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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 호주 포도원 기행

음악과 낭만을 안주 삼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날

‘브로큰우드’ 포도원

  • 박일원·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음악과 낭만을 안주 삼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날

‘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음악과 낭만을 안주 삼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날
춘추전국시대 때 일화다. 제나라 위왕이 순우곤의 업적을 치하하는 주연에서 그에게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그대는 얼마나 마시면 취하는가?”

“신(臣)은 한 되를 마셔도 취하옵고 한 말을 마셔도 취하나이다.”

“허, 한 되를 마셔도 취하는 사람이 어찌 한 말을 마실 수 있단 말인가?”



“예, 경우에 따라 주량이 달라진다는 뜻이옵니다.”

이렇게 답한 순우곤은 고관대작들이 지켜보는 자리나 나이 드신 근엄한 친척들이 모인 자리라면 실수할까 두렵고 행동거지가 어려워 한두 되의 술에도 취하지만, 옛 벗을 만나 회포를 풀면서 마신다면 대여섯 되까지는 마실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동네 남녀와 어울려 놀이하며 마신다면 여덟 되에 취기가 돌며, 집 안에 술병과 접시가 어지럽게 흩어지고 등불이 꺼질 무렵 안주인이 손님들을 돌려보낸 뒤 얇은 속적삼 옷깃을 풀어헤쳐 색정적인 향내가 감돈다면 그때는 한 말이라도 마실 수 있다고 위왕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처럼 술은 분위기와 마시는 상대에 따라 취하는 정도와 흥이 다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호주에서의 이민생활은 한국에서의 생활과 많이 달라 서로의 속사정을 잘 아는 오래된 친구와 마주 앉아 잔을 기울이거나 속옷이 어깨 위로 드러난 여인의 시중을 받아가며 술을 마시는 호사를 누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필자는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출출한 저녁이면 아내를 졸라 얻어낸 김치부침개 한 접시와 호롱불 하나 들고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습습한 뒤꼍으로 나가 술잔을 기울인다. 하지만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 혼자 마시는 술은 큰 흥을 불러오지 못한다. 그래서 이따금 헌터밸리를 찾아가 각지에서 몰려온 술꾼과 어울려 크게 떠들며 와인 잔을 기울임으로써 타국생활의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위로받는다.

헌터밸리의 맥귀간 포도원을 나와 다음으로 들른 곳은 ‘브로큰우드’ 포도원이었다. 이곳을 찾으면 먼저 20년 된 포도나무 가지 하나를 오크통 위에 장식용으로 세워놓은 게 눈에 들어온다. 벽에 붙인 빛바랜 사진들은 포도원의 지난한 역사를 대변해준다. 1970년에 조성된 브로큰우드는 맥귀간처럼 크지는 않지만 소품종 고급 와인 생산을 모토로 내세우는 포도원이다. 시드니에 살던 세 명의 법조인이 모여 “우리도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좋은 와인을 한번 만들어보자”며 뜻을 같이 한 게 지금 포도원의 시발점이 됐다.

1970년대 조성…소품종 고급 와인 생산

의기투합한 그들은 곧바로 정부에서 크리켓 구장으로 계획한 브로큰우드 산자락의 땅을 샀다. 처음 심은 포도 종류는 레드와인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쉬라즈. 친구와 그 가족이 오순도순 힘을 합쳐 일한 결과, 3년 만에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나무에서 딴 포도송이를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양동이에 담은 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언덕 위 창고로 옮겼다. 지금이야 파쇄기와 압착기를 이용해서 줄기를 자동으로 제거하고 포도즙을 짜내지만 당시에 가족과 친지들이 빙 둘러앉아 포도 알을 손으로 하나하나 떼어낸 후 그것을 모아놓은 통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 노래 자락에 맞춰 발로 밟아 으깼다.

브로큰우드에서 10년 넘게 양조가로 일한 차터리스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13세 때부터 가지치기를 하며 포도밭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때는 조종사가 돼 하늘을 나는 꿈을 갖기도 했지만 와인에 매혹돼 호주 이민을 택했다. 애들레이드에 있는 와인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전 세계의 유명 와인지역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다양한 와인을 직접 맛본 그는 어느새 최고의 양조가가 됐다. 그는 “자신이 마신 것 중 최고의 와인은 1865년산 샤토 라피트 로칠드다. 와인 한 병이 웬만한 자동차보다 더 비싸다”고 자랑했다.

브로큰우드 와인 바에 앉았더니 뜻밖의 안주가 나왔다. 바 너머에서 와인 상담을 해주던 금발의 아가씨는 브로큰우드의 자랑거리인 쉬라즈 한 잔을 따라주며 치즈가 아닌 홍합탕과 안초비 샐러드를 내밀었다. 홍합탕은 뉴질랜드산 홍합에 소금만 약간 넣어 끓인 것이고, 안초비 샐러드는 서양 멸치젓을 가미한 것이었다. 호주에 사는 이들에겐 치즈보다 이것들이 더 인기다. 화들짝 놀란 필자를 위해 그는 치즈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물론 치즈도 좋은 안줏거리입니다. 보통 화이트 와인이나 샴페인의 경우에는 향은 강하지만 부드러운 치즈가 좋으며, 레드 와인을 마실 때는 좀 딱딱하고 중간 향 정도의 치즈가 잘 어울리죠.”

와인이 술술 넘어가는 포도원 음악회

음악과 낭만을 안주 삼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날
그의 말처럼 헌터밸리에선 쿰쿰한 냄새가 풍겨오는 치즈가게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가 다양한 맛을 지닌 치즈를 안주로 와인을 마시는 것이 호주에 사는 이들에겐 커다란 즐거움이다. 이것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마음씨 좋은 주방장이 코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화덕에 직접 요리해주는 안주를 먹어야 한다. 송이버섯과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송아지 안심구이…. 저렴한 안주에 그 레스토랑만의 특제 하우스와인을 곁들이면 인생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오늘처럼 볕 좋은 날이면 사각사각 부서지는 햇빛 속에서 따각따각 내딛는 말을 타고 와이너리를 돌아볼 수도 있다. 아니면 열기구를 타고 포도밭 위로 두둥실 떠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와인 잔을 돌려도 좋다. 예산이 좀 넉넉하다면 경비행기나 헬기를 타고 포도원 상공을 날며 주위를 둘러보기도 한다. 모든 것이 헌터밸리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헌터밸리 최고의 이벤트는 잉크 빛으로 산지 사방 색깔을 입혀가는 저녁에 시작된다. 와인과 함께 하는 포도원 음악회. 밤이 깊어 별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하늘에 달리면 사람들은 저마다 초록색 잔디밭에 자리를 펴고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인다. 그 순간 상큼한 공기 속을 가르며 날아드는 음악은 와인과 어우러지며 하나가 된다.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일지라도 낭만적인 분위기에 빠져든다.

저절로 익어가는 포도와 시큼한 향을 내뿜는 와인창고 사이 가설무대에서 흘러나오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 ‘축배의 노래’ 그리고 ‘예스터데이’…. 술이 술술 넘어간다. 와인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인생에 취한다. 순우곤의 말처럼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날이다.



주간동아 806호 (p66~67)

박일원·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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