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이미 터키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꽃누나’에서 나온 이스탄불 유적과 터키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여행의 추억을 떠올렸을 터.
여행 예능프로그램이 여행 욕구를 자극하며 여행업계 전체 파이를 키우는 점은 업계 처지에선 희소식이다. 특히 ‘꽃보다’ 시리즈가 택한 여행지가 크로아티아나 페루 등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여행지가 개발되면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여행업계에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SBS ‘정글의 법칙’이 오지 여행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 점도 마찬가지다. 윤상, 유희열, 이적으로 이뤄진 ‘꽃청춘’ 페루팀의 여행이 끝나면 곧바로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출연진인 유연석, 손호준, 바로(차선우)로 이뤄진 라오스팀의 여행이 방송될 예정이라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 비해 주목도가 떨어졌던 라오스 여행 상품도 본격적으로 개발될 공산이 크다. 크로아티아나 페루, 라오스 모두 한국관광공사에 여행객 통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여행업계에서는 신흥 시장으로 분류된다. 숨겨진 새로운 여행지를 개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 시장에 호재임에는 틀림없다.
세상은 넓고 갈 데는 많아
하지만 유행에 휩쓸려, 또는 스타가 찾아갔던 곳이라고 무턱대고 여행지로 선택하는 건 여행을 떠나는 본래의 이유를 잊게 만들 수도 있다. 여행은 일상에 끌려 다니던 사람이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다. 그 시작은 ‘내가 원하는 곳’을 찾는 데서 이루어진다. 존경스러운 할배나 아리따운 누님, 마음만은 청춘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추천하는 여행지가 있대도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을 만한 곳, 지금의 나니까 가봐야 할 곳을 찾는 게 내 여행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요, 진정 기억에 남을 여행의 시작이다.
또 수많은 스태프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촬영한 TV 속 풍경은 그 여행지의 참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정글의 법칙’에서 오지로 소개된 곳이 실제로는 관광지라는 논란에 휩싸인 일을 떠올려보라). 방송 매체의 특성상 ‘쇼’를 만들려면 화면이 예쁘게 잘 나올 만한 곳, 보여줄 거리가 많은 곳을 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단조롭지만 조용히 지낼 여행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남들 다 가는 여행지 대신 그런 곳을 택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세상은 넓고 갈 데는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도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사막을 찾아 몽골로 늦은 휴가를 떠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