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함께한 슈워제네거.
15일 발표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데이비스 주지사의 소환을 찬성하는 비율이 지난달 51%에서 한 달 사이에 58%로 높아졌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데이비스 지사에게 소환당하지 않는 비방을 전수하고 있다지만 소환당할 것으로 예상하는 비율은 이보다 높아 68%에 이른다. 그렇다면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자리에는 누가 오를까? 선거를 50여일 앞둔 시점에서 후보 그룹의 선두에는 ‘터미네이터’가 서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 이민자인 아놀드 슈워제네거(56)다.
그는 6일 코미디언 제이 리노가 진행하는 NBC 방송의 ‘투나잇 쇼’에 출연해 “정치인들이 빈둥거리고 서툰 짓을 하면서 일을 그르쳤다. 그래서 내가 나서는 것”이라면서 출마 결심을 밝혔다.
처가인 케네디가는 지지 안 하기로
역시 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는 달리 슈워제네거는 아직 정치인으로 기반을 굳히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부인 마리아 슈라이버는 정치 명가 케네디 가문 출신이지만 민주당을 지지하는 케네디가는 공화당 후보로 나서는 슈워제네거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설문조사 결과 슈워제네거의 지지율이 8월11일 42%까지 치솟았고 15일엔 51%로 50%대를 넘어섰다.
슈워제네거가 주지사에 당선되면 아쉽게도 그와 영화 ‘터미네이터’의 인연은 끝난다. ‘터미네이터 3’의 제작자인 앤드류 바이나는 1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터미네이터 4는) 아놀드 없이도 가능하다”면서 “영화의 방향이 슈워제네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로보틱스 전체에 있다”고 언급했다. 바이나는 “실은 4편 제작 여부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슈워제네거의 호화판 보좌진도 화제다. 억만장자인 투자가 워렌 버핏이 슈워제네거의 선거캠프에 가담, 슈워제네거의 재정 및 경제 담당 수석보좌관이 된 것이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버핏은 경제 관련 정책과 세금감면 조치 등 조지 W 부시 정부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소신 있는 발언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MS) 빌 게이츠 회장에 이어 세계 두 번째 부자로 꼽히는 버핏은 슈워제네거의 고문 자격으로 캘리포니아주의 문제를 언급하며 정치 쟁점을 만들고 있다.
버핏은 15일 ‘월 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캘리포니아는 재산세를 무겁게 부과하는 것을 포함해 세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을 예로 들면서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50만 달러짜리 집에 대해선 매년 1만4401달러의 재산세를 내는 데 비해, 캘리포니아 라구나 비치에 있는 400만 달러짜리 주택에 대해서는 2264달러밖에 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버핏의 생각은 간단하다. 1978년 주민투표에서 통과된, 재산세를 30% 내리고 향후 연간 2% 이내로만 올릴 수 있게 제한하는 내용의 캘리포니아 주법의 ‘프로포지션 13’ 법안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주가 부자들한테서 제대로 세금을 거두지 않기 때문에 다른 주에 비해 심각한 재정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이 그의 발언의 요지다.
부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공화당 후보로 나선 슈워제네거의 지지기반에 상처를 낸 셈이다. 공화당 지지자측에서도 반발이 터져 나왔다. 한때 세금반대운동도 주도했던 슈워제네거가 대대적인 재산세 증세를 수반할지 모를 보좌관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밝히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아직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슈워제네거에 대해 UC어바인대학의 마크 페트라카 교수 같은 이는 “슈워제네거가 자칫하다간 멍청이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워렌 버핏과 함께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 피트 윌슨 전 주지사 등 똑똑한 사람들을 대거 보좌관으로 기용했으니 이들의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는 꼭두각시 노릇밖에 더 하겠느냐’는 지적이다.
미국에서 선출직 정치인에 도전하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검증을 받는다. 필름 속에서 걸어나와 주지사에 도전하는 슈워제네거도 더 이상 분장과 특수효과에 의존할 수는 없다.
만천하에 다시 공개된 그의 ‘과거’ 중 하나는 불법이민자의 권리를 제한하자는 주민 발의안에 찬동했고 이 안이 통과되도록 지원했다는 것. 이 발의안은 1994년 제기돼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됐으나 법정에서 위헌판결이 나 각하된 바 있다.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많은 라틴계 이민자를 겨냥해 자신 또한 이민자임을 강조해온 슈워제네거로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부시 “화끈하게 밀어주고 싶지만 …”
또 하나는 그의 부친인 구스타프가 이미 알려진 것보다 더 깊숙이 나치정권에 개입했다는 주장이다. 구스타프는 1938년 나치당원이 됐고 이듬해 5월1일 아돌프 히틀러의 악명 높은 돌격대 ‘슈투름압타일룽엔(SA)’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구스타프가 어떤 잔혹행위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는 없다. ‘LA타임스’는 “구스타프가 최전방 전투에 참가하거나 군대가 진입하기에 앞서 민간인을 제압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나치 헌병대 주임상사였다”고 주장했다.
한편 슈워제네거의 지지율이 올라간다는 소식에 부시 대통령은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하다. 슈워제네거가 출마하자 “훌륭한 주지사가 될 것”이라며 엄호성 발언을 했던 부시 대통령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고 있다. 대통령이 주지사 선거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겠다는 자세다.
같은 공화당원인 데다 슈워제네거는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친한 사이다. 부시 대통령이 지원할 만도 하지만 너무 가까이 하다간 내년 대통령선거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슈워제네거가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낙태에 찬성하는 등 공화당 입장에선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와서 부시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보수파의 반발을 살 수 있다. 또 반(反)이민이나 재산세 중과세를 주장하는 슈워제네거의 참모진도 부시 대통령으로선 대선전략에 득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인지 15일 대선자금 모금을 위해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부시 대통령은 슈워제네거에 대한 지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다른 후보들처럼 그도 훌륭한 주지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모호한 답변으로 얼버무렸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아성인 캘리포니아주에서 공화당 출신 주지사가 탄생한다면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2000년 대선에 비해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내년 대선을 치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정치 전략가인 칼 로브를 슈워제네거 지원팀에 합류시켰다는 루머까지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앤드류 카드 주니어 백악관 비서실장은 “나는 누구에게도 그쪽에 합류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고 누구도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