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개밥바라기별</b><br>황석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288쪽/ 1만원
황석영의 신작 장편소설 ‘개밥바라기별’에서 주인공 준이 고등학교를 자퇴하겠다며 담임선생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학교에서 하루 여섯 시간을 앉아 있던 때보다 “눈썹을 건드리는 바람결의 잔잔한 느낌과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행렬, 햇빛이 지상에 내려앉는 여러 가지 색과 밀도며 빛과 그늘”과 함께했던 시간이 자신의 삶을 더욱 충족시켜주는 것을 깨달은 준은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 학교를 떠난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자퇴 원서를 제출했다가 부모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학교로 되돌아간 경험이 있어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호흡이 거칠어졌다. 유신체제 시절이었기에 교련 교육이 상징하는 획일화 교육이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잡아놓고는 야간학습을 시키며 일류대학에 갈 것을 강요하던 시절이었으니 학교라는 체제에 환멸을 느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지성과 낭만의 장(場)이라는 대학시절도 다르지 않았다. 제왕적 대통령이 부하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학기에는 대부분의 과목이 몇 시간 수업하고 리포트로 대체됐다. 나머지 시기에도 수업은 거의 파행적으로 진행됐다. 그때 “유신헌법이 우리 시대 최고의 법이라 할지라도 발전적 비판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썼는데 그게 글쎄 징역 3년에 처해질 수도 있는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나? 학교 내부 검열시스템은 그 글을 ‘우리 시대 최상의 이데올로기라 할지라도…’로 바꿔버렸다. 뿐만 아니라 계엄검열은 만신창이가 된 그 글의 상당 부분을 다시 새까맣게 지울 것을 요구했다. 하여튼 그 시절 나는 책을 죽어라고 읽어댔는데, 그 행위를 시대와의 불화를 자초하며 무슨 대단한 저항이라도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개밥바라기별’은 주인공 준이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무리한 방법으로 억지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는 성장소설이다. 준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과 음악감상실을 전전하고 무전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친구 여섯 사람의 시점과 주인공의 시점이 교차하는 이 소설의 무대는 내가 겪었던 시절보다 15년이나 앞선 시대지만 내 경험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지금도 존재한다. 아니, 대학을 졸업해도 앞이 보이지 않아 교문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세상이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난 시절 학생들은 아무리 엄혹한 상황에서도 제도와 학교가 공모한 틀을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았다. 과거로 올라갈수록 절대빈곤과 처절한 싸움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틈새가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와 즉각 일을 해결해주는 ‘헬리콥터 부모’를 둔 아이들에게는 조금의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소설이 요즘 청소년에게 읽힐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런데 이 책 다음에 우연히 잡은 ‘핫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윌리엄 새들러 외, 사이)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핫 에이지는 서드(Third) 에이지의 다른 이름이다. 배움의 단계이자 1차 성장기인 10대, 20대 시기가 퍼스트 에이지라면 일과 가정을 이뤄 사회에 정착하는 단계인 20대 중후반과 30대 시기는 세컨드 에이지다. 서드 에이지는 그 다음인 마흔부터 일흔까지의 30년을 말한다. 이 시기는 은퇴를 준비하는 시기가 아니라 후반생을 새롭게 하기 위해 인생의 항로를 수정하는 2차 성장기이기도 하다.
서드 에이지는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중년의 재발견과 함께 나타났다. 이 시기에 우리의 관심은 외적 성취에서 자신의 내면을 탐험하고 창조하고 이어주고 베푸는,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노력들로 옮겨간다. 자신의 내면에 닿아 있다는 것은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리고 버려뒀던 ‘다락방의 트렁크를 찾아내는 것’이다.
주인공 준은 쏠리고 몰리던 개밥바라기별이 잘나갈 때는 샛별이 된다는 것을 노동판에서 일하던 동료에게서 전해들은 다음, 베트남으로 떠나는 여정에서 문득 이제야말로 어쩌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출발점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일과 가정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은 40대가 다시 인생의 후반기라는 제 나름의 전쟁터로 떠나는 것과 같다.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처절하게 고민하기 때문이다.
‘개밥바라기별’의 성장기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다락방의 트렁크’와 다름없을 것이다. 이 트렁크를 활짝 열어젖혀본다는 건 어린 시절부터 진정 꿈꿨던 것을 되새기는 일이다. 그 노력 여하에 따라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이 성장소설이 모든 세대에게 나름의 감동을 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