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3

2000.07.20

정-재계 인사 막강 영향력 ‘易術 파워’

인생상담부터 인사 개입까지…최근엔 벤처-대기업 연결 ‘브로커’ 역할도

  • 입력2005-07-26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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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계 인사 막강 영향력 ‘易術 파워’
    최근 모 재선의원의비서진에 들어갔던 사람의 경험담 한 토막. “면접을 본다고 해서 의원회관 사무실에 갔더니 의원과 또 다른 사람이 한명 앉아 있었다. 의원은 가만히 있고 그 사람이 내 생년월일을 묻고 얼굴을 보더니 의원에게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역술인이었다. 그제서야 그 의원은 내게 ‘같이 일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의원은 일하는 사람을 구할 때마다 그 역술인에게 사주를 본다고 했다. 지금은 그 의원 방에서 나왔지만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 어이가 없다. 어떻게 의원회관에서까지 사람의 사주를 불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대대적인 당정개편설이 정가에 무성한 가운데 역술인과 무속인을 찾는 정-재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중용될 것 같으냐” “나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등 자신의 거취와 관련한 궁금증을 해결하려는 인사들이 부쩍 많아진 것. 남북관계의 급진전이 미칠 영향에 대해 알아보려는 사람들도 많다.

    ‘구권화폐 교환 사기사건’과 관련해 도피하다 지난 5월17일 검거된 장영자씨가 은신했던 곳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 역술원이었다. 지난 5월 고속철도 로비사건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로비스트 최만석씨와 호기춘씨는 역술인 한 모씨의 소개로 안면을 텄다. 이런 예에서 보듯 역술-무속인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본 바탕은 인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역술인이나 무속인의 경우 수십명의 정-재계 고위 인사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역술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처럼 A급에 속하는 역술인들은 100여명, 무속인들도 수십명에 이른다. 이들이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이들은 마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처럼 고객들의 어려움을 속속들이 알게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종의 구속력을 발휘하는 힘을 가진다. 관계가 조금 더 발전되면 고객들을 서로 연결해 주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가 있는 것.

    “친하게 지내는 청와대 한 인사가 어느 날 자신의 비서로 인해 골치가 아프다며 고민거리를 털어놨다. 그래서 내 고객 가운데 괜찮은 사람을 그 인사에게 소개해 청와대에 들어가게 해줬다. 물론 양쪽의 사주를 봐서 둘이 잘 어울리는지 등을 따져본 뒤였다. 이런 경우는 허다하게 있다.”(역술인 A씨)



    “잘 알고 있는 고객이 찾아와 ‘이런 사람 알고 있느냐’며 정-재계 고위인사들과 연이 닿는지를 묻는 경우가 있다. 수십년 이 일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가깝고 믿을 만한 사람인 경우 식사를 같이 하며 다른 고객에게 인사시켜 주기도 한다.”(역술인 B씨)

    일부 역술인이나 무속인의 경우 이런 과정에서 나름의 ‘이득’을 챙기는 것도 흔한 일이다.

    정-재계 인사들이 역술인이나 무속인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속인 단체인 대한승공경신연합회(약칭 경신회) 최수진 사무총장은 “그들이 갖고 있는 예언력과 신도들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최총장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회지도층 인사가 신도회장을 맡은 곳도 있다”며 “수천명의 신도를 두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이들로부터 듣고자 하는 것은 대략 이런 내용들이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어느 당, 어느 지역에 출마해야 당선되겠느냐’는 것이 가장 많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인사들의 경우 ‘어느 당으로 들어가야 정치 생명이 길겠느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몇 군데 있을 경우 어느 쪽으로 가야 잘 풀리겠는지, 계파간 세력 다툼이 치열할 때는 누구를 지지해야 정치적으로 득이 되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많다. 무속인들의 경우 선거전이 치열할 때는 ‘당선되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 경우도 있다. “경합 지역 같은 경우 기도를 하면 당일 운세 판도가 달라져 당락에 영향을 미친다. 지난 총선 때도 두 명의 후보로부터 부탁을 받았다”고 한 무속인은 전했다.

    정치인 C씨. 현정부에서 청와대에 근무했던 이 인사는 지난해 초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한 무속인에게 “청와대 생활이 너무 힘들다. 보궐선거에 출마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 무속인은 “출마하면 안 된다. 청와대에 그냥 있어라. 조만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며 극구 만류했다. 이 무속인의 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출마하지 않았고, 몇 개월 뒤에는 행정부에 진출해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무속인은 C씨에게 인사 문제를 청탁, 한 신도를 좋은 자리로 옮겨주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이나 재계의 일부 인사들은 이들의 영향력을 알고 “누구와 친하지 않느냐. 좀 만나게 해달라”며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런 일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면 성사되기가 쉽지 않다. 구설수에 오를 것을 염려해 “모른다”고 잡아떼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김현철씨가 역술인 오재학씨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돌자 많은 인사들이 오씨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섰다는 것은 정가에 널리 알려진 얘기다.

    최근 역술-무속인들이 아이디어와 돈을 연결시키는, 일종의 컨설턴트나 ‘브로커’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사회상의 변화를 실감나게 해준다. ‘대박’을 꿈꾸며 벤처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자금난에 허덕이다 묘수를 찾아 문을 두드리고, 역술-무속인들은 기존 고객 가운데 돈이 있는 대기업 인사들을 이들에게 소개해 주는 것. 서울 평창동에서 ‘도광사’를 운영하고 있는 무속인 심진송씨는 “고민 속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는 한식구로서 서로가 사는 상생의 길을 찾아주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증권업계 사람들도 최근 들어 자주 점집을 찾는 쪽에 들어간다.

    현재 전국적으로 역술인은 30여만명, 무속인은 20여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서울 역삼동에서 백운산 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역술가 백운산씨는 “30년 동안 나를 찾아온 사람이 1000만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한국역술인협회 박형용 사무총장은 “우리 국민의 70% 이상이 점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박총장은 “고위 인사들일수록 자신이 역술이나 무속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고 전했다.

    이들 무속인이나 역술인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보니 정치권에서도 이들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민주당은 올해 초 직능국에서 한국역술인협회 등 세 개의 단체와 간담회를 가졌다. 민주당 김선문 직능국장은 “모든 직능단체를 만나는 것이 우리 임무여서 만났을 뿐”이라고 그 의미를 축소했다. 역술-무속인들은 “우리 단체들을 사단법인화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단체 통합을 전제로 한 이들의 사단법인이 성사될 경우 이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김국장은 “다른 종교단체들이 반대하고 있어 쉽지는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국가정보원은 아예 이쪽 담당자를 두고 널리 알려진 역술인이나 무속인들을 챙기고 있다. 중요 현안이 불거질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며 자문하기도 한다. 여론을 조성하거나 진정시키는 데 이들이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96년 여름, 외국 왕실의 초청을 받고 출국을 위해 김포공항에 나갔던 한 무속인은 깜짝 놀랐다. 국정원 담당자라며 한 사람이 찾아와 “잘 다녀오시라”고 깍듯이 인사를 했기 때문. 그는 이 무속인이 귀국한 뒤에도 “잘 다녀오셨냐”며 정중하게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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