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9

2013.03.18

순정만화와 포르노 동물이 만났을 때

욕망의 이중 코드

  • 마야 최 심리상담가 juspeace3000@naver.com

    입력2013-03-18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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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너무 심하게 잠자리를 좋아해요. 거의 매일 요구하니까 원치 않는데 하는 거예요. 해주기 싫어도 친구들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냥 응해요. 여자가 안 해주면 남자가 바람피운다잖아요. 저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기분 내고 대화하는 걸 더 좋아하는데, 남편은 오로지 그것만 생각해요.”(김희재·가명·38)

    연애 시절에도 김씨 남편은 성관계를 갖자고 자주 졸랐다. 만나기만 하면 어두운 구석으로 끌고 가 김씨 몸 이곳저곳을 거칠게 더듬곤 했는데, 당시 김씨는 남자가 자기를 정말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이후 김씨 친구들은 김씨를 부러워했다. 친구들 남편들은 대부분 부부 성생활에 관심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김씨는 “그래, 그래도 남편은 나와 관계 갖기를 좋아하니, 안 그런 것보다 낫잖아”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가만있어” 거친 섹스의 굴욕

    그런 김씨가 상담을 받으러 온 결정적 이유는 며칠 전 남편과의 잠자리 때문이다.

    그날 남편은 컴퓨터방 문을 걸어 잠근 채 오랜 시간을 보냈다. 김씨는 남편이 무엇을 하는지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아이들이 남편 컴퓨터를 사용했을 때 망측한 팝업창이 계속 떴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김씨는 아이들이 남편 컴퓨터에 손도 못 대게 했다.



    그날 김씨는 먼저 잠이 들었다. 잠결에 남편 손길이 느껴졌으나 늘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자는 척하며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다. 남편은 거칠게 김씨 옷을 벗기더니, 김씨 몸을 뒤집고 두 팔을 등 뒤로 돌려 무엇인가로 묶기 시작했다. 잠이 확 깬 김씨는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남편은 김씨를 타고 앉아 귀에 대고 숨을 헐떡이며 “가만있어”라고 했다. 김씨는 아이들이 들을까 크게 소리치지도 못하고 “이러지 마”라며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남편은 끝끝내 두 손이 묶인 김씨를 상대로 거칠게 섹스를 했다. 김씨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겁이 났어요. 내 뒤에서 그 짓을 하는 남자가 아이들 아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죠. 손이 묶여 저항도 할 수 없었어요. 몸부림치면서 싫다고 하는데, 남편이 내 등짝과 둔부를 때리며 ‘좋아? 좋아?’ 하는 거예요. 소름이 끼쳤어요. 그러더니 내 허리를 뒤에서 꽉 그러잡고 섹스를 하기 시작했어요. 내 얼굴은 침대에 박힌 꼴이 됐죠. 무섭고 치가 떨릴 정도로 굴욕적이었어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남편은 자기 일을 끝내고 내 손을 풀어주더니, ‘잘했다’고 능청맞게 말하곤 곯아떨어졌어요. 저는 그날 거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어요.”

    김씨는 그다음 날 남편 컴퓨터를 부수고, 계속 딸 방에서 잠을 자며 남편과는 냉전 중이라고 했다.

    한 번은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손주를 업고 상담소를 찾았다. 그는 여름인데도 긴 치마를 입고 땀을 뻘뻘 흘렸다. 팔에 걸린 시장바구니에서 크림통 6개, 박카스병 1개와 오이를 꺼내 책상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지가 이 나이에 이런 걸 하며 영감이랑 자야겠어유? 내 거시기에 오이도 넣고유, 박카스병도 넣어유. 이 통들은 너무 뻑뻑하니까 바른 구르무여유. 아이고, 내가 남세스러워서 이걸 어데 가서 말한데유? 맨살만 보이면 밤이고 낮이고 달겨드니까는 푹푹 쪄도 긴 치마만 입어유. 내가 미쳐유. 이제 못 살겠시유. 이혼할래유.”(이복순·가명·58)

    이씨는 아이들이 다 자라면 안 그러겠지 하며 20년을 참았지만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장성한 뒤 결혼해 손주를 봤는데도 남편 행태는 그대로였다. 흉측스러운 일이라 자식들에게 말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몸에 상처가 나서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가 상담을 받아보라 해서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더는 참고 살 수 없다는 결의가 대단했다.

    물론 두 사람 얘기는 극단적 사례일 것이다. 그럼에도 보통의 부부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섹스에 대한 남자의 거대한 욕망은 여자의 욕망과 같지 않다는 점에서다. 순정만화를 보고 자란 여자와 포르노를 보고 자란 남자가 만나서 잘 지내기란 근본적으로 어렵다. 남자의 사랑은 포르노로 시작한다. 10대 때부터 이런저런 음란물을 돌려보며 자기 방이나 화장실에서 자위하며 자랐다. 포르노는 섹스의 폭력성을 남성 중심으로 극대화한 매체라 할 수 있다. 남자는 포르노를 보면서 자신이 꿈꿀 수 있는 섹스 최대치를 느끼며 감동받는다.

    여자의 사랑은 막 이성에 눈뜰 나이에 순정만화 판타지로 시작한다. 순정만화 레퍼토리는 늘 한결같다. 국민 만화 ‘캔디’를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재능과 부를 겸비한 멋쟁이 아저씨가 주근깨투성이에 별 볼일 없는 말괄량이를 좋아한다. 순정만화 속 남자 주인공은 모두 섬세하고 다정하며 용감하고 똑똑하다. 순정만화에서 수위가 가장 높은 야한 장면은 ‘키스’나 ‘백허그’ 정도다. 그러니 여자가 사랑을 달콤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문제는 남자의 포르노 판타지와 여자의 순정만화 판타지가 만나 충돌한다는 점이다. 가학적이고 음탕한 섹스 판타지를 마음에 품은 남자는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좋다느니, 허리에 팔을 두르고 산책하는 것이 좋다는 여자를 만나면 당황해한다. 남자는 포르노에서 배운 대로 거칠고 능동적인 성애를 구현하고 싶어 하지만, 이것이 순정만화를 사랑 교본으로 삼는 여자에게 통할 리 없다.

    김씨는 남편의 포르노적 성행위 때문에 진저리를 친 것은 아니다. 만일 남편이 김씨 소망처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친 뒤 김씨에게 동의를 받아 그런 섹스를 했다면 김씨는 좀 당황했을지라도 끔찍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씨 남편을 상담실로 초대해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부부 사랑도 학습이 필요

    “여자와 잘 지내려면 남자는 여자가 순정만화 동물이라는 점을 정확히 알아야 해요. 즉, 낭만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거죠. 머릿속으론 섹스를 상상해도 현실에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고, 손을 뻗어 여자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달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걸을 수 있어야 해요. 여자에겐 낭만적 데이트가 중요합니다.”

    김씨 남편은 부부 사이에 무슨 데이트냐고 처음엔 강짜를 부렸다. 점차 이야기가 무르익자 김씨 남편은 아내가 자신에겐 일언반구 없이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이 창피하고 자존심 상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그동안 성생활을 하면서 좋다 싫다 일언반구 없어, 아내를 만족시키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다 그렇게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어렵게 털어놨다.

    부부 상담을 진행해가면서 김씨와 남편은 성생활에 대해 점점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남편은 아내에게 한 달에 4번 정도 데이트 신청을 했다. 아내가 좋아할 만한 장소를 정해 깜짝 데이트를 하자, 아내에게 놀랄 만한 변화가 생겼다. 부부 성생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스스로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상담 끝 무렵엔 김씨가 남편에게 고상한 포르노를 같이 보자고 했다며 수줍게 웃었다.

    사랑은 학습하는 것이다. 순정만화를 통해 사랑을 배운 여자는 포르노를 볼 필요가 있다. 포르노를 통해 남자의 성이 어떤지, 어떤 것에 반응하는지 등을 배워야 한다. 포르노로 사랑을 이해한 남자는 순정만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로맨스 영화를 봐야 한다. 영화를 통해 여자의 성이 무엇인지, 어떤 것에 흥분하고 반응하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

    이씨 경우는 회복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이씨가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참아왔기 때문이다. 펄쩍 뛰며 이혼하겠다는 이씨를 설득해 자녀에게 고충을 털어놓게 했고, 자녀들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남편도 더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다. 나이 많은 부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자녀다. 이씨는 그럼에도 자신을 평생 괴롭힌 남편을 벌주려고 주중에는 딸 집에서 지내고 주말에만 집에 가기로 했다.

    상담이 끝나고 3개월쯤 지나 이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시유? 슨상님, 내 말 좀 들어봐유. 오이무침을 하려고 오이를 써는데, 영감이 이상한 눈빛을 하는 거예유. 그래서 오이로 영감 머리통을 막 때려줬시유. ‘오이는 묵는 거야, 묵는 거. 이 변태영감탱이야’ 하면서 말이에유. 잘했지유, 슨상님?”

    순정만화와 포르노 동물이 만났을 때
    현재 한국심리상담치료센터 주강사인 마야 최는 안산이주민센터 부설 이주여성상담소 BLinK 소장과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부설 성남가정법률상담소 상담위원을 지냈다. 인도 뉴델리 J.M.I대학에서 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역사소설 ‘람세율’, 연애심리소설 ‘호니걸스’, 동화 ‘해님을 불러오는 태양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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