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대(代)를 이은 현금살포 중독, 국가 부도에도 ‘NO답’ 사태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 12일 만에 “사실상 디폴트” 선언, 외채 늘어도 연금 올리고 전임자에 책임 떠넘겨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0-01-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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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웃고 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웃고 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실]

    “우리는 현재 ‘사실상 디폴트(virtual default)’ 상태에 빠져 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12일밖에 안 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2019년 12월 22일 아메리카TV에 출연해 경제 위기상황을 밝히면서 솔직하게 고백한 내용이다. 좌파 출신인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현재 경제 상황은 2001년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며 “2001년 당시 빈곤율이 57%였으며 현재는 41%에 달한다”고 밝혔다. 

    2001년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1000억 달러의 부채에 대한 디폴트(채무불이행 또는 국가부도)를 선언했던 해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입에서 디폴트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2019년 12월 20일 만기가 돌아온 90억 달러의 단기부채를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첫 번째 내린 조치는 이 단기부채의 상환을 2020년 9월까지 일방적으로 연기한 것이다. 그러자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아르헨티나의 국가신용등급을 ‘제한적 디폴트’ ‘선택적 디폴트’로 각각 강등했다. 


    아르헨티나 국가부채는 현재 국제통화기금(IMF)에 갚을 돈을 포함해 국내총생산(GDP)의 90%인 3350억 달러(약 384조870억 원)나 된다(그래프1 참조). IMF는 2018년 10월 아르헨티나에 57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이 가운데 440억 달러를 지급했다.

    소요 사태 막으려는 응급처방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왼쪽)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통령이 손을 흔들고 있다. [FDT]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왼쪽)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통령이 손을 흔들고 있다. [FDT]

    아르헨티나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세계은행은 아르헨티나의 2019년 경제성장률이 -3.1%를 기록할 것이라 보고 있으며, 물가상승률과 실업률도 각각 55%와 10.5%에 달하고 있다. 미국 달러화 대비 페소화 가치는 60%나 폭락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비상경제조치를 담은 ‘사회적 연대와 생산 활성화법’을 의회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이 법의 내용을 보면 △모든 외환 거래에 30% 세금 부과 △개인의 달러 매입을 한 달에 200달러로 제한 △농산물 수출세와 자동차 판매세 인상 △고가 자산에 대한 세금 인상 등 증세 조치를 담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런 증세 조치가 상류층과 중산층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문제는 부족한 정부 재원을 확충하고자 증세로 거둔 자금을 공공요금 6개월 동결과 연금 수급자에게 1만 페소 추가 지급 등에 투입한다는 것이다. 알레한드로 바놀리 사회복지청장은 “정부의 목표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면서도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엄청난 채무를 갚을 돈도 부족한데 증세로 거둔 자금을 복지 확대 비용으로 지출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조치는 2001년 경제난으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재발되는 것을 막으려는 응급처방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비상경제조치에도 IMF와 채무 조정에 실패할 경우 올해 국가부도를 선언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경제가 파탄 난 것은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이 시한폭탄을 넘겨줬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마크리 전 대통령에게 떠넘겼다. 중도우파인 마크리 전 대통령은 IMF와 협상에서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재정적자의 절반 축소를 약속했다. 이에 따라 마크리 전 대통령은 복지 지출 축소와 보조금 삭감 등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게 된 아르헨티나 국민은 2019년 10월 실시된 대선에서 마크리 전 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아르헨티나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서 낙선한 것은 마크리 전 대통령이 처음이다. 

    마크리 전 대통령은 2015년 취임 이후 친시장정책과 긴축정책을 통해 경제 살리기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그 이유는 2007~2015년 집권했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크리스티나) 전 대통령의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 때문에 경제가 거덜 났기 때문이다. 루이스 토넬리 부에노스아이레스대 정치학과 교수는 “마크리 전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는 이미 길거리에서 피 흘리는 환자였다”며 “진단할 시간은커녕 긴급 수혈이 필요했는데 제대로 된 정책을 쓰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8년간 철저하게 포퓰리즘 정책 추진

    아르헨티나 국민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에 따른 긴축정책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텔레수르]

    아르헨티나 국민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에 따른 긴축정책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텔레수르]

    4년 전 마크리 전 대통령에게 패했던 크리스티나 전 대통령은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당선하면서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두 사람은 성은 같지만 친척관계는 아니다. 크리스티나 전 대통령은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영부인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2007년 남편을 대신해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했다. 선거로 뽑힌 아르헨티나 첫 여성 대통령인 크리스티나 전 대통령은 2010년 남편이 사망한 후 2011년 연임에 도전해 성공했으며, 집권 8년간 철저하게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했다. 민간기업을 대부분 국영화했으며 공무원 수를 2배로 늘렸다. 특히 연금 지급 조건을 완화해 2005년 360만 명이던 연금 수급자가 크리스티나 전 대통령 퇴임 해인 2015년 8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500만 대의 노트북컴퓨터를 공짜로 나눠줬고, 축구광이 많은 국민을 의식해 축구 TV 중계료 지원에 세금을 사용했다.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려 페소화를 마구 찍는 바람에 물가가 매년 30% 이상 치솟았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 국가부채는 2011년 2054억 달러에서 2016년 2955억 달러(약 341조5980억 원)로 대폭 늘어났다. 과다한 복지재원 지출로 국가경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르헨티나가 올해 디폴트를 선언하면 9번째 국가부도 상황을 맞게 된다. 지금까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횟수가 30차례에 달하는 아르헨티나의 몰락은 특정 정권에 책임을 물을 정도로 일시적인 현상은 아니다(그래프2 참조). ‘아르헨티나 병(病)’의 원인은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의 원조는 1946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안 도밍고 페론과 영부인 에바 페론이었다. 후안은 1943년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고, 1944년 군사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배우 출신인 에바는 후안과 결혼해 영부인이 됐다. 에바는 남편을 도와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한 각종 포퓰리즘 정책을 적극 추진해 ‘빈민의 성녀’라는 말까지 들었다. 후안이 집권하던 1946~1955년, 1973~1974년의 포퓰리즘을 페론주의라 부른다. 페론주의는 외국자본 배제, 산업 국유화, 복지 확대, 임금 인상을 통한 노동자 소득 증대 등 좌파 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을 말한다. 후안과 에바는 자유시장 경제였던 국가시스템을 사회주의로 바꾸면서 외국 자본을 몰아내고, 철도·전화·가스·전기 등 기간산업을 국유화했으며, 노동자들의 임금을 매년 25%나 올리는 등 현금을 살포했다. 이들의 정책은 빈부 격차를 일시적으로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르헨티나 경제는 지나친 재정 지출 등으로 서서히 침몰했다.

    20세기 최대 경제 실패 사례

    아르헨티나 여성 수백 명이 에바 페론 전 영부인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메르코프레스]

    아르헨티나 여성 수백 명이 에바 페론 전 영부인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메르코프레스]

    아르헨티나는 193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 세계 6위, 교역량 10위의 선진국이었다. 팜파스로 불리는 비옥한 초원에서 생산되는 대두(콩)와 밀·옥수수·쇠고기 등을 수출해 국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 덕분에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발전론의 대가 사이먼 쿠즈네츠는 “전 세계에는 선진국과 후진국, 일본, 아르헨티나 등 네 가지 유형의 국가가 있다”며 “한 세기 내에 선진국에 진입한 유일한 국가가 일본이고, 그 반대가 아르헨티나”라고 지적했다. 영국 경제 전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20세기 경제의 최대 실패 사례는 아르헨티나”라고 평가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복지의 달콤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아르헨티나 국민이 선거 때마다 페론주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맛을 본 국민이 이를 쉽게 끊지 못하는 이유는 마약 중독과 같이 고통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철저한 페론주의 추종자인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크리스티나 부통령이 국민의 입맛에 맞게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할 경우 아르헨티나는 또다시 국가부도라는 나락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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