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7

2016.10.05

사회

“사후피임약 부작용? 몰라요”

임신 불안에 과량 복용, 처방이력 공개 안 돼 환자 진술에만 의존…피임 외면하는 성교육도 문제

  •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입력2016-09-30 17: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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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관계 후 임신을 방지하는 사후피임약(응급피임약) 처방이 늘고 있다. 그중 의약품 오·남용으로 추정되는 사례도 급증하는 추세다.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받은 ‘1개월 내 사후피임약 중복사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사후피임약을 월 2회 이상 처방받은 건수는 2012년 2395건에서 2015년 5482건으로 2.3배 늘었다.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중복처방 건수도 이미 2468건에 달한다(표 참조).

    고용량의 호르몬을 포함하고 있는 사후피임약은 여성의 체내 호르몬 농도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배아의 착상을 방해한다. 일반피임약(사전피임약)보다 약 15배 많은 호르몬을 함유하며, 인체의 호르몬 상태가 순간적으로 급변하기 때문에 상시적인 피임 방법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한 생리주기(약 28일)에 2회 이상 복용하지 않는 것을 권장하며, 2회 이상 복용하면 약물 오·남용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달 내 사후피임약이 중복처방되는 건수가 계속 늘고 있다.



    피임실패율 15%, 남성이 복용 강요하기도

    사후피임약이 어떻게 처방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피임약이 필요한 환자로 가장하고 서울 강남구 한 산부인과의원에 들렀다. 산부인과 전문의는 기자에게 결혼 여부, 성관계 시기, 마지막 생리 날짜와 생리주기 등을 묻고는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임신 가능성이 높진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자가 “그래도 약을 꼭 처방받고 싶다. 3주 전 사후피임약을 복용한 적이 있다. 그래도 다시 처방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 의사가 답했다.

    “사후피임약은 응급상황에 한해 복용하는 약제라 자주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 임신이 정 걱정되면 초음파 검사로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검사를 원치 않는다면 약을 처방해주겠다. 단, 한 생리주기에 2회 복용하는 거라 상당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대화가 오간 후 기자는 ‘성관계 후 120시간 내 복용’이 원칙인 모 제약사의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사후피임약은 처방이나 복약이 잘못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임순 순천향대 의대 교수(대한산부인과학회 청소년성건강위원장)는 “사후피임약을 한 생리주기에 여러 번 복용할 경우 부작용이 심각하다. 그중 31%가 ‘출혈’인데 많은 여성이 이를 생리로 오인해 임신이 되지 않은 줄로 여기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생리불순, 오심, 복통도 흔한 부작용이며 피임실패율이 15%로 높다. 그런데 많은 여성이 이런 상식 없이 사후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남성이 약을 미리 보관했다가 여성에게 복용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후피임약의 중복처방이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의사는 환자가 언제 마지막으로 사후피임약을 복용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사전 및 사후피임약은 비만치료제 등과 함께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급여를 받지 않는 ‘비급여’ 의약품이다. 비급여 의약품의 처방이력 일부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병·의원, 약국이 의약품 처방·조제 기록을 공유하는 DUR(Drug Utilization Review·의약품안심서비스) 점검 대상에서 누락된다. 의사가 처방기록을 등록해봤자 보험급여를 받지 못하므로, 처방기록 입력을 번거롭게 여기는 의사들이 처방이력을 제출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당사자가 최근 사후피임약 복용 이력을 숨기면 의사로선 1개월 내 중복처방 여부를 알 수 없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 개원의 A(50·여)씨는 “사후피임약 처방이력 중 일부는 DUR에 올라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환자에게 내려진 처방을 병원 간 공유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즉 환자가 각각 다른 병원에서 여러 번 약을 처방받거나, 진료 시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약물 오·남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의사가 사후피임약에 대한 지식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처방하는 경우도 일부 있다. 사후피임약은 산부인과가 아닌 다른 의원에서도 처방받을 수 있는데, 산부인과 전문의가 아닌 의사가 환자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바로 처방전을 내주는 것이다. 경기도 한 가정의학과 개원의 B(53·여)씨는 “환자가 사후피임약 처방을 의뢰하면 ‘성관계 후 늦어도 72시간 내 복용해야 한다’고만 조언하고 처방해왔다. 한 생리주기 내 복용 횟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피임에 무방비인 청소년들

    청소년의 사후피임약 오·남용 우려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1개월 내 사후피임약 중복사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5년 사후피임약 중복처방을 받은 연령대는 20대(2755건·50.2%), 30대(1545건·28.1%), 40대(722건·13.1%), 10대(420건·7.6%) 순으로 나타났다. 1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높지 않지만 2012년 170건에서 2015년 420건으로 4년 만에 2.47배라는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또한 지난 5년간 청소년 1만1942명이 임신과 출산으로 진료를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청소년 성교육 현장에서는 “10대에게 사후피임약의 올바른 사용법을 비롯해 피임 지식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명화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대표는 “청소년의 피임약 오·남용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 성관계 후 72시간 내 복용해야 함에도 닷새가 지난 뒤 복용하거나, 권고 시간이 지나면 불안감에 2번 이상 연속으로 복용하기도 한다. 공교육에서 피임관련 내용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을뿐더러 콘돔, 피임약에 대해 들어보긴 했지만 피임 자체를 자신의 일로 생각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적용 방법, 부작용은 거의 모르는 편”이라고 지적했다.

    교육부는 2015년 ‘초중고 성교육 표준안’을 발표하고 각 학교에 이를 기반으로 성교육을 시행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과정에서는 피임을 전혀 다루지 않고, 중학교 과정에는 ‘피임의 종류와 방법’만 제시돼 있을 뿐 구체적 내용이 없다. 이명화 대표는 “학교 성교육은 성폭력 예방교육이 중심이며, 요즘 10대에게 늘고 있는 연애나 성관계, 피임 관련 교육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중학교는 학년당 15시간씩 성교육을 의무적으로 하게 돼 있는데 이조차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사후피임약의 올바른 처방과 사용법 보급이 시급하지만 정부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5월 20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사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사전의약품을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한 현행안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발표한 것이 전부다.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면 의사의 처방 없이 약국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어 약물 오·남용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피임약 오·남용에 대한 환자의 인식 부족만 탓하지 말고 제도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임순 교수는 “피임약에 국민건강보험을 적용하면 중복처방에 따른 오·남용과 부작용 예방은 물론, 피임약 복용 실태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화 대표는 “성교육은 생물학적 지식 전달뿐 아니라 청소년이 사회학, 심리학 지식과 성평등적 관점을 견지하고 피임에 대한 의사소통과 판단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각 학교 보건교사와 성교육 전문기관이 협력해 실질적인 성교육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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