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걸스데이’ 혜리가 서울 논현동 임피리얼 팰리스 서울에서 열린 SBS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 혜리는 MBC 예능프로그램 ‘일밤-진짜 사나이’에 출연해 애교로 큰 인기를 끌었다.
본격적인 ‘애교 열풍’은 걸그룹 걸스데이 멤버 혜리로부터 촉발됐다. 2014년 9월 군대 생활을 다룬 MBC 예능프로그램 ‘일밤-진짜 사나이’에서였다. 훈련 마지막 날 군대 교관이 “울음 그칩니다!”라고 다그치자 혜리는 “이이잉~” 하며 울먹였고 혜리의 애교는 그날로 ‘대박’이 났다.
방송이 나간 직후 혜리는 광고주들의 섭외 1순위가 됐고 모델료 2억 원의 톱스타 자리에 올라섰다. 혜리는 지난해 12월 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광고를 찍을 때마다 애교를 떨라고 주문받는다”며 ‘애교 매력녀’의 이미지를 굳혔다. 혜리가 나오는 ‘너구리’ ‘알바몬’ 광고에는 혜리가 “잉~” 하며 애교를 떠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온라인도 애교 열풍으로 뜨겁다. 인터넷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서는 한국민속촌(민속촌)의 ‘구미호’ 영상이 화제다. 민속촌에서 ‘알바’(시간제 근로)로 ‘구미호’를 연기하는 이정후 씨는 귀여운 연기로 누리꾼을 사로잡았다. 이씨는 ‘민속촌 구미호 알바의 애교’ 영상에서 어깨를 흔들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오빠 당연히 ‘원샷’이겠죠? 원샷!” 2월 2일 올라온 이 영상은 누리꾼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3월 25일 현재 조회 수 98만7000건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민속촌은 “이씨의 애교 부분만 편집해 올려달라”는 누리꾼의 주문이 폭주하자 “오빠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앙~” 하며 애교를 부리는 부분만 따로 편집한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사람들, 특히 남성이 애교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사원 이모(40) 씨는 “여성이 애교를 부리면 마음이 두근거린다. 특히 혜리의 애교는 순수하고 귀여워서 좋다”고 말했다. 사업가 남모(30) 씨는 “여성의 애교는 나를 위한 배려로 여겨진다. 일부러 귀여운 행동을 해주는데 고맙지 않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무뚝뚝한 여자보다 애교스러운 여자와 함께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애교는 남녀 간 갈등 해소 장치
서울 CGV 압구정에서 열린 영화 '고령화가족' 제작보고회에서 배우 진지희가 ‘귀요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남성들의 욕구를 파악한 걸까. 여성의 눈 밑 ‘애교살’ 시술은 대부분의 성형외과에서 받을 수 있다. 각 성형외과들은 눈 밑에 볼록 튀어나온 애교살을 강조하는 ‘애교 필러’라는 시술을 하고 있다. 서울 청담동 스마일성형외과의원의 정우철 원장은 “웃을 때 눈매가 도드라지길 원하는 사람이 ‘애교살 필러’ 시술을 받는다”면서 “도톰한 애교살은 귀엽고 어려 보이는 느낌을 주는 필수조건이며 특히 미소 지을 때 매력 포인트”라고 설명했다. 애교살을 원하는 이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각 성형외과 인터넷 홈페이지 뿐 아니라 포털사이트에도 애교살에 대한 문의가 훌쩍 늘어났다.
화장도 ‘애교 메이크업’이 대세다. 화장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눈웃음이 돋보이는 아이라인 그리는 법이 넘치고, G마켓 등 온라인 쇼핑몰에는 눈 밑에 일회용으로 붙이는 ‘애교살 테이프’까지 등장했다. 이렇게 애교는 문화 현상을 넘어 시장 상품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애교가 이토록 사회적 열풍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문화는 현실의 결핍을 반영한다”며 “심리적으로 위축된 남성들이 바라는 이상형이 애교 있는 여성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요즘 한국은 남성의 정체성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 TV를 보면 자상한 아빠, 능력 있는 남편, 지적이고 요리도 잘하는 남자가 멋진 사람으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현실에서 이렇게 만능인 남자는 없다. 이런 경우 자신을 편하게 해주고 원하는 대로 따라줄 것 같은 여성은 어떤 유형일까. 바로 어리고 애교스러운 여자다.”
연예인의 애교스러운 행동은 이미 일본에서 시장성이 검증됐다는 분석도 있다. 나약하고 온순한 남성을 뜻하는 ‘초식남’의 증가가 귀엽고 순종적인 이미지를 가진 여성의 인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헌식 평론가는 “‘귀요미 문화’는 오래전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 TV 방송에서 애교를 부리는 여성 연예인이 금세 인기를 얻었고, 그들이 ‘잘 팔린다’고 입증됐기 때문에 한국에 도입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불황일수록 애교가 잘 팔린다
한 성형외과 의원의 눈 밑 ‘애교살’ 시술 안내문.
“요즘처럼 사회적 성공의 문이 좁을수록 남녀는 능력 대결을 하게 된다. 이때 여성의 능력이 높으면 남성은 여성에게 위협을 느끼고 여성을 불편하게 여길 수 있다. 따라서 남성은 자신이 쉽게 지배할 수 있고 다루기 쉬운 어리고 애교스러운 여성에게 호감을 느낀다. 지금의 현상은 남성 개개인이 여성의 귀엽고 연약한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 사회 전체로 퍼진 결과다.”
애교를 소비하는 문화가 과열되면 ‘성숙함’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신경아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는 젊고 어린 것에 대한 열망이 지나치다”며 “애교는 어린아이의 영역이며 모든 여성이나 성인이 애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에게는 나이에 맞는 성숙함이 있다. 지나치게 ‘애교의 미덕’을 강조하면 애교스럽지 않은 성인 여성 대다수는 혼란스러울 테고, 그 사회는 바람직하게 성장하기 어렵다. 한국이 고령 사회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애교’만 강조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10대의 개성은 인정하되 그들이 성숙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어른들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