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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콩고 난민들

목숨 건 탈출 … 희망 없는 유랑생활

내전 피해 케냐로 다시 한국으로…20명 경기도 안산 지하 셋방서 숨죽인 나날

목숨 건 탈출 … 희망 없는 유랑생활

목숨 건 탈출 … 희망 없는 유랑생활
한국의 콩고 난민들미국 난민위원회는 지난 6월13일 전쟁과 박해 등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빼앗긴 전세계 난민 수가 무려 3500만명(99년 기준)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는 7년 만에 처음 증가세로 돌아선 수치. 냉전 종식으로 사상-이념 갈등에 따른 대규모 분쟁이 거의 사라진 것과는 달리, 지방 군벌이나 정치지도자들 간 권력쟁탈전에서 비롯된 내전이 쉼없이 발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폭증하는 난민 문제는 세계 각국에서 뉴 밀레니엄의 핫 이슈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국엔 적어도 법적으로 난민 지위를 얻은 ‘공식적 난민’이 단 1명도 없다. 정치적 핍박과 전쟁의 공포에서 탈출한 상당수 외국 난민들이 한국땅에서 ‘그들만의 슬픔’을 남몰래 눈물로 삭이고 있는 현실을 아는 한국인 또한 거의 없다. ‘주간동아’는 극심한 내전을 피해 탈출한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난민 20명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최근 확인 취재했다. 콩고 난민의 실상이 국내 언론에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

7월5일 밤 10시 경기도 안산시 K동의 한 낡은 빌라. 기자가 이 건물 지하 셋방에 들어서자 쾨쾨한 곰팡내가 훅 끼쳐왔다. 곧이어 온통 새까만 피부의 전형적인 아프리카인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잔(24)이라는 이름의 콩고인. 4평 남짓한 허름한 방엔 잔의 ‘동포’ 19명이 침침한 형광등 불빛 아래 얼굴을 맞대고 옹기종기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들은 모두 3년째 계속 되고 있는 콩고 내전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온 난민들. 남자 16명, 여자 4명. 이중엔 어린아이도 둘 있었다. 이들에게 대뜸 “조국이 그립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스스로 난민 처지가 되고픈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조국이 그립다. 하지만 콩고엔 절대로 가지 않겠다. 평화가 오지 않는 한 …. 콩고에선 반군들이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강제 징집해 전쟁터로 끌고 간다. 심지어 열 살짜리 사내아이를 마약에 취하게 한 뒤 끌고 가는 것도 목격했다. 불응의 대가는 죽음일 뿐이다. 우린 죽음이 두려워 탈출한 것이다.”

대화의 대부분은 이들의 리더격으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잔을 통해 이뤄졌다. 잔은 기자가 던진 질문에 대해 동료들과 프랑스어(한때 프랑스 식민지였던 콩고는 콩고어 외에 프랑스어를 널리 쓴다)로 얘기한 다음 그 내용을 다시 영어로 통역해 들려줬다. “우리를 제발 콩고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소연하는 그들의 눈빛엔 공포감이 서려 있었다.



콩고 내전은 카빌라 현 대통령이 지난 97년 독재자 모부투 정권을 쿠데타로 축출하는 과정에서 인접국 군대의 힘을 빌린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카빌라를 지원했던 르완다와 우간다의 반군들은 쿠데타 이후에도 콩고를 떠나지 않고 카빌라에게 ‘반대 급부’를 요구했고, 카빌라가 이에 불응하자 98년 콩고 동부지역을 점령한 뒤 카빌라 정부를 공격했다. 이에 카빌라는 인접한 짐바브웨와 앙골라, 나미비아의 병력을 끌어들여 반군에 대응, 결국 콩고가 6개국이 각축하는 혼란의 전장으로 변하면서 민간인의 희생이 잇따르고 있는 상태다. 난민 중 비웨사(24)와 마누엘(33) 역시 “아버지를 내전 때문에 잃었다”고 했다.

콩고 난민들의 전직은 축구 클럽 선수, 간호사, 상인, 국영방송 기자 등 다양했다. 모두 기독교인으로 콩고 현지에선 중산층에 속했다고 한다. 잔은 “일단 육로로 케냐까지 간 뒤 현지 외국 선교사들이 마련해준 여권과 여행비자를 이용해 항공편으로 ‘검은 대륙’을 벗어났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은 왜 하필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머나먼 동쪽 나라를 찾아왔을까. “콩고에선 한국인의 선교활동이 활발해 한국이 전혀 낯선 나라라는 선입감이 들지 않았다. 우리도 기독교도인 만큼 지금도 한국 교회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한국에 들어온 시기가 제각기 다른데도 20명이 한데 모일 수 있었던 것도 교회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이들이 지금 거주하는 12만원짜리 월세방 두 개도, 몇 안 되는 가재도구와 옷가지도 안산의 몇몇 교회를 통해 얻었다. 이날도 누군가가 가져다놓은 듯한 라면 한 상자가 중고 세탁기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콩고 난민들은 ‘기약 없는’ 하루하루를 버텨내느라 무척 지쳐 보였다. 어른 두 명이 누우면 딱 맞을 크기의 좁은 방. 요를 깔아놓은 바닥은 습기로 가득 차 있었고 방 옆 세면장은 위층에서 떨어지는 하수로 악취가 풍겼다. 이 ‘감옥 같은’ 방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하루 세 끼 밥을 지어먹고 동네 놀이터에서 하릴없이 놀거나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는 일. 이들 중 8명은 한 달에 68만원씩 받기로 하고 인근 공장에서 잡일을 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업주가 불법체류자 단속을 두려워해 2주 만에 쫓겨났다. 콩고 동부지역 고마시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강제 징집을 피해 2년 전 가장 먼저 한국에 온 푸투루(29)는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두 아이의 생사조차 모른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올해 입국한 12명도 ‘오늘 같은 내일’의 반복을 감당하기가 벅찬 듯했다. 한 달 전 가족을 이끌고 온 전기기술자 마누엘의 두 아이(3세, 6세)는 한국의 ‘낯선 여름’에 지친 듯 때에 절은 매트리스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떨구고 침묵하고 있던 이들은 “주한 콩고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해본 적이 있느냐”는 기자의 마지막 물음에 갑자기 불안에 떨며 “절대 연락하지 말라. 콩고로 송환되는 즉시 우리는 죽임을 당한다. 한국정부가 허용해 준다면 언제까지나 한국에 남고 싶다”며 애원했다.

이들은 외국으로 탈출하기만 하면 법적으로도 난민이 되는 줄 알고 있다. 이것이 난민의 현실이다.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선 입국 60일 이내에 난민신청을 해야 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외국인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이날 안내를 자청한 난민인권 운동가 최황규씨(37·외국인 난민돕기 국제NGO 결성위원장)는 “난민 문제에 대해 국내법은 지나치게 엄격하다”며 “누가 봐도 난민임이 뚜렷한 이들이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계속 관계당국에 요청할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최씨의 도움으로 난민신청을 하더라도 이들이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세계 130여개국이 가입한 세계난민협약에 가입한 것은 지난 92년. 이후 7월 현재까지 난민신청을 낸 외국인은 모두 72명이지만 아직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경우는 전무하다. 41명은 이미 불허 판정을 받았고 23명은 심사 중이다. 일부는 신청 자체를 철회했다.

이번 콩고 난민 소식을 접한 법무부의 입장은 기자의 예상대로 완강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국내엔 현재 15만명의 불법체류자가 있다. 난민 지위를 쉽게 인정해버리면 그들마저 앞다퉈 난민신청을 할 우려가 있다”며 “난민임을 입증할 의무는 원칙적으로 신청자에게 있다”고 못박았다. 자칫 난민신청을 악용할 사례가 생길 소지가 있다는 것이 법무부의 논리다.

난민의 국제적 보호기능을 맡고 있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연락사무소(서울)의 입장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곳 관계자는 “최씨를 통해 콩고 난민의 존재를 최근 들은 적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UNHCR는 스스로 찾아와 난민신청을 한 외국인에 대해서만 난민 심사를 해줄 뿐 직접 그들을 찾아가 조사할 의무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이 박해로부터 벗어나 망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서는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자’들의 권리가 쉽게 인정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한국에 ‘난민 1호’가 탄생할 날은 언제인가.



주간동아 2000.07.20 243호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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