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국에 주민등록증이 무슨 소용이야?’ 최근 지하철 서울역 한쪽에 삶의 보금자리를 튼 이강국씨(45). 그는 며칠 전 스스로 서울 시민이기를 포기했다. 자신이 살던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주민등록 말소 신청을 한 것. 카센터 운영자금 2억여원에 대한 어음을 막지 못한 이씨는 한달 전 집을 나왔고, 주민등록을 말소함으로써 채권자들의 끈질긴 추적을 뿌리칠 수 있었다.
‘무적(無籍) 시민’이 크게 늘고 있다. 국내 어딘가에 실제 살고 있지만 주민등록 공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 시민’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 이들은 부채상환이나 체납세 독촉을 피해 주거지를 옮긴 뒤 전입신고를 포기함으로써 정부로부터 주민등록을 직권 말소당한 사람들이다. 최근 대기업의 부도, 증시`-`벤처의 몰락 등 계속된 경제불황은 서민 가계를 파탄지경에 이르게 했고, 이들은 빚더미뿐인 집에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무적시민의 ‘폭증’은 경기상황과 정확히 연동했다. ‘경제 위기론’이 대두된 지난해 3·4분기 석 달 동안 전국에서 주민등록을 직권 말소당한 사람은 9만여명에 이른다. 지난해 1·4분기 7만3000명과 비교하면 23%나 늘어났다. 대도시는 더 심각해 서울시의 경우 1·4분기 1만4000명에서 3·4분기에 2만명으로 43%나 늘었다. 부산시의 경우에도 2744명에서 4000여명으로 45% 이상이나 증가했다.
“말소 신청이 들어온 건에 대해 사실조사를 즉시 나가려면 동사무소 전직원이 나가야 할 판입니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사무소의 한 직원은 4·4분기의 직권 말소자 통계 합산이 늦어지고 있지만, 지난해 1월과 비교해 올 1월은 족히 2배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각 동사무소 어디나 비슷하다.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1동의 김지현씨는 “지난해 1월 2건에 그친 주민등록 말소 건수가 하반기 들어 3~4건으로 늘더니, 지난 연말에는 10건 이상으로 늘었다”며 “97년 말과 98년 외환위기 때는 몰라서 못했는지, 이만큼 어렵지 않아서 그랬는지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주민등록이 말소되면 의료보험 혜택도 못 받고 금융거래, 재취업 등 모든 권리를 빼앗기게 되는데 워낙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지난해 12월27일 주민 36명의 주민등록을 한꺼번에 직권 말소한 서대문구 남가좌2동사무소 이인규씨는 20년 공무원 생활 중에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다고 탄식했다.
이씨는 무적시민 급증의 책임이 현행 주민등록법에도 있다고 말했다. 현행법은 어떤 경로를 통하든 공무원이 해당 주민이 주소지에 실제 거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주민등록을 직권 말소토록 규정하고 있다. 현지조사와 최고서, 통지서 발송 등 한달간의 사실조사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입신고가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게 그의 주장. 서울역 노숙자 이씨가 당당하게 자신의 주민등록을 말소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주민등록법상의 이런 맹점을 이용하는 것이 본인과 그 가족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무적시민들은 자신이 옛 주거지에 거주하지 않음으로써 피해를 보는 이해 당사자들에 의해 주민등록을 말소당한다. 사채업자도 끼여 있지만 무적시민 양산의 주범은 역시 은행이나 신용카드 회사, 빚을 대신 받아주는 신용정보사다. 물론 직권 말소 권한은 지자체장이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말소 의뢰를 하고, 실제로 해당 주민이 거주지에 살지 않으면 동사무소측은 직권 말소를 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예전에는 두 달에 한번, 세 달에 한번 보이더니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씩 와요. 그것도 말소할 사람의 서류뭉치를 이만큼씩 들고 와서….”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1동사무소 정성연씨는 카드 연체 빚이나 대출금 회수를 위해 찾아오는 금융사 직원들 때문에 다른 일을 하지 못할 지경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36명을 직권 말소한 남가좌2동의 경우 말소자 절반 이상이 이들의 요구에 의해 직권 말소된 사람들이었다. 나머지는 민방위교육 통지서 반송, 검찰과 경찰의 수배를 받는 사람들 순이었다. 동직원 정씨는 “빨리 말소를 하지 않으면 채권자들에게 직무유기라는 오해까지 받게 된다”며 카드사와 은행 채권팀의 횡포에 불만을 쏟아냈다.
“카드대금 연체가 갈수록 늘어가는데 어쩔 수 있습니까. 채권 회수 기간 연장, 가압류 신청, 민사소송 등 그 어떤 법적 행위에도 법원이 피신청인과 피고의 주소지가 확실하지 않으면 서류 자체를 받아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국민카드사의 한 관계자는 주민등록 말소 신청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채권자인 금융사가 법적 조치를 취하면 법원이 이를 피신청인이나 피고에게 공시를 송달해야 하는데 사람이 살지 않으니 송달 자체가 불가능한 것. 이에 법원은 채권회수를 위한 모든 송사의 제출 서류에 반드시 피신청인과 피고의 주민등록이 말소된 등본을 첨부하도록 하고 있다. 개인의 주민등록 말소가 법원의 책임 면피용으로 사용되는 것.
은행-카드사의 ‘전방위’ 주민등록 말소는 한순간에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한 무적시민들에게 최소한의 생활 기반과 일말의 재기 희망까지 앗아간다.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답니다. 그런데 전입신고를 하면 또 카드사와 신용정보회사에서 돈 될 만한 친척을 대라고 난리를 칠 거고….” 서울시 종로구 종로 1·4가동 일명 돈의동 쪽방촌에서 만난 최모씨(48). 그는 지난해 1월까지 과일 행상을 하다 교통사고를 내고 아들과 처를 모두 잃은 뒤 하루 7000원짜리 ‘쪽방식구’가 된 불운의 주인공이다. 그는 병간호로 진 카드 빚 때문에 은행으로부터 주민등록을 말소당한 후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신청했지만 동사무소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은 “전입신고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말뿐이었다. 최씨는 행여나 동사무소 직원이 자기 몰래 전입신고를 할까봐(실제는 불가능함) 최근 쪽방을 옮길 것을 계획중이다.
그래도 최씨는 상황이 양호한 경우다. 서울시 중구 회현동 남대문경찰서 뒤편 쪽방촌에서 만난 이모씨(63)는 빚쟁이야 어떻게 됐든 주민등록 말소 과태료 10만원이 없어 전입신고를 못하는 딱한 처지의 무적시민이다. “주민증만 있으면 공공근로도 하고 취로사업도 할 수 있다는데… 의료보험증도 다시 준다고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하루 5000원 쪽방세도 못내서 쫓겨나게 생겼는데….” 이씨(51)는 2년간의 노숙자 생활을 정리하고 이번 겨울 쪽방촌으로 들어왔지만 하루 쪽방세를 내기가 버겁기만 하다. 과태료 10만원을 마련하려고 돈을 모으는 중이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털려 나오는 것은 담뱃재밖에 없었다.
회현동사무소 서준범 사회복지사는 “쪽방 주거자들의 많은 수가 주민등록 말소자들이지만 전입신고를 하지 않는 한 다른 방법이 없다”며 “무적자에게 국가 혜택을 줄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주민등록 말소가 남용되면 시민의 불이익은 물론, 인권침해 소지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말소신청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는 법적인 보완과 함께 재산처분이나 채권연장 소송 때 주민등록 말소 서류 대신 내용증명 우편을 인정해 주는 등 서류 간소화 절차 도입이 무적시민의 양산을 막는 현실적인 대안이 되겠죠.” 법무법인 지평 황승화 변호사는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금융사들의 횡포를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들에게 10만원을!” 서울 종로종합사회복지관 쪽방상담소는 최근 쪽방 주민들의 주민등록복원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복원운동에 앞서, 빚지고 도망가도 무적시민이 되지 않고 살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일선 사회복지사들의 호소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무적시민도 우리의 이웃이고, 이 모든 슬픔이 지난 2000년의 생채기이자 2001년 1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무적(無籍) 시민’이 크게 늘고 있다. 국내 어딘가에 실제 살고 있지만 주민등록 공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 시민’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 이들은 부채상환이나 체납세 독촉을 피해 주거지를 옮긴 뒤 전입신고를 포기함으로써 정부로부터 주민등록을 직권 말소당한 사람들이다. 최근 대기업의 부도, 증시`-`벤처의 몰락 등 계속된 경제불황은 서민 가계를 파탄지경에 이르게 했고, 이들은 빚더미뿐인 집에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무적시민의 ‘폭증’은 경기상황과 정확히 연동했다. ‘경제 위기론’이 대두된 지난해 3·4분기 석 달 동안 전국에서 주민등록을 직권 말소당한 사람은 9만여명에 이른다. 지난해 1·4분기 7만3000명과 비교하면 23%나 늘어났다. 대도시는 더 심각해 서울시의 경우 1·4분기 1만4000명에서 3·4분기에 2만명으로 43%나 늘었다. 부산시의 경우에도 2744명에서 4000여명으로 45% 이상이나 증가했다.
“말소 신청이 들어온 건에 대해 사실조사를 즉시 나가려면 동사무소 전직원이 나가야 할 판입니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사무소의 한 직원은 4·4분기의 직권 말소자 통계 합산이 늦어지고 있지만, 지난해 1월과 비교해 올 1월은 족히 2배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각 동사무소 어디나 비슷하다.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1동의 김지현씨는 “지난해 1월 2건에 그친 주민등록 말소 건수가 하반기 들어 3~4건으로 늘더니, 지난 연말에는 10건 이상으로 늘었다”며 “97년 말과 98년 외환위기 때는 몰라서 못했는지, 이만큼 어렵지 않아서 그랬는지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주민등록이 말소되면 의료보험 혜택도 못 받고 금융거래, 재취업 등 모든 권리를 빼앗기게 되는데 워낙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지난해 12월27일 주민 36명의 주민등록을 한꺼번에 직권 말소한 서대문구 남가좌2동사무소 이인규씨는 20년 공무원 생활 중에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다고 탄식했다.
이씨는 무적시민 급증의 책임이 현행 주민등록법에도 있다고 말했다. 현행법은 어떤 경로를 통하든 공무원이 해당 주민이 주소지에 실제 거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주민등록을 직권 말소토록 규정하고 있다. 현지조사와 최고서, 통지서 발송 등 한달간의 사실조사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입신고가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게 그의 주장. 서울역 노숙자 이씨가 당당하게 자신의 주민등록을 말소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주민등록법상의 이런 맹점을 이용하는 것이 본인과 그 가족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무적시민들은 자신이 옛 주거지에 거주하지 않음으로써 피해를 보는 이해 당사자들에 의해 주민등록을 말소당한다. 사채업자도 끼여 있지만 무적시민 양산의 주범은 역시 은행이나 신용카드 회사, 빚을 대신 받아주는 신용정보사다. 물론 직권 말소 권한은 지자체장이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말소 의뢰를 하고, 실제로 해당 주민이 거주지에 살지 않으면 동사무소측은 직권 말소를 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예전에는 두 달에 한번, 세 달에 한번 보이더니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씩 와요. 그것도 말소할 사람의 서류뭉치를 이만큼씩 들고 와서….”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1동사무소 정성연씨는 카드 연체 빚이나 대출금 회수를 위해 찾아오는 금융사 직원들 때문에 다른 일을 하지 못할 지경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36명을 직권 말소한 남가좌2동의 경우 말소자 절반 이상이 이들의 요구에 의해 직권 말소된 사람들이었다. 나머지는 민방위교육 통지서 반송, 검찰과 경찰의 수배를 받는 사람들 순이었다. 동직원 정씨는 “빨리 말소를 하지 않으면 채권자들에게 직무유기라는 오해까지 받게 된다”며 카드사와 은행 채권팀의 횡포에 불만을 쏟아냈다.
“카드대금 연체가 갈수록 늘어가는데 어쩔 수 있습니까. 채권 회수 기간 연장, 가압류 신청, 민사소송 등 그 어떤 법적 행위에도 법원이 피신청인과 피고의 주소지가 확실하지 않으면 서류 자체를 받아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국민카드사의 한 관계자는 주민등록 말소 신청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채권자인 금융사가 법적 조치를 취하면 법원이 이를 피신청인이나 피고에게 공시를 송달해야 하는데 사람이 살지 않으니 송달 자체가 불가능한 것. 이에 법원은 채권회수를 위한 모든 송사의 제출 서류에 반드시 피신청인과 피고의 주민등록이 말소된 등본을 첨부하도록 하고 있다. 개인의 주민등록 말소가 법원의 책임 면피용으로 사용되는 것.
은행-카드사의 ‘전방위’ 주민등록 말소는 한순간에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한 무적시민들에게 최소한의 생활 기반과 일말의 재기 희망까지 앗아간다.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답니다. 그런데 전입신고를 하면 또 카드사와 신용정보회사에서 돈 될 만한 친척을 대라고 난리를 칠 거고….” 서울시 종로구 종로 1·4가동 일명 돈의동 쪽방촌에서 만난 최모씨(48). 그는 지난해 1월까지 과일 행상을 하다 교통사고를 내고 아들과 처를 모두 잃은 뒤 하루 7000원짜리 ‘쪽방식구’가 된 불운의 주인공이다. 그는 병간호로 진 카드 빚 때문에 은행으로부터 주민등록을 말소당한 후 기초생활보호대상자로 신청했지만 동사무소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은 “전입신고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말뿐이었다. 최씨는 행여나 동사무소 직원이 자기 몰래 전입신고를 할까봐(실제는 불가능함) 최근 쪽방을 옮길 것을 계획중이다.
그래도 최씨는 상황이 양호한 경우다. 서울시 중구 회현동 남대문경찰서 뒤편 쪽방촌에서 만난 이모씨(63)는 빚쟁이야 어떻게 됐든 주민등록 말소 과태료 10만원이 없어 전입신고를 못하는 딱한 처지의 무적시민이다. “주민증만 있으면 공공근로도 하고 취로사업도 할 수 있다는데… 의료보험증도 다시 준다고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하루 5000원 쪽방세도 못내서 쫓겨나게 생겼는데….” 이씨(51)는 2년간의 노숙자 생활을 정리하고 이번 겨울 쪽방촌으로 들어왔지만 하루 쪽방세를 내기가 버겁기만 하다. 과태료 10만원을 마련하려고 돈을 모으는 중이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털려 나오는 것은 담뱃재밖에 없었다.
회현동사무소 서준범 사회복지사는 “쪽방 주거자들의 많은 수가 주민등록 말소자들이지만 전입신고를 하지 않는 한 다른 방법이 없다”며 “무적자에게 국가 혜택을 줄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주민등록 말소가 남용되면 시민의 불이익은 물론, 인권침해 소지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말소신청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는 법적인 보완과 함께 재산처분이나 채권연장 소송 때 주민등록 말소 서류 대신 내용증명 우편을 인정해 주는 등 서류 간소화 절차 도입이 무적시민의 양산을 막는 현실적인 대안이 되겠죠.” 법무법인 지평 황승화 변호사는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금융사들의 횡포를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들에게 10만원을!” 서울 종로종합사회복지관 쪽방상담소는 최근 쪽방 주민들의 주민등록복원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복원운동에 앞서, 빚지고 도망가도 무적시민이 되지 않고 살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일선 사회복지사들의 호소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무적시민도 우리의 이웃이고, 이 모든 슬픔이 지난 2000년의 생채기이자 2001년 1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