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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세계 속의 한국학 04

졸업할 때 한국어 논문 유럽 내 ‘넘버 원’ 자부심

영국 런던대 SOAS

  • 런던=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졸업할 때 한국어 논문 유럽 내 ‘넘버 원’ 자부심

졸업할 때 한국어 논문 유럽 내 ‘넘버 원’ 자부심

영국 런던대 SOAS 건물.

앨런 크리스토퍼 심슨은 파란 눈의 영국 청년이다.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한국의 ‘기형도’. 특히 ‘그는 쉽게 들켜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으로 시작하는 시 ‘늙은 사람’을 애송한다. 영국 런던대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캠퍼스에서 만난 심슨은 ‘엄마 걱정’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등 좋아하는 기형도의 시 제목을 열거하면서 “영어로는 잘 번역하기 어려운 한국인의 ‘한’과 ‘정’ 같은 정서가 좋다”고 했다. 이 대학 한국학과를 졸업한 심슨의 꿈은 한국문학 교수가 되는 것. 이 목표를 이루려고 올가을 런던대 SOAS 대학원에 진학한다.

앤드루 데이비드 잭슨 박사는 심슨의 선배다. 올가을부터 덴마크 코펜하겐대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게 된 그는 런던대 SOAS에서 ‘이인좌의 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90년대 한국 민중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박광수, 장선우, 이광모 감독 등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한국 민중운동의 모습이 흥미롭다”는 그는 “앞으로 덴마크에서 한국 역사와 영화를 함께 연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친한파 연구자 길러낸 곳

심슨과 잭슨 박사 같은 친한파 연구자를 길러낸 런던대 SOAS는 영국 내 한국학 중심 기관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지역 연구에 특화된 이 대학은 1940년대 영국 최초로 한국어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87년 한국학연구소를 세우고, 89년 한국학 학위과정을 만드는 등 줄곧 한국학 분야에서 선도적인 구실을 했다.

1989년부터 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해온 연재훈 교수는 “처음 런던대 SOAS에 왔을 때는 학부 전공자가 한두 명에 불과했다. 지금은 매년 25~30명씩 한국학과에 입학하고, 그중 약 10%가 대학원에 진학한다.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20명이 넘을 정도”라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학생 대부분이 영국 등 유럽 출신인 점도 눈에 띈다. 북미지역의 경우 교포 학생이 한국학 수업을 듣는 경우가 많다. 반면 런던대 SOAS 는 학생의 절반 이상이 영국 현지 출신이다.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 유럽 다른 나라 학생이 30~40%로 뒤를 잇고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 학생이 10% 안팎을 차지한다. 학생 가운데 한국교포는 전혀 없다. 연 교수는 “대부분 케이팝(K-pop)이나 한국 드라마, 영화 등을 보고 한국에 관심이 생겨 한국학을 전공으로 택한 학생”이라며 “이들은 이곳에서 우리말뿐 아니라 문학과 역사, 정치, 사회까지 배운다”고 했다.

런던대 SOAS 한국학과에는 연 교수를 포함한 정교수 2명과 조교수(Lecturer) 8명이 있다. 유럽의 한국학 연구기관 중 가장 많은 수준이다. 특히 조선 후기 역사를 전공한 앤더스 칼슨 한국학연구소장을 비롯해 그레이스 고 교수(한국문학), 장대업 교수(한국발전론), 샬럿 홀릭 교수(한국미술), 케이스 D. 하워드 교수(한국음악)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가 포진해 있는 게 이 학교의 장점. 이 덕분에 한국학 박사과정 학생 중 약 절반은 한국역사를 전공하고, 나머지는 어학, 문학, 정치, 미술, 음악 등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다고 한다. 연 교수는 “역사와 규모, 연구수준 등 모든 면에서 런던대 SOAS는 유럽 내 ‘넘버 원’ 한국학 연구기관이라고 자부한다”고 했다.

졸업할 때 한국어 논문 유럽 내 ‘넘버 원’ 자부심

영국 런던대 SOAS 도서관의 한국학 코너를 보여주고 있는 연재훈 교수(왼쪽)와 5월 31일 이 대학에서 열린 한국 영화 콘퍼런스 모습. 런던대 SOAS 학자뿐 아니라 케임브리지대, 킹스턴대 등 다른 대학의 한국학 연구자들도 참석했다.

연이어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 선정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런던대 SOAS는 2006년 우리 정부가 선정하는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으로 뽑혀 5년간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이어 지난해 또 한 번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으로 선정됐다. 향후 5년간 다시 매년 11만 파운드(약 20억 원)씩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우리 정부가 2006년부터 시작한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 지원 사업에 두 번 연달아 선정된 학교는 런던대 SOAS를 포함해 두 곳뿐이다.

런던대 SOAS의 강점은 잘 짜인 커리큘럼. 이 대학 학부생들은 1학년 때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배운 뒤 2학년 1년간 고려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낸다. 칼슨 교수는 “학생들이 3학년이 돼 학교에 돌아올 때 보면 거의 다 한국에 넘어가 있다. 서울 신촌, 홍대 등에서 마음껏 놀면서 한국의 다이내믹한 매력에 푹 빠져 온다”고 했다. 2009년 중앙대 근처에서 자취하며 고려대에 다녔다는 심슨도 “당시 한국 영화와 책을 무척 많이 봤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1년간 어학실력과 한국에 대한 이해를 쌓은 학생들은 3~4학년 2년간 본격적으로 한국 역사, 문학, 사회, 북한문제 등을 배운다. 졸업할 때는 한국어로 논문도 쓴다. “한국어를 어려움 없이 읽고 쓸 수 있어야 한국학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게 런던대 SOAS 한국학과의 기본 철학이다.

잭슨 박사는 “한국 자료는 영어로 번역된 것이 별로 없다. 한국학을 전공하려면 먼저 한국어 실력부터 쌓아야 한다. 특히 역사학 전공자의 경우 사료를 분석할 수 있는 수준 높은 한국어 실력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런던대 SOAS 한국학과의 터줏대감인 연 교수도 “말을 배우면 다양한 문화를 저절로 접하게 된다는 점에서 언어교육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한류 덕분에 영국인들이 한국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무척 고무적이라고 했다.

런던대 SOAS 랭귀지센터에서 한국어교육을 담당하는 조재희 한국어 코디네이터도 같은 생각이다. 1997년부터 이곳에서 일해온 조 코디네이터는 “처음엔 수강생 대부분이 한국인 배우자나 가족을 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경우가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나머지 3분의 2는 순전히 문화적 관심으로 한국어를 배운다. 특히 케이팝과 한국 TV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했다. 수강생 상당수가 여성이며, 거의 전부 한국 가수나 배우의 팬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인에 대해 ‘멋있다’고 생각하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을 ‘근사한 일’로 여긴다는 게 조 코디네이터의 설명이다.

런던대 SOAS 랭귀지센터의 한국어 수업은 총 5단계로 나뉜다. 한 단계는 3학기로 구성되며, 주당 2시간씩 10주 수업이 한 학기다. 수강료는 한 학기에 300파운드 안팎으로, 한 단계를 마치려면 대략 900파운드의 비용을 들여야 한다. 적지 않은 액수지만 매년 300명가량의 영국인이 이 수업을 들을 만큼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한국 여행하려고 한국어 배워”

졸업할 때 한국어 논문 유럽 내 ‘넘버 원’ 자부심

영국 런던대 SOAS 랭귀지센터의 한국학 수업 모습.

한국어 초급반 수업을 참관했다. 여학생 6명, 남학생 4명이 ‘쇼핑할 때 사용하는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흑인, 백인, 동양인이 모두 보였다. 정장 차림의 흑인 압둘라는 “안경‘가’ 얼마예요” “수업료‘이’ 얼마예요”처럼 계속 ‘가’와 ‘이’를 헷갈려 했지만, 머리를 흔들어가며 연습을 계속했다. 반면 빅뱅 지드래곤의 팬이라는 스텔라는 한국 소식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는 인피니트를 좋아한다는 옆자리 친구와 서툰 한국어로 케이팝 스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요즘 한국에서는 누가 가장 인기 있느냐”고 물었다. 이들은 모두 한국 TV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보고, 언젠가 한국으로 여행 가려고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다.

연 교수는 “일반인이 한국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한국어 교육 확대와 한국학 연구자 지원은 한국을 널리 알린다는 점에서 모두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우리 정부도 이 분야에 관심을 쏟고 있다. 2011년 런던대에 문을 연 세종학당은 현지인에게 무료로 한국어를 가르친다. 연 교수는 이곳의 디렉터를 겸하고 있다. 한국 국제교류재단은 2011년 런던대 SOAS가 한국학 전공자 오웬 밀러 씨를 교수로 채용하도록 하고 5년간 인건비를 지원하고 있다. 런던대 SOAS에서 고려 말 조선 초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밀러 교수는 한국 국제교류재단이 해외에 설치한 100번째 한국학 교수직 수혜자다.

연 교수는 “영국에서는 우리 대학뿐 아니라 셰필드대, 옥스퍼드대에서도 한국학 학위 과정을 운영한다. 이곳에서 배출된 젊고 유능한 한국학 연구자들이 교수가 돼 또 다른 학생을 길러내는 건 세계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가는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라며 “아직은 해외 대학에 한국학 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정부가 한류에 편승하는 일회적 사업을 벌이기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학을 지원하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인터뷰 | 런던대 SOAS 앤더스 칼슨 한국학연구소장

“선비정신과 한국의 역동성 세계 최고”


졸업할 때 한국어 논문 유럽 내 ‘넘버 원’ 자부심
영국 런던대 SOAS 한국학연구소를 이끄는 앤더스 칼슨 박사(사진)는 18~19세기 조선 후기 역사 전문가다. 스웨덴 스톡홀름대에서 ‘홍경래의 난’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부터 런던대 SOAS에서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그는 황석영의 ‘한씨연대기’,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등을 스웨덴어로 번역·출간한 한국문학 애호가이기도 하다. 올여름부터 다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번역을 시작했다는 칼슨 교수는 “스웨덴에서는 최근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 소설을 번역 출간하면 유력 언론에 꼭 리뷰가 실린다”고 했다.

그가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호기심 때문. 대학 2학년 때 한국에 머물며 한국어를 배우다 한국역사와 한국인의 ‘신사다운 품격’에 빠져 연구를 계속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요즘 외국에는 한국의 열정적인 모습이 많이 알려졌지만, 한국인 품성의 바탕에는 ‘선비정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국이 일본, 중국과 어떻게 다르냐’고 하면 나는 늘 ‘선비정신’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학자로서 그의 주된 관심사는 순조-헌종-철종 대다. 칼슨 교수는 “한국 역사학자들이 영·정조 시대에 집중하면서 이 시기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세도정치가 자행되고 민란이 벌어진 역사의 ‘암흑기’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때 민란이 많이 벌어진 건 국가가 쇠퇴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중앙정부와 상업적으로 성장하는 지방사회 사이에 사회·경제적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홍경래의 난’을 바라보며, 이 시기를 제대로 연구해야 이후 한국역사의 역동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칼슨 교수는 “해외 한국학자는 한국 내 연구자에 비해 자료 연구와 정보 교류 등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하지만, 참신하고 독창적인 시각으로 한국학 연구에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다. 더 많은 외국인 한국학자가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주간동아 2013.08.12 900호 (p22~24)

런던=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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