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0

2013.03.25

중·장년 버킷리스트 가자, 크루즈 여행

일생에 한 번쯤은 낭만과 온전한 휴식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3-03-25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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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결혼 25주년을 맞아 아내와 함께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이한석(54·자산운용사 대표) 씨는 “63빌딩만한 배가 바다를 떠다니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국내외 여러 특급호텔에서 식사를 해봤지만 크루즈 여행 때 맛본 풀코스 디너는 특급호텔 요리 이상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고교 동창 부부 6쌍이 함께 여행하면서 야외에서 수영하고 밤이면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파티를 했는데, 완벽한 휴식을 하고 온 느낌이었다. 밤바다에서 보는 별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고 덧붙였다. 크루즈 여행 후 친구들과 사이가 더 돈독해져 일요일마다 부부 동반 모임을 갖는 이씨는 “아내와 함께 잊지 못할 결혼 25주년을 보낸 것 같아 뿌듯했다”고 했다.

    드라마 ‘사랑의 유람선’ 세대

    이씨 부부와 함께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정유교(53·은행지점장) 씨는 “고교 졸업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뭔가 색다른 여행을 찾다 크루즈 여행을 선택했다. 여행 도중 말로만 듣던 지구온난화 여파로 거대한 빙벽이 무너져 내리는 걸 목격했는데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다음번엔 유럽 중세 문화와 유적을 볼 수 있는 대서양 크루즈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바다를 떠다니는 특급호텔’ 크루즈. 크루즈 여행이 최근 중·장년층 사이에서 ‘로망’으로 떠올랐다. 5년 전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단둘이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이애영(49) 씨는 “여행 덕분에 아이가 무사히 사춘기를 넘겼고 그때 경험은 아들과 나 사이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고 했다. 또한 이씨는 “내 또래는 어릴 적 ‘사랑의 유람선’을 즐겨 봤는데 그때는 크루즈 여행이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여겨져 보통 사람에겐 그저 환상일 뿐이었다”고 했다. 크루즈를 배경으로 한 ‘사랑의 유람선’은 미국 드라마로, 1980년대 초 국내에서 방영돼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청춘 시절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봤던 환상의 크루즈 여행이 마음만 먹으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현실이 되자 아련한 향수와 함께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중·장년층이 최근 급격히 늘고 있다.

    4년 전 사업을 접은 조경연(57) 씨는 지중해와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에 이어 최근 세 번째로 홍해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는 30여 개국을 여행했지만 “크루즈 여행이 최고”라고 감탄했다. 지중해 크루즈 여행 때 기항지인 그리스에서 우연히 캐나다에 사는 고교 후배를 만난 조씨는 “크루즈가 워낙 크니까 같이 여행하면서도 선상에선 마주치지 못했는데, 뜻밖의 곳에서 만나 무척 반가웠다. 함께 아테네를 돌아다니니 마치 고교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고 했다.



    중·장년 버킷리스트 가자, 크루즈 여행

    화려한 볼거리와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는 크루즈 내부.

    적게는 수십만 원에서 많게는 1000만 원 넘게 비용이 드는 크루즈 여행을 부부가 함께 다녀오려고 1년 전부터 여행경비를 모으는가 하면, ‘효도 관광’으로도 인기다. ‘성지순례 크루즈 여행’ 등 테마 크루즈 여행상품을 기획, 판매하는 크루즈나라 남기희 대표에 따르면, 아버지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이 명절 때마다 부모님을 크루즈 여행시켜 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선장이 주최하는 성대한 승선환영 파티(갈라디너)나 디너파티를 위해 턱시도와 드레스를 구매하고, 선상에서 매일 열리는 댄스파티를 위해 부부가 함께 사교댄스를 배우러 다니는 중·장년층도 늘고 있다.

    백화점 문화센터나 댄스학원에선 평일 낮 시간이나 주말이면 머리가 희끗한 중·장년층 부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크루즈 여행을 염두에 둔 수강생이 적지 않다.

    3월 17일 일요일 오후 2시, 서울 송파구 석촌동 한 건물 지하에 위치한 댄스동호회 클럽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남녀 예닐곱 명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전·현직 교사가 주축인 동호회에서 회원의 댄스스포츠 입문 시기는 제각각 다르지만, 춤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도 뒤처지지 않았다. 황순자(62·교사) 씨는 “5년 전 교사 직무연수 프로그램에서 처음 댄스스포츠를 접하고 석양을 뒤로한 선상에서의 멋진 댄스파티를 꿈꾸게 됐다”고 했다. 그는 또한 “재작년 댄스파티를 주제로 한 한중 크루즈 여행에서 중국 댄스학교를 견학하고 무도회장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춤을 췄는데 무척 즐거웠다”고 했다. 그와 함께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황기주(75) 씨는 교사로 정년퇴임한 요즘 동호회원들과 어울려 매주 2~3회 댄스 연습에 몰두한다. 교사로 정년퇴임한 뒤 헬스장을 운영하다 얼마 전 아들에게 물려준 황우주(70) 씨는 15년 전부터 취미로 댄스스포츠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부부가 함께 취미생활을 하는 게 좋겠다 싶어 6개월 전 아내에게 춤을 배울 것을 권유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밤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동작을 물어볼 정도로 아내가 춤에 푹 빠졌다”고 했다.

    동호회장이자 서울시교원단체총연합회 송파연수원 원장으로 댄스스포츠 강습을 맡고 있는 이복자(69) 씨는 “평소 잉꼬부부라도 춤을 배우러 오면 부부싸움을 많이 한다. 리듬감이나 박자 맞추기 등에서 여자가 학습효과가 빠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황우주 씨가 “부부가 춤을 배우려면 남자가 부처가 돼야 한다. 조금 틀렸다고 지적하면 큰일난다”며 맞장구쳤다. 이 원장을 비롯한 동호회원 20여 명은 지난해 말 3박4일로 댄스스포츠 경연대회를 겸한 한중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다. 1년 전 댄스스포츠에 입문한 서정윤(58·항공사 대표) 씨는 “대학 시절 댄스스포츠 대회에 나가 챔피언을 한 아내의 권유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심히 연습해 댄스스포츠 경연대회를 겸한 크루즈 여행에 아내와 함께 꼭 참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크루즈 여행을 목표로 춤을 배우는 부부가 세 커플 더 있다”고 했다.

    5년 전부터 크루즈 여행 본격화

    중·장년 버킷리스트 가자, 크루즈 여행

    전·현직 교사가 주로 활동하는 댄스동호회에서 회원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국내에서 크루즈 여행이 본격화한 건 5년 전부터다. 2~3년 전부터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수십만 원대 한중일 크루즈 여행상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다양한 가격대 상품이 출시되고 있다. 저렴한 가격 덕에 크루즈 여행을 찾는 연령층도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해졌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하는 크루즈 여행상품은 알래스카, 동·서부 지중해, 북미와 남미, 동북아와 동남아, 홍해, 두바이, 남극 등 전 세계를 아우른다. 그중 중·장년층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지중해와 북유럽,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상품이다.

    7년 전 아내와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뒤 직장을 그만두고 크루즈 전문 여행사를 차린 남기희 대표에 따르면, 중·장년층 고객의 면면은 다양하다.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손자를 포함해 가족이 모두 함께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고객이 있는데, 한 번에 1억 원을 넘게 쓴다. 토지수용 보상비로 거액을 받은 동네 주민들이 단체여행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 수십 년간 아이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하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남편이 보너스로 크루즈 여행을 보내주는가 하면, 개인사업자나 은퇴자 부부, 부부 동반 동창모임 등에서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

    크루즈 여행엔 개별 또는 단체 패키지여행이 있다. 언어소통에 어려움이 있거나 크루즈 여행에 익숙지 않은 중·장년층의 경우 인솔자와 가이드가 동행하는 패키지여행을 선택하곤 한다. 패키지여행은 보통 팀당 20명 규모로 모객을 하는데,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승선하려고 크루즈 출발지까지 가는 데 드는 항공비용, 선실 위치와 규모, 기항지 호텔 규모뿐 아니라 여행 기간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3박4일 동북아 한중 크루즈 여행처럼 적게는 수십 만 원에서 많게는 1000만 원이 넘는 경우도 있다.

    롯데관광이 최근 내놓은 한국 최초 세계일주 크루즈 여행상품은 여행 기간이 126일에 달하고, 가격은 2990만 원부터다. 김원경 롯데관광 크루즈사업본부 팀장은 “창립 42주년 기념으로 내놓았는데 벌써 매진됐을 정도로 호응이 좋다”고 했다. 그는 “중·장년층 중에는 크루즈 문화에 익숙지 않고 외국인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서 다양한 부대행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기도 하는데, 주저하지 말고 충분히 즐길수록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공연장과 극장,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스파, 사우나, 마사지, 각종 레스토랑, 바, 라운지, 카지노와 게임룸, 미니골프장, 아트갤러리 외에 면세점 등을 부대시설로 갖춘 크루즈 여행은 선상에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극장과 공연장, 라운지에서는 뮤지컬과 오페라, 밴드 연주와 라이브쇼, 마술쇼 등 화려한 공연을 즐길 수 있으며 댄스파티, 댄스강좌, 노래 및 댄스 경연대회 등 여행객이 직접 참여해 즐기면서 경품을 탈 수 있는 행사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열린다.

    댄스·와인 등 테마 상품도 쏟아져

    중·장년 버킷리스트 가자, 크루즈 여행

    선상 댄스파티를 즐기려고 춤을 배우는 황기주(왼쪽), 황순자 씨.

    크루즈 여행이 인기를 끌면서 테마 크루즈 여행상품도 다양하게 쏟아진다. 2년 전 댄스파티를 테마로 한 한중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강명국(56), 이옥희(53) 씨 부부는 댄스파티를 위해 턱시도와 드레스를 새로 장만하느라 600만 원을 썼다. 강씨는 “중국의 대형 무도회장에서 현지인들과 함께하는 댄스파티가 있었는데 그동안 열심히 배운 자이브, 룸바, 왈츠를 추면서 무척 흥겹고 즐거웠다”고 했다. 4년 전 부부가 함께 춤을 배우기 시작해 현재 탱고를 맹연습 중이다. 이씨는 “지난해 말 댄스경연대회를 겸한 크루즈 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어깨수술을 받는 바람에 못 갔다”며 기회를 벼르고 있다.

    댄스를 주제로 한 크루즈 여행 외에 그동안 국내에서 선보인 상품으로 ‘홍해 문화탐방 크루즈’ ‘스칸디나비아·피오르드 크루즈’ ‘지중해 와인 크루즈’ ‘사진작가와 함께하는 크루즈’ 등이 있다. 한편 가수를 초청해 라이브공연을 여는가 하면, 댄스강사를 초빙해 선상 레슨을 하는 상품도 있다. 지난해 말 ‘제1회 하이댄싱스타’ 경연대회를 겸한 한중 크루즈 여행상품을 선보인 이대우(61) 하이댄싱크루즈 회장은 “매달 1~2회에 걸쳐 댄스파티를 주제로 한 테마 크루즈 여행상품을 내놓는다. 고객 연령층은 50~60대가 대부분이고, 3박4일 여행비용은 43만 원 정도”라고 했다. 댄스에 관심 있는 베이비부머가 늘면서 이 회장은 새로운 상품을 준비 중이다. 그는 “전국 16개 시도에서 지역예선을 거쳐 서울에서 본선을 개최한 뒤 수상자들과 함께 한중일 크루즈 여행을 하며 현지 댄스스포츠 관계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상품인데, 조만간 지역예선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중·장년층 경험자들이 꼽는 크루즈 여행 장점은 식사 때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고, 여행지를 이동할 때마다 매일 짐을 싸고 풀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으며, 밤 시간 동안 배로 이동한 뒤 다음 날 여유 있게 기항지를 둘러볼 수 있어 하루 종일 빡빡한 일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장시간 버스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피곤하면 기항지 관광 대신 선상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여독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배 위에서 심심할 틈이 없는 데다, 별이 쏟아지는 밤바다 풍경과 푸른 바다 위 여명, 저녁노을은 환상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남기희 대표는 “50~60대 중·장년층에게 일정이 빠듯한 일반 패키지여행이나 배낭여행은 체력적으로 무리가 있다. 구매력을 갖춘 은퇴한 베이비부머를 중심으로 크루즈 여행객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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