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9

2017.03.15

커버스토리

이승만과 겹쳐 보는 박근혜 영욕사 | 시대를 뛰어넘은 닮은꼴

임기 만료 전 물러난 두 대통령…국민이 뽑았지만 국민의 손에 ‘아웃’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7-03-13 16: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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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3월 10일은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상징적인 날이 될 전망이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국민의 손에 의해 거부돼 청와대에서 쫓겨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도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의미하는 날이 된 셈이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는 대한민국 법통을 임시정부로까지 확장한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례가 첫 번째가 아닐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92년 전인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당시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을 탄핵해 면직시키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던 것이다.

    탄핵 절차를 거쳐 물러난 두 대통령인 이승만과 박근혜. 이 두 정치인의 인생은 다른 점도 많지만 흥미로운 공통점도 여럿 발견된다. 두 인물을 비교하고 박 전 대통령의 정치 행로까지 살펴본다.



    ‘조선의 왕자’ 그리고 ‘유신의 공주’

    이승만



    “신사숙녀 여러분, 한국에서 온 이승만 군을 소개합니다. 원래 한국 왕실의 후손으로 장차 한국을 짊어지고 나갈 인물입니다.”(우드로 윌슨)

    28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우드로 윌슨은 프린스턴대 총장 시절 학생인 이승만을 만난 이후 그를 아끼고 평생 후원자가 된다. 윌슨은 이승만을 소개할 때 ‘조선 왕실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소개가 나오면 “당신이 조선의 왕자인가”라는 질문도 나왔다고 한다. 미국 사교계에서 활동하던 시절 이승만이 자신을 ‘프린스 리’라고 칭했다는 증언도 다수 있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조선 왕가의 몰락한 방계 후손에 속한다. 하지만 엄격한 왕실 기준에 비춰보면 조금은 과도한 표현이었다. 게다가 이승만 집안은 오랜 기간 관직과 무관했기에 청년 시절 이승만은 조선 왕실에 대한 불만이 높았고, 공화정으로 개혁을 꿈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약소국 젊은이가 선진국 사회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마음과, 유달리 왕실 출신 망명자가 많았던 20세기 초반 미국 상황에 비춰보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라는 옹호론도 없지 않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승만-프란체스카 부부가 경무대 생활을 하면서는 사실상 왕처럼 행동했다는 데 있다. 이승만은 ‘국민’이 아닌 ‘백성들’이라고 불렀고, 비서들과 대화할 때는 “짐은…”이라는 왕조시대 표현을 즐겨 썼다. 또한 대통령경호실에서는 항상 “하옵니다” 같은 극존칭과 ‘옥체, 성심, 수라’ 등 왕실 용어까지 사용했다.


    박근혜

    “저는 외환위기 사태를 당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망할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어도 울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1998년 정치에 입문하면서)

    오랜 칩거를 끝낸 박근혜가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밝힌 자신의 모델은 대영제국을 이끈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었다. 최고지도자를 꿈꾼다는 뜻과 더불어 ‘조국과 결혼했다’는 함의를 지닌 정치적 수사였다. 하지만 집권 이후에는 ‘여왕’이라는 별명 대신 ‘유신(維新)공주’ 혹은 ‘수첩공주’ 같은 별명이 줄곧 따라다녔다. 아버지 시절 만들어진 ‘공주’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기도 했다.

    1960년 5·16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의 맏딸인 그는 10세 때 청와대에 들어가 79년 아버지가 암살되던 27세 때까지 18년간을 살았다. 청소년과 청년 시기를 권력의 한복판에서 보낸 셈이다. 그의 특수계급을 보여주는 일화는 70년 입학한 서강대 재학 시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1학년 때 한 남학생이 대통령 딸인지 모르고 접근해 “나와 함께 빵을 먹으러 가자”고 조른 것이다. 일종의 데이트 신청이었지만, 박근혜는 아버지에게 “자꾸 빵을 먹자는 남학생이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다음 날 다시 나타난 남학생에게 경호원들이 들이닥쳐 빵이 가득 담긴 상자를 내밀며 “실컷 먹어”라고 윽박질렀다는 일화다. 이 사건 이후 박근혜에게서는 ‘남자친구’와 ‘데이트’란 개념이 사라지고 만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자 자연스레 박근혜는 ‘유신공주’ 반열에 오른다. 올해 초 종합편성채널 채널A에 출연한 전여옥 전 의원은 ‘수첩공주’라고 묘사하며 “(박 전 대통령은) 말 한 마디, 눈빛 하나로 다 해결되던 그 시절(유신정권)을 야당 대표가 돼서도 그대로 반복했다”고 평가했다.

    결정적 사건은 프랑스 유학 시절인 1974년 22세 때 벌어졌다. 정신적 지주인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8·15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한 것. 재혼을 포기한 아버지 때문에 박근혜는 대한민국 영부인 임무를 대행했다. 아버지 박정희의 공식행사와 해외순방 등을 수행했고, 75년부터는 새마을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일종의 ‘유신정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대통령인 아버지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놓친 것은 물론, 어머니를 잃은 상처도 치유하지 못한 채 권력을 쥔 것이다. 20대 여성에겐 감당하기 버거운 역할이기도 했다. 이는 이후 최태민과 비정상적인 만남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잉태하게 된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어머니를 잃자마자 딸을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내세운 것은 상처 치유에 굉장히 좋지 않다”면서 “자연스레 고독감이 커진 상황을 최태민이 파고들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화여대, 측근 그리고 부정입학

    이승만

    “자유당은 두 가지 암(癌)으로 죽어갔는데 하나는 프란체스카 암이요, 또 하나는 박마리아 암이었다.”(1950년대 대중 속설)

    이 말은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는 영부인 프란체스카가 휘두르고, 서대문 경무대는 부통령 이기붕의 아내인 박마리아가 휘두른다는 뜻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주위에도 비선 실세가 적잖았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25세 연하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내 프란체스카였고, 두 번째는 영부인의 비서 겸 말벗인 박마리아 당시 이화여대 교수였다. 프란체스카는 박마리아의 싹싹하고 민첩한 태도를 좋아했다. 영어까지 잘하던 박마리아는 이를 적극 활용해 남편 이기붕을 확고한 권력 2인자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에 이기붕은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를 기획한다. 박마리아 역시 여성계와 이화여대에서 승승장구했다. 당대 최고 조직력을 가진 대한부인회 대표 최고위원이 되는 동시에 이화여대 부총장직에도 올랐다. 박마리아가 당시 이화여대 총장인 김활란보다 10년 앞서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 사회적 논란 거리였지만 그 누구도 공론화하지는 못했다.

    박마리아의 권력욕 정점은 자신의 장남 이강석을 대통령의 양자로 보낸 사건이다. 이승만은 미국 체류 시절 낳은 아들이 있었지만 병사했고, 재혼한 프란체스카와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이 점을 아쉬워한 그는 평소 “내가 죽으면 제사는 누가 지내주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후사에 대한 이승만의 집착, 그리고 빈번히 자리를 함께 했던 이기붕 아들에 대한 프란체스카의 애정이 박마리아의 권력욕과 맞아떨어지면서 19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82세 생일에 맞춰 이강석을 양자로 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추문도 잇따랐다. 지방에 가짜 이강석이 등장했고, 이강석을 서울대 법대에 부정입학시키려다 서울대생들이 집단 반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근혜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중략)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지난해 10월 25일 대국민담화)

    10·26 사건으로 청와대에서 나온 박근혜는 대외적으로는 1980년 영남대, 한국문화재단 이사장직에 올랐고 82년에는 육영재단 이사장이 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칩거활동을 이어갔다.

    1990년 서울 중구 장충동 자택을 팔고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사한다. 이때쯤 박근령-지만 형제와 육영재단을 놓고 충돌했다. 동생들은 당시 육영재단 고문인 최태민 목사의 퇴진을 요구하며 노태우 대통령에게 탄원서까지 보냈다. 결국 그해 11월 박근혜는 박근령에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넘기고, 또 한 번 칩거에 들어갔다. 이 기간엔 새마음봉사단 활동 당시 알게 된 최순실과 인연을 이어갔다.

    오랜 침묵을 깬 계기는 199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이회창 지지 선언을 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 이듬해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나가 당선했다. 당시 비서실장은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였다(현재는 이혼). 두 사람의 딸인 정유라는 승마를 시작해 훗날 독일 승마 유학을 시도하며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았고, 이어 이화여대 부정입학까지 하게 된다.



    4·19와 촛불집회, 하야와 파면

    이승만

    “나 이승만은 국회의 결정을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1960년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1960년 3·15 부정선거 등 이승만 정권의 실정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는 평가다. 다만 당시 탄핵은 자유당이 다수파를 차지하고 대법관 상당수가 탄핵재판소 판사를 겸직하는 시스템을 고려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 대신 학생과 시민의 저항이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1960년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케 하기 위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저항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자 4월 19일 경찰이 경무대로 몰려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185명 넘는 사망자가 나오게 된다. 이를 기폭제로 초등학생 등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은 전 국민적 저항이 어어졌고, 군 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가 확인되자 결국 이승만은 일주일 남짓 만에 하야 선언을 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이 몰락했다. 


    박근혜

    박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2002년 차떼기 파동으로 시작된 천막당사 시절부터 빛을 발해 ‘선거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했고, 2012년 18대 대통령 당선으로 절정에 이른다.

    박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인 동시에 동아시아 근대사 최초 여성 대통령이기도 하다. 나아가 2대에 걸쳐 ‘부녀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며, 최초 미혼 대통령이기도 하다. 또 최초 이공계 학부(서강대 전자공학과) 출신 대통령이라는 호칭도 있다. 이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정권 초반과 중반 안정적인 지지율을 이끌어내며 찬사를 받기도 한다.

    소통 부재, 잇단 인사 참사, 배신의 정치 운운한 뺄셈의 정치 등으로 지지율이 점차 하락하더니 결국 최측근인 최순실 씨 등의 국정개입 사실이 공개되면서 절체절명 위기에 처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전무후무한 국정농단 사태의 주범이자 부패 행위 및 협박·뇌물수수 혐의로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검찰에 입건된 범죄 피의자로 추락했다. 국민은 매주 100만 명 넘는 촛불집회를 열며 ‘시민혁명’으로 박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했고 국회는 지난해 12월 9일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2표, 무효 7표로 박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켰다.

    90일 넘는 탄핵심리 끝에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중략)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화려했던 반세기 정치 이력은 꼭두각시 대통령이자 헌정 사상 최초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로 마무리됐다.

    이승만 하와이로 망명, 박근혜는 어디로?

    1960년 4월 26일 오후 1시, 라디오로 국민에게 하야 선언을 한 이승만은 그날 오후 4시 경무대를 떠나 전에 살던 서울 종로구 이화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워낙 급작스러운 결정이라 길에 늘어선 시민들까지 박수를 치며 정객의 사퇴를 축하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존재 자체는 부담스러웠다. 이기붕 부통령 일가가 자살한 만큼 부정선거는 물론, 4·19혁명 시위대를 향한 발포까지 언제 어떤 식으로든 이승만에게 책임론이 돌아갈지 모를 일이었다.

    당시 내각수반은 자유당계 허정이었다. 원래는 민주당 소속의 장면 부통령이 승계해야 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퇴함으로써 묘하게 혼란한 정국 수습을 이승만 계보의 허정 권한대행이 맡게 됐다.

    허 권한대행은 5월 29일 새벽 김포국제공항에서 하와이행 군용기로 이승만을 비밀리에 망명시켰다. 5년 뒤인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은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향년 90세로 사망하고, 그 직후 유해만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야가 아닌 탄핵심판을 선택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적 미래 역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계 제로’ 상황에 빠졌다.

    먼저 헌재 결정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됐기 때문에 청와대를 떠나 23년간 살았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초 거론되던 종교시설이나 지방으로 이주는 계획에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청와대 측은 삼성동 집의 보일러 공사 등 개·보수 작업을  마치고 경호시설 준비에 나설 예정이다.

    관건은 명예회복에 나선 검찰의 추가 수사 의지와 강도가 얼마나 거셀지 여부다. 이번 탄핵심판은 ‘대통령직’에 관한 것이고, 이제는 형사 책임을 구체적으로 가려야 하기 때문이다. 법조계는 현재까지 확인된 혐의를 고려할 때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할 공산이 크다는 데 의견을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전직, 그것도 여성 대통령이 물러난 직후 수의를 입거나 수갑을 찬 모습을 대중에게 보이는 것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과 새로운 정부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게다가 폐쇄적인 삶을 살아온 박 전 대통령이기에 수감생활 중 받을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견딜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만일 구속된 상황에서 건강이 상할 경우 보수세력 사이에서 동정 여론이 일어 되레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질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정황으로 정치권에서는 망명 추진이나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는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과거 노태우 정부 시절 백담사로 유배를 갔던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삼성동 자택에서 ‘정치적 망명’을 택하는 길이 최선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까지 구속되고 최순실을 비롯한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에 대한 형사재판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책임이 가장 큰 박 전 대통령이 재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경우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 

    이래저래 박 전 대통령의 행보와 정치권의 선택이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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