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오후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넥센의 경기 1회 말 2사 1루 상황에서 넥센 박병호가 중월 투런 홈런을 날리고 타구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2003년 야구장에 등장한 잠자리채는 외신에 소개될 정도로 진풍경이었다. 당시 관중은 일본 왕정치(오 사다하루)의 55호를 뛰어넘어 아시아 홈런 신기록에 도전하는 삼성 이승엽의 홈런 공을 잡으려고 잠자리채를 열심히 흔들었다. 시즌 말 각 팀의 치열한 순위 다툼보다 이승엽의 홈런 하나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다시는 깨지기 힘들 것으로 보이던 이승엽의 56호 홈런 기록에 박병호가 도전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56호뿐 아니라, 지난해 일본 야쿠르트 블라디미르 발렌틴(30)이 세운 새로운 아시아 기록 60개도 뛰어넘을 수 있는 기적 같은 페이스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정교한 타격 이승엽과 박병호의 괴력
박병호는 6월 24일까지 64경기에서 홈런 27개를 쳤다. 한 경기 평균 0.42개 홈런이다. 올 시즌 프로야구는 팀당 128경기를 치른다. 산술적으로 올 시즌 박병호의 예상 홈런 개수는 54개다. 2003년 이승엽은 131경기에서 56개 홈런을 쳤다. 경기당 평균 홈런은 0.43개였다. 최근 숨고르기를 하고 있지만, 6월 중반까지 시즌 60홈런 레이스를 달리고 있었다. 박병호는 하체와 손목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타자로 몰아치기에 능해 후반부 다시 한번 대기록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2014시즌은 9개 구단 체제로 경기 수가 128개로 축소됐다. 홀수 구단이기 때문에 팀별로 돌아가며 나흘씩 휴식을 취한다. 그만큼 에이스 투수가 자주 등판할 수 있고 야수들은 컨디션 유지에 애먹을 수밖에 없다.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 도전에 여러 장벽이 많은 시즌이다. 그만큼 박병호의 페이스는 놀라움 그 자체다.
야구장마다 잠자리채가 흔들리고 드디어 56호 홈런이 터졌던 2003년 이승엽은 27세 프로 9년 차였고, 박병호는 17세 고교 1학년이었다. 11년이 지난 2014년 박병호는 당시 이승엽과 비슷한 나이인 28세가 됐다. 메이저리그에서는 타자 전성기를 30세 전후로 본다. 동양권에서 홈런 타자의 평균 전성기는 20대 후반이다. 강력한 손목 힘과 단단한 하체가 받쳐주는 몸과 기술적 완성도가 정점에서 만나는 시기다.
이승엽과 박병호는 같은 홈런 타자지만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이승엽이 외국인 선수도 감탄하는 정교한 타격 기술과 힘 배분에 능하다면, 박병호는 메이저리그 스타일의 파워히터다. 그 차이만큼 프로 데뷔 초반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렸다.
이승엽은 1995년 프로 데뷔 첫해 121경기에 출전하며 확실한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두 번째 시즌인 96년 처음으로 3할 타율을 달성했고(0.303), 세 번째 시즌인 97년 첫 30홈런(32호)을 치는 등 삼성 간판스타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힘 하나는 최고, 그러나 기술적인 부분이 뒤처진다. 저렇게 사라지는 유망주가 어디 한둘인가.’ 5시즌 전까지 박병호에게 따라다녔던 평가다. LG는 2005년 성남고 박병호를 1차 지명하고 계약금 3억3000만 원을 안겼다. 그러나 성장은 더뎠다.
고교 시절 알루미늄배트로 4연타석 홈런이라는 괴력을 선보였지만 나무배트를 쓰는 프로 무대는 전혀 달랐다. 특히 고교 투수와는 수준이 다른 프로 투수의 현란한 변화구는 힘만으로 대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박병호는 2011년 넥센으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1할 타율을 기록한 해가 3시즌, 가장 많은 홈런은 2009년 9개가 다였다.
하지만 트레이드는 새로운 기회였다. 최고 인기 구단인 만큼 매년 성적에 대한 압박이 컸던 LG와 달리 넥센은 더 오래 기다려줄 수 있는 팀이었다. 당시 김시진 감독은 “삼진을 100개씩 당하거나 말거나 중심 타선으로 쓰겠다”고 말했다.
2003년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세운 삼성 이승엽이 3루 불펜에서 양일환(왼쪽), 류중일 코치(오른쪽) 등의 축하를 받고 있다. 그물 뒤의 팬들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박병호의 강점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홈런을 만들어 타격 페이스의 기복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목동구장의 전광판을 넘기는 비거리 145m의 초대형 홈런을 때리는 등 무시무시한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올 시즌 목동 장외홈런만 벌써 4개다.
비거리 124m, 목동 장외홈런만 4개
박병호는 27개 홈런 중 홈 목동에서 20개를 기록했다. 목동은 홈플레이트에서 펜스까지 길이가 좌우 98m, 중앙 118m로 프로야구 메인 구장치고는 작은 편이다. 그러나 박병호의 홈런 평균 비거리는 124.25m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서울 잠실구장의 가운데 펜스가 125m인 점을 감안하면 원정경기에서도 꾸준히 홈런을 추가할 수 있다.
물론 60호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려면 넘어야 할 벽이 많다. 2003년 이승엽에게는 확실한 페이스메이커이자 훌륭한 라이벌이던 현대 심정수가 있었다. 심정수는 2003년 53개 홈런을 쳤다. 시즌 중·후반까지 이승엽과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큰 자극이자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었다. 현재 홈런 2위는 팀 동료인 강정호(19개), 3위는 NC 에릭 템스(18개)다. 심정수 같은 구실을 기대하기에는 레이스가 많이 뒤처져 있다.
타선은 9명 타자가 이루는 하나의 선이다.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받쳐주는 동료가 없으면 좋은 기록을 세우기 어렵다. 투수에게는 볼넷이라는 피해갈 수 있는 무기도 있다.
2003년 이승엽은 삼성 3번 타자였다. 4번 마해영은 38개 홈런, 5번 양준혁은 33개 홈런을 쳤다. 이승엽 뒤에 합산 71개 홈런을 기록 중인 4, 5번 타자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투수 처지에서 볼넷을 내주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타선이었다. 그만큼 정면승부가 많았다.
박병호에게도 강정호라는 든든한 5번 타자가 있다. 시즌 말까지 지금처럼 버텨준다면 대기록 도전도 가능하다.
이승엽과 박병호를 키운 박흥식 롯데 타격코치는 “지금 같은 모습이면 박병호가 이승엽의 기록을 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기만의 풀스윙을 완벽하게 하고 있다. 맞으면 웬만한 건 다 넘어간다”고 말했다.
대기록 도전에 대해 박병호는 “고교 때 이승엽 선배를 응원하는 잠자리채 풍경을 봤다.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처럼 관중이 열광하는 모습을 꼭 다시 보고 싶다”는 말로 기록 도전 의지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