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베이비부머(1955~63년생)가 712만 명에 달한다. 그중 이른 베이비부머들이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은퇴대란’이 시작되면서 베이비부머 은퇴자의 노후 문제는 사회 이슈로 급부상했다. 서울시가 마련한 ‘장년창업센터’를 통해 인생 이모작을 시작한 이들을 만나본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보세의류도매상가 3층 한 귀퉁이. 6.6㎡가 채 될까 싶은 비좁은 가게 안에서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던 그가 활짝 웃는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빈티지와 밀리터리 룩을 절묘하게 섞은 그의 패션 감각은 희끗한 턱수염에도 나이를 잊게 했다. 서울시 장년창업센터 1기생으로 지난해 한글패션 사업체 ‘서울IN서울’을 창업한 김나무(64) 대표. 수차례의 좌절과 실패를 딛고 새롭게 도전한 그는 과거 화려했던 시절 자신이 설립했던 패션유통업체 사명(社名)을 다시 쓰면서 ‘부활’이라고 표현했다.
김 대표의 원래 꿈은 배우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동극단에 들어가 배우 윤여정, 박원숙, 서인석 씨와 한솥밥을 먹으며 연기 지도를 받았다. 서라벌예대 1학년 때 그에게 첫 스크린 데뷔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영화 ‘적자인생’ 촬영을 끝낸 직후 여름방학이 되면서 아르바이트 삼아 했던 일이 생각지도 않은 사건을 불렀다.
“그때는 여름이면 해수욕객을 위해 노량진 한강변에 수십 동의 천막 탈의실을 세웠다. 구청에서 각 동을 민간에 임대해줬는데 그걸 한 동 빌려 손님을 받았다. 우리 천막에 배우들이 드나든다는 입소문이 나서 장사가 잘되자 전체 탈의실을 관리하던 건달 형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별것 아닌 일로 트집 잡혀 몽둥이질을 당했는데 그때 턱뼈가 나갔다. 병원에서 타박상이라고 해서 약만 먹고 말았는데 두 달 뒤 상처가 덧나 다시 병원에 실려 갔다. 일주일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태로웠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 그 즉시 수술을 받았다.”
한글 의류 샘플 제작에 몰두
8시간의 수술 끝에 깨어나 보니 모든 꿈이 사라졌다. 왼쪽 턱에 깊은 흉터가 남았고 그걸로 배우 인생도 끝나고 말았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충격이 컸던 그는 깊은 좌절을 딛고 군 입대와 베트남전 파병을 거쳐 패션디자이너로 새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했던 패션디자이너와 사업가로서의 삶도 여러 차례 실패 끝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5년여의 긴 슬럼프 끝에 김 대표가 새롭게 시작한 사업은 디자인을 입힌 한글 글꼴을 개발해 한글패션의류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패션디자이너의 꿈이 되살아난 것은 지난해 어느 봄날이었다.
“약속이 있어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 갔다. 옆 테이블에서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 바이어와 한국 무역회사 직원이 상담 중이었는데 ‘한글이라는 좋은 너희 나라 글이 있는데 너는 왜 영어를 새긴 티셔츠를 입었냐?’는 바이어 말이 귀에 확 꽂혔다. ‘바로 이거다’ 하는 영감이 딱 왔다.”
‘한글’과 ‘티셔츠(의류)’는 수십 년 동안 그의 몸에 박힌 DNA와도 같았다. 일찍이 한글 우수성에 주목해 한글사랑 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한글을 세계에 자랑하고 보급하고자 하는 꿈을 키워왔던 것. 독도에도 관심이 많아 한글을 새긴 독도 티셔츠를 제작하기도 했다. ‘한글패션의류사업’이라는 아이템을 확정한 그는 영어나 다른 외국어 필기체에 비해 다소 딱딱해 보이는 한글 글꼴에 디자인을 입히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부딪힌 난관은 컴퓨터 일러스트레이션(이하 일러스트) 작업이었다. 그는 과거 디자이너 시절 스케치북에 펜으로 일러스트 작업을 했던 아날로그 세대인 것.
“컴퓨터가 지금 이 시대 언어니까 나이 들어도 알아야 한다”는 그는 독학으로 컴퓨터와 씨름했다. 그래픽 작업을 익혀 새로운 글꼴을 개발하기까지 4개월이 걸렸다. 아직도 ‘김나무표’ 한글 글꼴 디자인을 “좀 더 예쁘게 다듬어야 한다”는 그는 독학으로 익힌 컴퓨터 실력으로 인터넷 블로그를 직접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내친김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익혀 젊은이들과 소통한다.
그가 요즘 가게에서 몰두하는 일은 글꼴 연구와 개발, 글꼴 디자인 구상과 수정, 그리고 새로운 글꼴을 입힌 의류 샘플 제작이다. “이곳을 전초기지 삼아 발판을 만드는 중”이라는 그는 “당장은 허황될지 모르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여 조심스레 포부를 드러냈다.
“우리나라는 지하자원이 없으니까 좋은 머리를 팔아야 한다. 머리 파는 것 가운데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게 패션산업이다. 그 시장을 키워야 한다. 가령 경기 661만㎡ 땅에 동대문과 남대문 패션시장을 들이고 톱디자이너 숍에서부터 가장 싼 덤핑 의류시장까지, 거기다 아시아관과 유럽관, 미국관 등 전 세계 브랜드도 끌어들여 패션왕국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도심에 있는 두 시장은 교통 혼잡을 유발하고 있지 않나. 패션타운에 리조트 같은 휴양시설도 만들고 호텔을 세워 세계적인 프레타포르테 쇼를 하자는 비전을 갖고 있다.”
김 대표가 원대한 비전을 품은 것은 과거 경험 때문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국제복장학원을 수료한 그는 명동 의상실에서 잠시 근무하다 1980년 남대문시장으로 터전을 옮겼다. 동기 디자이너들은 그의 시장행을 말렸지만 “시장패션에 디자인을 불어넣자”는 게 그의 목표였다. 상가 상인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의류도매시장 상가 최초로 TV와 라디오 광고를 시도했고, 매장 인테리어와 상가 로고가 찍힌 쇼핑백도 도입했다. 의류뿐 아니라 재래시장 전체에 디자인을 입히는 작업을 국내 최초로 시도했던 것이다.
당장 아쉬운 건 사업자금
남대문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자비를 들여 패션디자인경진대회를 개최하고 ‘남대문장터’라는 격월간 잡지도 발행했다. 그뿐 아니라 국내 최초로 시장 옷으로 스트리트 패션쇼를 개최했다. 기세를 몰아 시장패션컨설팅회사를 설립하고 상가개발 사업에 뛰어드는 등 사업을 확장했지만, 결국 실패를 거듭하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주저앉은 게 2004년인데 그때는 집마저 날리고 완전 거지가 됐다. 그 뒤로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졌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시작한 게 실버모델이다. 모델에이전시에 등록하고 일을 시작하면서 굵직한 TV CF도 들어왔고 뮤지컬과 드라마, 영화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동안 영화 ‘퀴즈왕’, 드라마 ‘굿모닝 대통령’과 ‘신기생뎐’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며, 이동통신회사와 보험회사 TV CF 등 여러 편의 광고를 찍어 제법 얼굴을 알렸다. 사업 틈틈이 단역 출연과 CF 모델 활동으로 번 돈을 생활비 외에 사업부도로 진 빚을 갚는 데 쓴다는 그에게 지금 당장 아쉬운 건 사업자금이다.
“신용불량자에서 겨우 면책자가 됐지만 정부나 각 기관의 창업자금 지원 대상이 되기에는 아직 제약이 있다. 당장 자금이 없어 좀 고달프긴 해도 오랜만에 연구하고 디자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는 10월 예정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관 공모전에 기대를 건다.
“내가 개발한 글꼴로 만든 의류를 출품할 계획인데, 거기서 상을 받는다면 금전적 도움보다 사업을 이어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업 비전을 인정받는 듯한 생각도 들 것이다. 한글 우수성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마침 케이팝(K-pop) 열풍도 불고 있으니 해외 마케팅 쪽으로 눈을 돌리면 사업 전망이 밝으리라 생각한다.”
김 대표의 원래 이름은 ‘옥현’이다. ‘나무’로 개명한 건 배우에 다시 도전하면서다. ‘옥현’이라는 이름으로 배우의 꿈이 좌절됐고 여러 번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새 마음으로 개명한 것.
“성경 욥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싹이 나고 움이 나서 가지가 돋는다.’ 그동안 비록 무너지고 찍혔을지언정 나는 다시 싹이 나고 가지가 돋을 것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보세의류도매상가 3층 한 귀퉁이. 6.6㎡가 채 될까 싶은 비좁은 가게 안에서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던 그가 활짝 웃는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빈티지와 밀리터리 룩을 절묘하게 섞은 그의 패션 감각은 희끗한 턱수염에도 나이를 잊게 했다. 서울시 장년창업센터 1기생으로 지난해 한글패션 사업체 ‘서울IN서울’을 창업한 김나무(64) 대표. 수차례의 좌절과 실패를 딛고 새롭게 도전한 그는 과거 화려했던 시절 자신이 설립했던 패션유통업체 사명(社名)을 다시 쓰면서 ‘부활’이라고 표현했다.
김 대표의 원래 꿈은 배우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동극단에 들어가 배우 윤여정, 박원숙, 서인석 씨와 한솥밥을 먹으며 연기 지도를 받았다. 서라벌예대 1학년 때 그에게 첫 스크린 데뷔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영화 ‘적자인생’ 촬영을 끝낸 직후 여름방학이 되면서 아르바이트 삼아 했던 일이 생각지도 않은 사건을 불렀다.
“그때는 여름이면 해수욕객을 위해 노량진 한강변에 수십 동의 천막 탈의실을 세웠다. 구청에서 각 동을 민간에 임대해줬는데 그걸 한 동 빌려 손님을 받았다. 우리 천막에 배우들이 드나든다는 입소문이 나서 장사가 잘되자 전체 탈의실을 관리하던 건달 형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별것 아닌 일로 트집 잡혀 몽둥이질을 당했는데 그때 턱뼈가 나갔다. 병원에서 타박상이라고 해서 약만 먹고 말았는데 두 달 뒤 상처가 덧나 다시 병원에 실려 갔다. 일주일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태로웠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 그 즉시 수술을 받았다.”
한글 의류 샘플 제작에 몰두
8시간의 수술 끝에 깨어나 보니 모든 꿈이 사라졌다. 왼쪽 턱에 깊은 흉터가 남았고 그걸로 배우 인생도 끝나고 말았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충격이 컸던 그는 깊은 좌절을 딛고 군 입대와 베트남전 파병을 거쳐 패션디자이너로 새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했던 패션디자이너와 사업가로서의 삶도 여러 차례 실패 끝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5년여의 긴 슬럼프 끝에 김 대표가 새롭게 시작한 사업은 디자인을 입힌 한글 글꼴을 개발해 한글패션의류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패션디자이너의 꿈이 되살아난 것은 지난해 어느 봄날이었다.
“약속이 있어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 갔다. 옆 테이블에서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 바이어와 한국 무역회사 직원이 상담 중이었는데 ‘한글이라는 좋은 너희 나라 글이 있는데 너는 왜 영어를 새긴 티셔츠를 입었냐?’는 바이어 말이 귀에 확 꽂혔다. ‘바로 이거다’ 하는 영감이 딱 왔다.”
‘한글’과 ‘티셔츠(의류)’는 수십 년 동안 그의 몸에 박힌 DNA와도 같았다. 일찍이 한글 우수성에 주목해 한글사랑 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한글을 세계에 자랑하고 보급하고자 하는 꿈을 키워왔던 것. 독도에도 관심이 많아 한글을 새긴 독도 티셔츠를 제작하기도 했다. ‘한글패션의류사업’이라는 아이템을 확정한 그는 영어나 다른 외국어 필기체에 비해 다소 딱딱해 보이는 한글 글꼴에 디자인을 입히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부딪힌 난관은 컴퓨터 일러스트레이션(이하 일러스트) 작업이었다. 그는 과거 디자이너 시절 스케치북에 펜으로 일러스트 작업을 했던 아날로그 세대인 것.
“컴퓨터가 지금 이 시대 언어니까 나이 들어도 알아야 한다”는 그는 독학으로 컴퓨터와 씨름했다. 그래픽 작업을 익혀 새로운 글꼴을 개발하기까지 4개월이 걸렸다. 아직도 ‘김나무표’ 한글 글꼴 디자인을 “좀 더 예쁘게 다듬어야 한다”는 그는 독학으로 익힌 컴퓨터 실력으로 인터넷 블로그를 직접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내친김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익혀 젊은이들과 소통한다.
그가 요즘 가게에서 몰두하는 일은 글꼴 연구와 개발, 글꼴 디자인 구상과 수정, 그리고 새로운 글꼴을 입힌 의류 샘플 제작이다. “이곳을 전초기지 삼아 발판을 만드는 중”이라는 그는 “당장은 허황될지 모르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여 조심스레 포부를 드러냈다.
“우리나라는 지하자원이 없으니까 좋은 머리를 팔아야 한다. 머리 파는 것 가운데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게 패션산업이다. 그 시장을 키워야 한다. 가령 경기 661만㎡ 땅에 동대문과 남대문 패션시장을 들이고 톱디자이너 숍에서부터 가장 싼 덤핑 의류시장까지, 거기다 아시아관과 유럽관, 미국관 등 전 세계 브랜드도 끌어들여 패션왕국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도심에 있는 두 시장은 교통 혼잡을 유발하고 있지 않나. 패션타운에 리조트 같은 휴양시설도 만들고 호텔을 세워 세계적인 프레타포르테 쇼를 하자는 비전을 갖고 있다.”
김 대표가 원대한 비전을 품은 것은 과거 경험 때문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국제복장학원을 수료한 그는 명동 의상실에서 잠시 근무하다 1980년 남대문시장으로 터전을 옮겼다. 동기 디자이너들은 그의 시장행을 말렸지만 “시장패션에 디자인을 불어넣자”는 게 그의 목표였다. 상가 상인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의류도매시장 상가 최초로 TV와 라디오 광고를 시도했고, 매장 인테리어와 상가 로고가 찍힌 쇼핑백도 도입했다. 의류뿐 아니라 재래시장 전체에 디자인을 입히는 작업을 국내 최초로 시도했던 것이다.
당장 아쉬운 건 사업자금
서울 창신동 동대문보세의류도매상가에 있는 김 대표의 비좁은 작업실.
“마지막으로 주저앉은 게 2004년인데 그때는 집마저 날리고 완전 거지가 됐다. 그 뒤로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졌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시작한 게 실버모델이다. 모델에이전시에 등록하고 일을 시작하면서 굵직한 TV CF도 들어왔고 뮤지컬과 드라마, 영화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동안 영화 ‘퀴즈왕’, 드라마 ‘굿모닝 대통령’과 ‘신기생뎐’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며, 이동통신회사와 보험회사 TV CF 등 여러 편의 광고를 찍어 제법 얼굴을 알렸다. 사업 틈틈이 단역 출연과 CF 모델 활동으로 번 돈을 생활비 외에 사업부도로 진 빚을 갚는 데 쓴다는 그에게 지금 당장 아쉬운 건 사업자금이다.
“신용불량자에서 겨우 면책자가 됐지만 정부나 각 기관의 창업자금 지원 대상이 되기에는 아직 제약이 있다. 당장 자금이 없어 좀 고달프긴 해도 오랜만에 연구하고 디자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는 10월 예정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관 공모전에 기대를 건다.
“내가 개발한 글꼴로 만든 의류를 출품할 계획인데, 거기서 상을 받는다면 금전적 도움보다 사업을 이어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업 비전을 인정받는 듯한 생각도 들 것이다. 한글 우수성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마침 케이팝(K-pop) 열풍도 불고 있으니 해외 마케팅 쪽으로 눈을 돌리면 사업 전망이 밝으리라 생각한다.”
김 대표의 원래 이름은 ‘옥현’이다. ‘나무’로 개명한 건 배우에 다시 도전하면서다. ‘옥현’이라는 이름으로 배우의 꿈이 좌절됐고 여러 번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새 마음으로 개명한 것.
“성경 욥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싹이 나고 움이 나서 가지가 돋는다.’ 그동안 비록 무너지고 찍혔을지언정 나는 다시 싹이 나고 가지가 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