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2

2001.07.12

완두콩만한 알약이 세상을 바꿨다

임신공포에서 해방 새롭게 쓴 여성사 40년 … 생식 조절 능력 장악으로 모계사회 회귀 가능성도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 전원경/ 자유기고가 > winniejeon@yahoo.co.kr

    입력2005-01-05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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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두콩만한 알약이 세상을 바꿨다
    매년 7월11일은 세계인구의 날이다. 지난해는 전 세계인구 60억 명 돌파로 자축 아닌 반성의 계기가 되었지만, 올해 세계인구의 날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로 꼽히는 먹는 피임약 탄생 40주년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적 차원에서 인구 줄이기 총력전을 펼친 한국가족계획 40년이 되는 해다.

    산아제한 운동의 중심에 있던 대한가족계획협회는 정확히 1961년 4월1일 창립했다. 창립 당시 3%에 달하던 인구증가율은 30년 뒤 증가율 0.97%라는 경이로운 감소를 나타냈고 40년이 지난 지금 0.8%에 머물러 있다. 세상을 바꾸었다는 피임약 발명 40년과, ‘셋만 낳자’에서 ‘둘도 많다’를 정착시킨 한국가족계획 40년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올해를 먹는 피임약 탄생 40주년으로 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화학자 칼 제라시가 최초의 경구용 활성 프로게스틴인 노르에신드론을 합성하는 데 성공한 1951년을 기점으로 피임약 50주년을 말하기도 한다. 또 미국에서는 그레고리 핀커스가 피임약 에노비드 개발에 성공해 식품의약품관리국(FDA)의 승인을 받은 1960년을 기점으로 삼는다. 미국 일간지 ‘USA 투데이’는 지난해 피임약 개발 40주년 특집 기사에서 “아스피린처럼 유명하지도 않고 비아그라만큼 매스컴의 각광을 받지도 못했지만 먹는 피임약처럼 위력적인 약은 없다”고 표현했다. 1961년은 독일 쉐링사가 ‘아나보라’라는 유럽 최초의 경구피임약을 발매한 해다.

    어쨌든 먹는 피임약을 지난 세기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꼽는 데는 과학자·의사·석학들 모두 이견이 없는 듯하다. 세계 지성 110명이 선정한 인류의 위대한 발명 121가지에서도 경구피임약은 당당히 선발되었다(존 브록만이 엮은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 위스콘신 대학 마리아 레포스키 교수(인류학)는 먹는 피임약에 표를 던지면서 이 약이 혁명적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경구피임약의 등장으로 인류의 반이 스스로 회임을 조절하여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피임약은 인구폭발로 인한 재앙에서 지구를 지켜줄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 콜린 블레이크모어 교수(생리학)도 지난 2000년간 인류 문명을 바꾼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피임약을 꼽으면서 “비교적 낮은 수준의 기술로 만든 피임약이 빚어낸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인간의 육체가 마음의 시종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믿음이 강화된 점”이라 했다.



    현재 경구피임약은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여성이 사용하며 가장 안전한 피임방법으로 알려졌지만 출발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탄생 당시 이 약은 어디를 가든 논쟁거리였다. 논쟁의 핵심은 피임약 복용이 과연 도덕적인지에 있었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단체는 경구피임약으로 인해 보다 확실해진 ‘산아제한’을 강력히 반대했다. 예방적 차원의 피임까지도 낙태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수정 과정을 간섭하는 것’으로서 이는 신의 영역에 대한 모독이요,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경구피임약 개발 초기에 페미니스트들도 이를 반대한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일단 이 약을 복용했을 때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 모성보호 차원에서 문제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이로써 피임이 전적으로 여성의 책임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실제 초기 피임약은 메스꺼움이나 체중 증가 등 상당한 부작용을 동반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제약회사가 여성의 몸을 담보로 이득을 취한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일단 경구피임약을 사용해본 여성들은 다양한 부작용에도 체외사정이나 레몬을 묻힌 스펀지 삽입, 낙태와 같은 과거 피임방식으로 되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남성들 입장에서는 피임약 덕분에 자연스럽게 산아제한의 책임에서 벗어난 것을 환영했고, 낙태를 도덕적 이유로 반대한 의사들은 시술이 따로 필요 없는 경구피임약의 등장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피임’이라는 내밀한 문제가 세상을 과연 어떻게 바꾼 것일까. 여성학자들은 흔히 가장 개인적인 문제가 가장 정치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피임약이야말로 이 명제의 전형적인 사례다. 피임약의 등장이 가져온 1차적인 혁명은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의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1930년대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피임법은 체외사정과 콘돔, 자연주기법, 페서리 순이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권장한 배란주기를 계산해서 성관계를 갖는 자연주기법은 얼마나 실패율이 높았던지, ‘바티칸 룰렛’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처럼 룰렛 게임을 하듯 위험에 노출된 여성들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피임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여성은 신이 부여한 자손 번식의 의무를 거부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 되었다. 그리고 섹스는 생식의 차원에서 남녀 간 사랑을 확인하는 수단이자 최고의 쾌락으로 탈바꿈했다.

    또 피임약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작용했다. 여성들이 교육이나 직장 등 개인적인 이유로 임신을 미룰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 이런 적극적인 산아제한은 한 세기 만에 여성의 평균 인생주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전통적으로는 어머니들이 40대까지 계속 아이를 갖는 것을 당연시했으나 현대의 어머니들은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아이를 갖는다. 수명도 길어져 여성들은 출산을 종료한 후 생식 의무에서 해방된 채 또 다른 50년을 살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 여성들이 인생의 대부분을 자식 기르고 돌보는 데 소모한 것과 완전히 다른 삶이다(‘피임의 역사’).

    완두콩만한 알약이 세상을 바꿨다
    경구피임약은 유럽 6·8학생운동을 계기로 성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섹스와 피임을 공공연하게 거론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68년 7월 독일 주간지 ‘콘크리트’는 ‘먹는 피임약을 사용할 자유를 달라’는 제목의 기사로 파문을 일으킨다. 기사 내용 중 “미혼 여성에게 기꺼이 경구피임약을 처방할 의사들의 주소를 알려달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편집실에 편지가 쇄도할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여성들은 좀더 자유롭게 피임약을 구하고자 했다.

    그것은 성혁명의 시작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혼 여성들이 피임약을 사용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고, 결혼에 구속되기 싫은 독신 여성도 크게 늘었다. 이전 시대에는 서구사회에서도 혼외 정사를 무조건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겼으나 60년대를 지나면서 사람은 거꾸로 성적 욕구를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도록 억압 받는 것을 비도덕적이라 여겼다. 즉 도덕성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완화하고 도덕성 자체가 감성과 성적 욕구를 솔직히 표현하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된다(‘20세기에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이것은 산업사회를 지탱해 오던 가부장제를 무력화하기 시작했다. 이미 유럽에서는 결혼한 부부보다 동거 커플이 더 일반적 형태가 되었고, 아이를 낳지 않는 싱커스족(부부가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낳지 않고, 일찍 정년 퇴직해 노후생활을 즐기는 계층)도 늘고 있다. 이대로라면 21세기에는 가부장제가 완전히 붕괴하고 모계사회로 회귀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자손 번식’ 신의 사실 생식 조절능력을 갖는 것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경제학의 맬서스주의자들은 경제적인 배경으로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에마 골드먼, 마거릿 생어(이상 미국), 마리 스토프(영국)와 같은 여성운동가들은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산아제한을 적극 옹호했다. 생어는 “산아제한은 본질적으로 여성교육”이라고 말했다. 마침내 녹색의 완두콩만한 알약이 여성들을 임신의 공포에서 해방시켰고, 더 이상 애써 금욕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 피임 때문에 남편의 배려를 구걸할 필요도 없었다.

    이 신비한 알약은 거의 시차 없이 한국에 상륙했다. 가까운 일본이 99년에서야 경구피임약 시판을 허용한 것과 비교하면 이 신비한 발명품은 엄청나게 빨리, 그리고 별다른 저항 없이 우리 사회에 소개되었다. 한국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피임약 도입을 검토하던 1966년은 ‘가족계획 사업 성과 거양의 해’로 지정되어 루프시술 목표건수를 전년도보다 2배 이상 높여 잡은 해다. 2년의 임상연구 끝에 68년부터 피임시술사업과 병행하여 본격적으로 경구피임약을 보급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구피임약이 서구사회에서 치열한 논쟁 끝에 보급에 성공한 것과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감 없이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여성들은 고민 없이 거의 무료로 국가에게서 피임혜택을 받는 대신 ‘언제 아이를 낳고 얼마나 낳을 것인가’의 권리를 국가에 바친 셈이 되었다.

    “피임약을 복용한 후 소화불량·메스꺼움·구토증을 경험하고 부작용을 호소하는 일이 많았죠. 이런 부작용에 대해 정부 당국은 여성의 ‘마음 자세’를 거론하면서 인내심으로 극복하기를 호소했습니다. 즉 ‘먹는 피임약은 내가 꼭 필요에 의해, 나 자신을 위하고 가족을 조절하기 위해 먹어야겠다는 정신이 선 다음에 복용하면 부작용이 훨씬 적을 것’이라고 강권했죠.”

    ‘20세기 여성 사건사’(여성신문사 펴냄) 중 산아제한 문제를 다룬 ‘너무 많이 낳아 창피합니다’의 저자 소현숙씨(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는 “오로지 출산력 감소에만 관심을 둔 정부는 여성들의 안전에 대해 둔감했다”고 말한다.

    서구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보다 자유롭게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영 받은 경구피임약이, 한국 사회에서는 오히려 국가가 출산통제권을 장악하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소현숙씨는 이를 ‘출산 통제권을 둘러싼 정치투쟁’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근대 이후에는 출산의 통제권을 누가 가질 것인지를 둘러싸고 정치투쟁을 벌인다. 근대국가는 인구 통제의 한 방식으로 출산을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한편 여성들은 자신들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출산 통제를 여성의 이슈로 만들었다. 그리고 종교단체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내세워 낙태 반대운동을 벌였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인 출산을 놓고, 여러 세력들이 그 통제권을 전유하기 위한 싸움을 벌인 것이다”(‘20세기 여성 사건사’ 중에서). 한국 사회에서 최초의 승자는 국가였다.

    경구피임약은 수술 보조수단으로 보급되었지만 40년이 넘도록 한국 사회에서 입지를 넓히지 못하였다. 강권에 의해 피임약을 먹으면서 부작용까지 감수한 여성들은 지난 40년 동안 신기술이 부작용의 상당 부분을 극복했음에도 경구피임약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세대를 넘겨 전수한 것이다. 2.1%라는 저조한 사용률은 한국 사회에서 경구피임약이 갖는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낙태마저 피임의 일환으로 은근히 장려한 것 역시 적절한 피임기술을 활용하기보다는 쉽게 최후의 수단에 의존하는 습성을 만들고 말았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낙태를 억제하기 위해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는 담론이 지배적이었으나 60년대를 지나면서 가족계획을 위해서라면 낙태라도 해야 한다는 담론이 지배했다. 이처럼 무조건 ‘적게 낳자’를 강요한 가족계획사업은 87년 증가율 1% 달성(애초 93년 목표)을 계기로 89년 이후 산아제한 사업을 포기하면서 방향 전환을 한다. 그러나 인구증가 억제에는 성공했지만 성비 불균형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대한가족계획협회도 이런 한계를 인정하고 99년 3월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로 명칭을 변경한 후 사업의 목표도 수정했다. 협회의 신순철 홍보출판과장은 “단순히 산아제한을 넘어 청소년기의 성병예방이나 원치 않는 임신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피임 교육이라든가 출산을 종료한 여성 노인들의 건강문제 등 생식보건의 영역으로 전환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한국적 특수성에도 경구피임약의 발명은 보다 안전하고 다양한 피임기술의 발전을 촉진했고, 그만큼의 혜택이 여성들에게 돌아왔다. 호르몬 함량을 줄이면서 경구피임약의 부작용은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프랑스에서는 사후피임약 또는 응급피임약으로 불리는 RU486(성관계를 가진 후 72시간 이내에 먹는 피임약)을 아예 학교에서 나눠주며 ‘책임 있는 성’을 가르치는 단계로 발전했다. 그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왜 피임은 여성의 일로 남겨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도 남성용 경구피임약의 개발로 상당 부분 해결될 전망이다.

    경구피임약의 아버지로 불리는 칼 제라시는 “21세기에도 여성들은 피임약을 복용하겠지만 피임약이 가장 선호하는 피임수단은 아닐 것”이라 선언했다. 대신 ‘보조생식기술’(Assisted Reproductive Technologies)의 시대를 예고했다. 그는 자신이 쓴 희곡 ‘오점 없는 대리 임신’에서 앞으로 30년 이내에 아니 그보다 더 빨리 섹스와 임신이 완전히 구분되며, 여성은 원할 때 자신의 난자에 정자를 수정하고 수정란은 철저하게 유전적 검토를 마친 뒤 자궁에 넣어질 거라고 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생식의 시대가 시작함을 의미한다. 성교 없이도 생명을 낳는 시대에는 누가 생식 조절의 주도권을 쥘 것인가. 분명한 것은 여성이 피임으로 출산을 통제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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