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1세 고난의 역사를 간직한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강제동원 희생자 위령탑.
이어서 ‘‘기억’이라는 컬렉션을 현재화하기’라는 주제로 발표한 박신의 경희대 교수는 “기념관은 역사적 교훈을 전파하고 그것의 현재와 미래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역사적 기억’의 현재화와 문화 체험 가능성, 국제성 등을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 75년을 맞는 올해, 제8회 재외동포NGO대회가 8월 4∼11일 러시아 사할린에서 열렸다. KIN(지구촌동포연대)과 사할린주한인협회가 공동 주최한 이번 대회는 코르사코프, 브이코프 같은 역사 현장 방문과 함께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후세에 제대로 전하기 위한 자료관 및 위령시설 건립과 관련해 국제워크숍을 진행했다. 워크숍에는 한국과 일본의 재외동포NGO대회 참가자는 물론 남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 포로나이스크 등지에서 모여든 한인동포 250여 명도 함께해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사할린 한인동포를 대표해 임용군 사할린주한인협회 회장은 “사할린 한인이 간직한 고난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라면서 “아직까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던 대한민국 국적 회복도, 보상다운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임 회장은 이어 “역사기념관 건립으로 사할린 한인의 아픔과 상처, 피와 눈물과 땀의 가치를 인정받고, 다음 세대로 불행이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며 “짓밟히고 빼앗긴 역사를 회복하기 위한 전시공간은 물론 민족 언어와 전통문화 예법을 전수하고, 청소년들의 문화·체육·창작·교류를 도모하며, 동포 노인들의 복지를 위한 공간도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국적 미회복, 보상도 지지부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6명도 동포들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2년 전 사할린 동포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겠다며 이곳을 찾았던 이상희, 손영실 변호사는 8월 6일, 2년여 준비 끝에 동포들을 대리해 관련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이번 소송 목적은 사할린에 강제동원돼 해방 후에도 고향에 돌아갈 천부적 권리조차 누리지 못한 사할린 동포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지 한국 정부에 물으려는 것이다. 같은 강제동원 피해자인데도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국 정부로부터 위로금 한 푼도 받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려는 것도 이번 소송의 목적이다. 또한 1980년대 초까지 사할린에는 귀향의 꿈을 버리지 못한 무국적 한인4000∼5000명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8월 6일에는 한국인 22명, 재일동포 9명, 일본인 7명으로 구성된 일행이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를 찾았다. 이곳은 지난해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과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KIN에 위탁해 조선인 묘비 전수조사를 실시한 곳이다. 음식과 술, 꽃을 준비해간 일행은 조선인이 집중적으로 매장된 일본인 위령탑 근처 8구역에서 간단한 추도행사를 진행했다. 일본인 위령탑 주위는 키릴문자와 한자, 우리말로 적힌 조선인 묘비로 빼곡하다. 이런 규모의 공동묘지가 남사할린에만 60여 개. 묘비 주인을 찾는 작업은 돌과 나무로 된 묘비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시간을 다투는 문제다.
범정부 차원 대책 마련 시급
8월 5일 ‘사할린 한인 역사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제워크숍’에 참석한 임용군 사할린 한인협회 회장, 김춘자 사할린우리말방송국 국장, 필자와 통역사(오른쪽부터).
8월 8∼9일에는 조선인 학살사건 관련 현장을 찾았다. 1945년 8월 20~25일 일본인 민간인이 한 마을에 살던 조선인 27명을 집단 학살한 포자르스코예, 같은 해 8월 17∼18일 남사할린 북동쪽에 자리한 포로나이스크 북쪽, 일본 관헌이 조선인 18명을 학살한 레오니도보 등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공식 조사해 발표한 두 지역 외에도 남사할린 전역에서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는 증언이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
대회 마지막 날 참가자들은 한국, 일본, 사할린 세 나라에서 각각 민간 차원의 ‘사할린희망캠페인단 75인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할린 한인 역사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과 사할린 한인 문제를 널리 알리는 활동을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사할린 한인 대표단은 11월 초 일본을 방문해 일본 정부에 사할린 한인들의 요구서를 전달하기로 했다.
이제 우리 정부의 태도가 관건이다. 더는 ‘외교 마찰’ ‘형평성’ ‘예산’ 같은 한가하고 초라한 논리로 피눈물을 흘리는 사할린 한인 문제를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서둘러 사할린 한인 문제 해결을 위한 민관합동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세우고, 지원 근거와 체계를 확보할 특별법도 마련해야 한다.
“자식들 다 버리고 영주 귀국하면 무슨 소용인가” “사할린으로 끌려와 홀아비로 살면서 조선 땅에 남겨둔 가족들 그리워하다 독한 술 마시고 병 걸려 죽은 사람은 어쩔 것인가”. 슬픈 틈새의 땅 사할린에 남은 3만5000 한인 동포는 지금도 “우리는 정녕 어느 나라 백성이냐”며 울부짖고 있다.
* ‘사할린 피징용자 현지 위령시설 및 역사기념관 건립’을 위한 범국민 모금 계좌 : 국민은행 033-01-0448-023 (사)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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