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0

2016.08.10

정치

삼세판 손학규에게 대선 꽃길 없다

더민주는 친문, 국민의당은 안철수 중심…손학규는 어디로?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6-08-05 17:3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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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거울과 같다. 지나온 길을 되짚어봄으로써 지금 서 있는 좌표를 알 수 있고,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계 복귀를 앞둔 손학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내년 대통령선거(대선)까지 어떤 행보를 할지 가늠하는 데 그의 지난 10년을 되짚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꼭 10년 전인 2006년 8월. 당시 한나라당 소속 후보 3명이 치열한 대권 경쟁을 벌이며 한여름 정치판을 달궜다. 대선 관련 여론조사에서 용호상박의 접전을 벌인 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였다. 그해 6월 말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난 이 전 시장은 청계천 복원 성공에 힘입어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박 전 대표는 당심을 등에 업고 있었다. 박 전 대표는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까지 겹쳐 존립 자체가 위협받던 한나라당을 ‘천막당사’로 돌파해 당원들의 지지가 두터웠다.



    민생대통령으로 가는 길

    이명박, 박근혜 두 사람의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까지 대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두 후보에 비해 손 전 지사는 국민적 인지도나 당 지지율 모두 뒤처졌다. 손 전 지사가 지지율 반등을 위해 꺼내든 카드는 100일 민심대장정이었다. 한 지방 일간지는 손 전 지사의 민심대장정에 대해 “민초를 스승 삼아 민초의 민생 현장으로 다가가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며 ‘민생대통령으로 가는 길’이라고 극찬했다.

    손 전 지사의 민심대장정은 이명박, 박근혜 두 후보에 비해 부족한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회심의 카드였다. 그러나 102일간 이어진 민심대장정을 마치고 서울역으로 귀경한 2006년 10월 9일 오전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단행함으로써 모든 뉴스가 블랙홀처럼 북핵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전국을 돌며 흘린 땀방울은 수포로 돌아갔다.



    민심대장정이란 반전카드마저 무용지물이 된 후 손 전 지사는 좀처럼 지지율 상승의 계기를 찾지 못했다. 자력으로 대선후보가 되는 것이 힘든 상황. 그 대신 호각지세인 이명박, 박근혜 두 사람 가운데 손 전 지사가 누구의 손을 잡느냐에 따라 당내 경선 판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유력 대선후보라기보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캐스팅보터로 자리매김하는 듯했다.  

    한편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것을 계기로 지지층이 대거 등을 돌리면서 정권의 존립 기반마저 흔들렸다. 열린우리당 내 유력 대선주자가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 탄핵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국민에게 안정적인 국정운영 가능성을 선보인 고건 전 국무총리가 30% 넘는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유력 대선후보로 부상했다. 그러다 2007년 초 고 전 총리마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자 열린우리당 등 당시 여권은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이 같은 상황에 당시 범여권 재편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이 탈당해 ‘헤쳐 모여’ 식 정계 개편을 시도했고, 한나라당 대선 경선구도에서 가능성을 찾지 못하던 손 전 지사가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에서 그는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한나라당 집권’에 반대하는 이들 가운데 손학규 지지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지만, 정작 당내 경선에서는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이란 전국 조직을 갖추고 일찌감치 준비해온 정동영 후보에게 가로막혔다. 결국 2007년 대선은 이명박 후보가 대한민국 대선 역사상 최대인 530만 표 이상 차로 승리했다.

    대선 패배 후 손학규는 야당이 된 민주당을 추슬러 18대 총선을 치렀다. 하지만 결과는 81석의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그는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강원 춘천시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0년 손학규 전 지사는 2년 만에 당대표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여세를 몰아 2011년 4월 재·보궐선거(재보선)에서는 여당의 아성이던 경기 성남시 분당을에 출마해 승리하며 유력 대선주자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범야권 통합과정에서 친노(친노무현) 세력이 대거 민주통합당에 합류하고, 이들이 조직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면서 손 전 대표는 또다시 2012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이란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 대선 이후 한동안 당 상임고문을 지냈고 2014년 7·30 재보선 당시 수원병에 출마했다 낙선한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낙향, 전남 강진 백련사 인근 토담집에서 2년간 기거해오고 있다.



    두 번의 경선 패배 트라우마

    손 전 고문의 지난 10년을 반추해보면 지금의 정치 지형, 특히 야권의 정치 지형은 10년 전 한나라당 대선 경쟁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세 사람의 대선 경쟁구도가 10년 만에 문재인, 안철수, 손학규 세 사람의 경쟁구도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다.

    20대 총선에서 문 전 대표는 호남에서 취약성을 보였고, 안 의원은 수도권 득표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 때문에 손 전 고문이 문재인도, 안철수도 마뜩찮아 하는 야권 지지층에게 대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얘기가 손학규 지지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실제로 손 전 고문이 호남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자신의 득표력을 입증하면 문재인, 안철수 두 대선잠룡을 뛰어넘는 제3의 후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번의 대선후보 경선 패배란 트라우마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더불어민주당(더민주)은 20대 총선 공천을 거치며 친노가 친문(친문재인)으로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국민의당은 안철수 사당화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가 더민주와 국민의당 어느 당을 선택하든 당내 경선이란 예선전을 통과하기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20대 총선 직후 손 전 고문은 지지자들에게 “판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판, 최소한 야권의 정치 지형은 그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친문, 친안(친안철수) 현상이 더욱 공고화되고 있다. 그가 정치 전면에 다시 나서더라도 내년 대선 본선에 자력으로 진출할 수 있을지 회의적 시각이 많다. 혈혈단신으로 정계에 복귀하는 그를 두고 야권 지지층이 문재인과 안철수를 뛰어넘는 대안으로 보지 않을 공산이 아직은 크기 때문이다.

    손 전 고문의 최측근으로 통하는 더민주 강훈식 의원은 “정치를 떠나 있지만 손 전 고문은 여전히 더민주 당원”이라며 “언제 어떻게 돌아올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지지자들 모임을 통해 변죽을 울리는 방식으로 복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의원은 또 “돌아올 때는 분명한 견해를 갖고 올 것”이라고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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