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5

2013.04.29

속상한 아빠들 집에서 화풀이?

가정폭력 가해자 80%가 40, 50대 갈수록 흉포화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3-04-29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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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내에게 외도 사실을 들킨 50대 자영업자 박모 씨는 이후 오랫동안 아내와 심각한 부부갈등을 겪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을 갖고 의심하고 무시한다’며 아내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씨는 어느 날 화를 참지 못하고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에게 “나가라”고 소리치며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상황을 목격한 고교생 아들이 폭행을 말리자 주방에서 칼을 들고 와서는 아들을 쓰러뜨린 뒤 올라타고 한 손으로 목을 조르며 흉기로 위협했다.

    #2 40대 기술자인 이모 씨는 거실에서 인터넷 고스톱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거실 불을 왜 켜지 않았느냐”며 중학생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폭행하고 손가락과 팔뚝을 물어뜯었다. 아들의 입술이 터지고 피부가 찢어졌지만 이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행을 말리던 아내와 고교생 딸마저 폭행했다.

    ‘칼로 물 베기’로 치부되던 부부싸움이 최근 도를 넘어섰다. 주먹과 발로 무차별 폭행을 퍼붓는 것도 모자라 흉기로 위협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최근 춘천지법(제2형사부)은 아내 살해 혐의로 기소된 김모(44) 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김씨는 실직 후 아내 몰래 수백만 원을 대출받아 탕진했고 빚 독촉에 시달리던 아내가 잔소리와 욕설을 퍼붓자 우발적으로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3개월 넘게 집 안에 방치했다.

    학력·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발생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지난해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의해 서울가정법원, 서울서부지방검찰청 등으로부터 ‘상담위탁’ 보호처분을 받은 가정폭력 행위자 44명을 대상으로 조사, 분석한 결과 남성은 40명, 여성은 4명이었다. 이 가운데 아내를 폭행한 남편은 10명 중 8명꼴이었으며 40, 50대 중·장년층이 80%를 차지했다.



    흔히 ‘가정폭력’이라고 하면 대부분 못 배워서 무식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경향을 보면, 학력과 사회적 지위 고하, 경제적 여유와 상관없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더한다. 가정폭력 행위자 44명의 학력을 보면 대졸 이상이 13명이었고, 직업별로는 직장인이 12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밖에 교육직,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월수입이 300만 원이 넘는 사람도 12명에 달했다.

    혈기왕성한 20대도 아니고 배울 만큼 배우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40, 50대 중·장년층 가장이 가정폭력의 주범으로 떠오른 이유는 뭘까. 가정폭력은 그 특성상 한 번에 그치는 경우보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오던 아내가 더는 참지 못해 적극적으로 신고에 나서면서 결혼기간이 10년 이상 된 중·장년층 가해자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박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부장은 “가정폭력은 자녀가 어릴 경우에는 부부 둘 사이의 문제에 머문다. 하지만 자녀가 성장하면 더는 폭력을 참지 않고 신고하거나 가해자인 아버지와 충돌할 가능성이 커진다. 부부간 폭력에 자녀들이 개입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아내가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장년층의 가부장적 사고도 가정폭력에 한몫한다. 여성의 사고방식이 과거와 달라지고 사회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등 시대와 사회가 변했지만 이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남성이 부부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심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신연희 성결대 사회복지학부 교수(한국가정법률상담소 초빙 연구위원)는 40, 50대 가정폭력 가해자가 많은 것에 대해 중년기의 특성과 스트레스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나라 중·장년층은 직장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만큼 책임이 막중할 뿐 아니라, 가정에서는 부모 부양과 자녀 양육의 이중 책임을 떠안고 살아간다. 거기다 신체적으로 나이를 절감하면서 은퇴와 함께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시기이다 보니 안팎으로 스트레스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신 교수는 “40, 50대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생산적인 시기이지만 이를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 또 부부관계를 비롯한 인간관계에서 원만함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무력감과 허탈감 등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겪는다. 거기다 경제적 부담에 대한 압박감이 맞물리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채 불안과 화,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40대 초반 주부인 김모 씨는 한 달 전 받은 충격으로 남편과 눈길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발단은 수개월째 월급을 가져다주지 않는 남편 때문이었다. “돈 문제로 다투다 너무 화가 나서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더니 갑자기 싱크대에서 칼을 꺼내와 ‘죽인다’고 덤벼들어 아이 방으로 황급히 피신했다”는 김씨는 “그때 남편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섬뜩하다. 그날 이후로 남편과 눈 마주치는 것도 무섭다”고 말했다.

    한편 남편 이모(46) 씨는 “결혼한 지 15년이 넘어 아이는 자꾸 커 가는데 집 한 칸 없이 월세로 산다. 어떻게든 아이가 더 크기 전에 돈을 벌어 집도 마련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싶어 주식에 여러 차례 손을 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월급을 못 갖다줬다”고 했다. 그는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려는 게 아닌데 아내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준다”고 하소연했다.

    ‘최선의 정책은 최선의 사회복지’

    속상한 아빠들 집에서 화풀이?
    여성가족부가 2010년 3800여 가구를 상대로 조사한 ‘전국 가정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자가 외부로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가정폭력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것에 더해 최근 나타나는 심각성은 폭력 정도가 도를 넘어 흉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가정폭력 행위자 44명의 폭력행위 수준(중복 응답)을 조사한 결과, 배우자를 사정없이 마구 때린 사람은 20명에 달했고 허리띠, 몽둥이, 골프채 등으로 때린 경우도 38명이나 됐다. 목을 조르고 담뱃불로 지지거나 칼이나 흉기를 휘두른 경우도 각각 37명에 달했다. 박소현 부장은 “배우자를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때린 경우는 전년도와 비교해 1.5배 가까이 증가했고, 10회 이상 사정없이 마구 때린 경우도 2배 이상 증가했다. 칼 같은 흉기 사용이 증가한 이유는 집 구조의 변화와 관련 있다. 과거 한옥 구조와 달리 아파트는 주방과 거실이 한 공간에 있어 상대적으로 흉기에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가정폭력 가해자 826명을 분석한 대법원 ‘2012 사법연감’에 따르면 가정폭력을 행사한 원인 가운데 ‘우발적 분노에 의한 경우’가 41.8%를 차지해 1위를 기록했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그게 조절이 잘 안 돼서 병원을 찾는 40, 50대 남성이 몇 년 새 굉장히 많아졌다. 최근 들어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전에 없이 짜증과 화를 낸다’며 아내가 남편을 직접 병원에 데려오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라고 했다.

    분노나 홧김에 벌어진 가정폭력으로 인한 ‘살인’과 ‘살인미수’ 사건도 해마다 끊이지 않는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2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살인 사건을 분석한 결과, 남편에게 살해당한 아내가 83명으로 나타났고 살인미수도 29건이나 됐다. 최근 정부는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4대악’에 포함시켜 근절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경찰청은 가정폭력 전담 인력을 늘리는 등 경찰력을 총동원해 강력하게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형민 박사는 “분노나 홧김에 범죄를 저지르는 밑바닥에는 사회적 양극화, 소득 불균형, 불공정한 배분 같은 경제와 공정성 문제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범죄학 관련 고전 가운데 ‘최선의 형사정책은 최선의 사회복지’라는 말이 있다. 적어도 생존이 걸린 먹고사는 문제에 따른 스트레스만이라도 우리 사회가 관리해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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