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없는 일련의 대화는 7월 5일 오후 총 2513㎡(약 760평) 규모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스타필드 코엑스몰 지하 1, 2층 ‘삐에로쑈핑’ 매장을 둘러보는 동안 손님들이 한 말을 조각조각 모은 것이다. ‘삐에로쑈핑’은 6월 28일 문을 열었다.
삐에로쑈핑 매장 입구와 지하 2층의 성인인증 존, 익살스러운 캐릭터 제품들과 문구가 눈에 띄는 삐에로 쇼핑 내부 모습들.
한국형 돈키호테?!
다양한 상품들과 현란한 광고 카피가 눈에 띄는 삐에로쑈핑 내부.
일본 유명 잡화점 브랜드인 ‘돈키호테’는 쇼핑을 좋아하는 여행객이라면 꼭 들르는 곳이다. 기념품 사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없는 것 빼고는 다 파는 콘셉트로, 식품과 생필품은 기본이고 의류와 가전제품, 성인용품 등 별의별 제품을 갖췄다. 20년 이상 이어진 일본의 장기불황 속에서도 28년 연속 매출과 영업이익이 증가한 ‘돈키호테’. 어떻게 온라인 쇼핑 시대에 오프라인 쇼핑몰이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정 부회장의 답이 바로 ‘삐에로쑈핑’이다.
“너무 그대로 ‘카피’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도 ‘삐에로쑈핑’은 문 열자마자 ‘대박’을 쳤다. 이마트에 따르면 ‘삐에로쑈핑’ 누적 방문객 수는 오픈 11일(7월 9일) 만에 11만 명을 넘겼다. 개점 첫 주말인 6월 30일에는 매장에 들어가려는 사람의 줄이 100m 넘게 이어져 안전을 위해 입장 제한 시간을 뒀다. 정 부회장의 ‘히든카드’가 제대로 먹힌 것.
‘탕진잼 핫플레이스.’ ‘FUN&CRAZY’를 콘셉트로 한 ‘삐에로쑈핑’의 공식 보도자료에 나온 소개 글이다. 주 타깃층은 ‘시발비용’과 ‘탕진잼’ ‘소확행’ ‘YOLO’ 등의 단어가 친숙한 2030세대. 비교적 수입이 많지 않은 젊은 세대가 적은 금액으로 최대한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탕진잼’의 새로운 명소로 만들겠다는 게 이마트의 큰 그림이다.
삐에로쑈핑은 지하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방문객들.
만물상 잡화점답게 1000원짜리 물건부터 고가 명품까지 4만여 가지 상품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메인 동선의 폭은 1.8m, 곤돌라 간 폭은 0.9m로 진열 매대가 촘촘했다. 통로를 지나갈 때 “실례합니다”를 연발하게 되는 구조였다. 쇼핑 편의성보다 보물찾기 하듯 매장 구석구석을 경험하며 ‘득템’할 수 있는 재미를 지향한 결과다. 이마트 관계자는 “소비자가 매장 곳곳을 탐험하다 의외의 새로운 물건을 발견할 수 있는 게 ‘삐에로쑈핑’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안 가고 기념품 득템
눈길을 끄는 건 외국인 관광객과 일본 관광을 즐기는 한국인을 위한 코너였다.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 오면 꼭 들러야 할 매장으로 만들고 싶어서였을까. 그들을 위한 한국 기념품 코너에는 김, 과자, 홍삼, 지역별 전통주는 물론이고 케이뷰티(K-beauty) 제품과 아이돌 굿즈도 팔고 있었다. 매장 내 고객센터와 키오스크에서 택스 리펀도 받을 수 있었다.
일본에 가지 않고도 기념품을 원스톱으로 쇼핑 가능한 코너도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한 누리꾼이 ‘일본 당일치기 꿀잼’이라며 일본산 먹을거리 사진을 올렸다. 사진만 보면 영락없이 일본에서 사온 기념품이다. 그러나 ‘#현실은삐에로쑈핑’이라고 해시태그를 덧붙였다. 일본 아사히공장에서만 팔던 미니 아사히맥주캔이나 인기 있는 간식인 코로로 젤리, 우마이봉, 와사비 스낵 등 다양한 일본 간식을 살 수 있었다. 둘러보는 내내 ‘일렉트로마트’와 ‘다이소’를 합쳐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품도 판다. 프라다, 발렌티노, 펜디, 보테가베네타 등 다양한 명품 피혁잡화를 병행수입으로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한참 제품을 들여다보는데 ‘저도 그게 어딨는지 모릅니다’라고 쓰인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뒤로 지나갔다. ‘급소 가격’이라며 특가 상품을 안내하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이런 문구들은 본사에서 배포한 것도 있지만, 매장 담당 직원들이 ‘알아서’ 만든 것이다. “MD들이 약 빨았나 봐”라던 방문객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 상품 선정부터 매입, 진열 권한까지 모두 고객을 직접 대하는 매장 관리자에게 부여한 점도 ‘돈키호테’의 성공 방정식에서 따왔다. 이런 자유 덕에 유쾌하고 재치 있는 문구가 매장에 넘쳐났다.
삐~! 에로한 물건도 가득
이곳에서는 다른 매장에서 보기 힘든 성인용품과 코스프레용품을 판매한다.
‘굳이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으면 보기 힘든 ‘코끼리 팬티’ 같은 속옷도 ‘초섹시’라는 단어와 함께 당당히 진열돼 있다.’ 오픈 당시 나온 기사들에 한결같이 저렇게 쓰여 있어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이 정도로 강조했는지 궁금했다. 지하 2층 성인용품 존에 걸린 색색의 코끼리 팬티(8980원), 그 정체를 확인하고서야 취재 전 “저렴하면 기념으로 하나 사 올까”라고 말한 기자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후배의 시선이 이해됐다. 그 옆에는 구멍이 나 있으면 안 되는 부분만 골라가며 구멍을 낸 여성용 란제리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성인인증 존에서는 리얼돌부터 SM용품, 자위용품까지 다양한 제품을 팔고 있었다. ‘니가 본 영상의 그 제품 맞다’ 같은 노골적인 문구도 적혀 있었다. ‘매장에 LV.99 19금 마스터가 있어서 궁금하면 언제든지 제품에 대해 문의하라’는 안내문도 있었다. 피차 성희롱 요소가 없도록 물어볼 때 주의해야 할 것 같았다. 신분증 검사를 한다지만 이날 방문객 전원의 신분증을 검사하지는 않아서 ‘노안’ 청소년이라면 매장에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우려됐다. 이날 매장에는 남자끼리 온 손님도 많았지만 적극적인 여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함께 구경하는 남자도 꽤 있었다.
불편함이 주는 재미
가격대는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처럼 ‘미친 가격’까지는 아니었다. 마침 얼마 전 구매한 발열 안대가 있어 살펴봤는데 ‘올리브영’이나 ‘롭스’에서 파는 가격과 큰 차이가 없었다. 향수나 음료 가격도 마찬가지였다. 한 누리꾼은 ‘위트 없는 배민(배달의민족), 편의성이 빠진 돈키호테’라며 날 선 비판을 하기도 했다. 유통기한이 다 된 제품들을 저렴하게 파는 점은 ‘임박몰’과, 1000~2000원짜리 제품을 모아둔 매대가 따로 있는 점은 ‘다이소’와 비슷하게 느껴졌다.이마트가 ‘삐에로쑈핑’처럼 기존 유통업계의 상식을 뒤엎는 장소를 선보인 이유는 온라인 쇼핑 시대에 오프라인 유통채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재미’와 ‘즐거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편하지만 그래서 재미있는, 일부러 찾아와 소비하고 싶은 매장으로 꾸려가는 것이 목표다. 이마트 관계자는 “ ‘삐에로쑈핑’이 벤치마킹한 일본 ‘돈키호테’는 지난해 기준 370여 개 매장에서 연간 8조 원가량 매출을 올렸다”며 “올해 ‘삐에로쑈핑’은 총 3개 매장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마트의 신성장동력이 될 수 있도록 매장을 점차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반기에는 서울 동대문 두타 건물에서 2호점을 만날 수 있다. 3호점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사 건물에 들어설 것으로 점쳐진다. 클릭이나 터치 몇 번이면 끝나는 온라인 쇼핑의 편리함에 무뎌진 소비자, 그들의 ‘지름욕’을 요망한 ‘삐에로’들이 다시 자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