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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뒤집어 읽기

  •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뒤집어 읽기

※만보에는 책 속에 ‘만 가지 보물(萬寶)’이 있다는 뜻과 ‘한가롭게 슬슬 걷는 것(漫步)’처럼 책을 읽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험의 노래들
마틴 제이 지음/ 신재성 옮김/ 글항아리/ 656쪽/ 3만5000원


“나의 입장은 고대와 현대의 모든 철학자 및 정치가의 권위에 의해서뿐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도 정당화된다.”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저서에 수시로 등장하는 말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이 봤다면 바로 ‘꼰대’라고 조롱할 만한 글귀지만 흄이 살았던 18세기에는 경험의 위상이 지금과 달랐다.

미국 UC버클리 역사학과 명예교수인 마틴 제이는 저서 ‘경험의 노래들’에서 경험의 역사를 훑는다. “(경험의) 역사가 언제나 칭송으로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는 말로 서두를 연 저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사에서 경험이 겪은 위상 변화를 설명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 관념 등에 비해 뒤처지는 것으로 여겨지던 경험은 17세기를 지나 자연과학이 발전하며 지성사에서 자신만의 지위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경험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이를 이용해 타인을 제압하려는 시도도 생겼다. 저자는 “일상에서든, 이론적 담론에서든 ‘경험’만큼 극구 옹호되거나 격렬한 저항을 불러온 단어는 별로 없다”고 총평했다. 정치 영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험의 지위를 끌어올린 사람은 보수주의 사상가들이었고, 이들은 상대를 제압하는 수단으로 경험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왔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다”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다만 저자는 “경험이 보수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진보·좌파 지식인 역시 경험을 공유하며 계급의식을 고양해온 것이다.

경험의 무기가 돼버린 시대. 저자는 경험의 본질은 더 많고 다양한 경험의 추구이자, 이 과정에서 타인과 어울림을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경험이 풍부한 사회일수록 열린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하는 사람은 교조적이지 않다”라는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의 말을 인용하며 저자는 책을 마친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강타한 문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다. 뒤집으면 매일 새로움을 경험하는 나라라는 의미다. 어느 때보다 경험이 풍부한 한 해였지만, 반대로 사회 곳곳에 장벽이 세워진 시기이기도 했다. ‘경험의 노래들’을 통해 올해 경험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볼 것을 권한다.






주간동아 1280호 (p64~64)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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