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2

2001.07.12

꺼지지 않는 생명력 ‘인순이’

  • <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 authodox@orgio.net

    입력2005-01-06 14: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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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지지 않는 생명력 ‘인순이’
    1978년의 늦은 겨울, 김소월의 시에 작곡가 안치행이 선율을 붙인 ‘실버들’이라는 노래를 3인조 여성 트리오 희자매가 발표했을 때, 어느 누구도 가운데에 선 리드 보컬리스트가 1988~90년대를 넘어 새로운 밀레니엄에까지 정력적인 활동을 펼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3인조 여성 보컬 그룹은 단박에 야간 유흥업소의 무대를 떠올리게 하는 지극히 통속적인 이미지를 가졌고, 언제나 그랬듯이 짧을 수밖에 없는 생명력의 한계를 지닌 채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의 개막과 더불어 솔로로 전향한 그녀는 마치 슈프림즈의 리더 다이애나 로스가 그러했듯이 자유자재의 테크닉으로 구사하는 압도적인 보컬과 열정적인 무대 매너,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변함없는 성실함으로 무대의 여왕에 등극한다. 사실 인순이의 기나긴 음악 이력에도 ‘밤이면 밤마다’ 정도를 제외하면 차트를 정복한 곡 리스트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장구한 디스코그래피를 뒤지다 보면 단순히 ‘열린 음악회용 가수’로 보기 어려운, 만만치 않은 음악적 응집력을 분만해 왔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80년대 두 장의 앨범, 즉 81년의 신중현 작곡집과 최성호가 프로듀스한 86년의 컨셉트 앨범 ‘에레나로 불리운 여인’은 다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전자는 발라드에서 댄스뮤직을 종횡무진하는 인순이의 보컬 뿌리가 바로 리듬앤블루스의 탁월한 해석력에 기초하였다는 것을 일찍이 알려주는 소중한 증거다(이 앨범에 수록한 신중현의 걸작이자 펄시스터즈의 출세작인 ‘떠나야 할 그 사람’은 오리지널은 물론 어떤 리메이크 트랙보다 압도적인 매력이 넘쳐흐른다). ‘에레나로 불리운 여인’은 비록 흥행에 실패했지만 험악한 쇼 비즈니스의 정글에서 내면으로부터 분출하는 진실을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담은 작품집이다. 그는 앨범의 표지에 이렇게 나직이 읖조렸다.

    “…문을 열어 주세요. 속박, 구속, 편견, 질시, 증오, 거짓, 위선이라는 이름의 어두침침한 동굴문을 이제는 그만 열어 주세요. 에레나는 내 우울한 유년, 어두웠고 어려웠던 시절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나를 온갖 속박으로부터 의식의 자유로움으로 인도케 하는 황금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어떤 순간, 어느 공간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그의 진실은 이렇게 한국 사회의 저주받은 존재로서의 숙명을 극복하기 위해 제련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맞은 21세기의 여명에 인순이는 이렇게 ‘my turn’이라는 새로운 앨범을 안고 돌아왔다. 머릿곡 ‘Tell me’는 손을 대면 델 것 같이 뜨겁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만든 강승원이 제공한 ‘사랑가’는 우리에게 뭉클한 생애의 통찰력을 던진다.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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