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5

2013.04.29

본토 공격 ‘공갈’치는 북한과 그래도 대화라니…

워싱턴, 한반도 긴장 완화 반복되는 프로세스 딜레마

  • 신석호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입력2013-04-29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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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넷째 주를 시작하는 22일 월요일은 미국 워싱턴에 북한 문제를 둘러싼 대화 분위기가 활짝 핀 봄꽃만큼이나 완연한 하루였다. 이날 오후 3시 미국 워싱턴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한 한미 원자력협정 관련 세미나에 발제자로 나선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은 한 시간 정도의 발표와 토론이 끝난 뒤 기자와 만나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대화 무드에 대해 “북한의 도발 사이클이 끝나고 대화 사이클이 시작된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안팎서 대화 분위기 조성

    오바마 행정부 1기의 대북정책 핵심 참모였을 때는 기자들 앞에서 지극히 말조심을 하던 그였지만, 백악관을 나와 하버드대 벨퍼 국제관계연구소장으로 변신한 직후인 만큼 민간 북한 전문가로서 발언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은 듯했다. 오랜 백악관 생활이 몸에 밴 그의 상황 판단과 전망은 당국자의 기풍 그대로였다.

    “미국과 한국 등 동맹국들이 양자대화, 궁극적으로는 6자회담의 재개를 위해 어떤 조건을 요구할 것인지가 가장 큰 문제다. 사견이지만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북한이 ‘미국이 적대적 태도를 버리면 대화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북한의 슬픈 역사를 되돌아볼 때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는 “한미 연합군사연습이 끝나는 4월에 북한이 협상을 재개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올 것이라고 생각해왔다”며 “중국이 추가 도발을 중단하라고 막후에서 강하게 압력을 넣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일 북한이 추가로 무수단 미사일 등을 발사한다면 유엔과 한국, 일본 등이 제재를 강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가 오랜만에 미국을 방문해 첫날 일정을 소화하는 것과 관련해 “미국과 북한 사이 중재자로서 중국의 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전통적인 구실을 한다. 중국은 가능한 한 대화 조건을 줄이고 싶어 하고 미국은 좀 더 의미 있는 조건을 원한다”며 “글린 데이비스(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우다웨이가 조건을 놓고 협상할 게 분명하다”며 웃었다.

    실제로 잠시 후 오후 5시경 데이비스 특별대표와의 만남을 마치고 워싱턴 국무부 청사를 나서던 우 특별대표는 현관에서 기다리던 아시아 기자들에게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황급히 사라졌다. 아직 미국과 북한의 대화 조건이 턱없이 거리가 먼 상황에서 특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취지였지만 어쨌든 북·미 간 대화가 시작됐다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날 오후 로버트 킹 미국 대북인권특사는 오랜만에 국무부에 출입하는 일군 기자들을 일부러 불러 모아 간담회를 가졌다. 당연히 기자들은 대북 식량계획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북한이 식량 지원을 요청하면 검토할 수 있다”는 원론적 대답을 내놓았다. 실제 지원할 필요가 있고, 다른 어려운 국가들과 균형을 맞추며, 필요한 주민에게 공급하는지 여부에 대한 모니터링이 가능할 경우라는 예의 3개 조건도 명시했다. 하지만 북·미 양국이 대화 조건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기자들을 불러 모아 식량 지원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북 메시지는 분명했다.

    본토 공격 ‘공갈’치는 북한과 그래도 대화라니…

    4월 11일 미국 보스턴 하버드대에서 열린 한미 평화통일 포럼에서 발언하는 로버트 킹 미국 대북인권특사(가운데).

    비핵화 노력 20년 실랑이

    한국에서 박근혜 대통령,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혼선 속에서도 개성공단과 관련한 대화 필요성을 강조한 다음 날인 4월 11일에도 킹 특사는 대북 인도적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날 그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가 미국 보스턴에서 개최한 한반도 통일포럼에서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 주민의 건강이 중요한 문제”라며 “국제사회는 핵문제와 별개로 북한 취약계층을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전에 배포한 발표문에는 없던 내용이다. 이어 그는 대북 인도적 지원단체인 유진벨재단의 의약품 공급 사업을 예로 들면서 “이 같은 지원은 핵개발에 이용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활동이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북한 주민을 돌보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는 강조도 이어졌다.

    미국과 북한의 대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최근 워싱턴 분위기는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20년 실랑이를 익히 지켜봐온 이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북한이 무수단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지 않는 것으로 대화 의사를 주변국에 던지고, 6자회담 당사국 당국자들이 왔다갔다 방문 외교를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20년간 계속돼온 사이클의 판박이다. 북한의 의도적인 대(對)미 ‘벼랑 끝 전술’과 ‘맞대응’ 카드가 정점에 달하면 미국과 중국 등 주변국이 나서서 대화를 모색하는 전형적인 ‘위기관리 국면’ 풍경인 것이다. 하지만 이 벼랑 끝 전술과 맞대응의 세부 내용이야말로 2013년판 한반도 위기관리 국면이 과거와 가장 다른 점이다.

    평양은 지난해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 12월 로켓 발사와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을 단행함으로써 벼랑 끝 대치와 맞대응 카드를 썼다. 2006년과 2009년에도 로켓 발사와 핵실험으로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냈지만, 당시의 기술적 수준은 그리 우려할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반면 이번 실험을 통해 북한은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 1만km의 장거리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핵실험 역시 과거보다 폭발력이 대폭 증가한 것으로 국제사회는 평가한다. 도발과 대화 제의를 반복하는 것은 같지만, 이를 반복함으로써 기술력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3차 핵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와 미국의 제재를 이유로 추가 맞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 본토 핵 공격 위협’과 ‘개성공단 조업 중단’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활용한 것도 과거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먹혀들었다는 점이다. 북한이 3월 29일 인민군 전략로켓부대 회의와 ‘미국 본토 타격 계획’을 공개한 이후 척 헤이글 미 국방부 장관 등 당국자들은 북한의 도발 위협이 위험스러운 수준이라는 평가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어 CNN 등 미국 상업방송들이 실제 북한의 대미 공격 개연성에 무게를 둔 선정적인 보도를 종일 쏟아내는 일종의 ‘안보 상업주의’에 몰두하면서 미국인에게는 9·11테러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4월 4일 오후 국무부 청사에서 ‘동아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한 케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 대사는 “북한이 실제로 미국을 도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느냐”고 되레 기자에게 물었다. 기자가 “신종 공갈”이라고 하자 그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많은 미국인이 실제 공격당할 것이라고 우려한다”며 ‘걱정’했다. 택시기사도, 미국 내 지인들도 자신을 만나면 북한이 실제 공격할 개연성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는 것이다. 4월 말 현재까지도 미국 택시기사들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손님이 탈 때마다 “김정은은 나쁘고 이상하며 위험한 지도자”라는 말을 잊지 않고 던진다.

    김정은이 2010년 9월 당대표자회에서 북한의 3대 세습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이후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강압외교의 성과를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미국과 중국이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긴장 관리에 나서는 것을 봤고, 식량 요구 카드를 던져 2011년 2월 29일 이른바 ‘2·29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어 그해 4월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카드로 삼아 미국 백악관 당국자들을 한국 몰래 평양에 두 번이나 불러들이는 성과를 거뒀다.

    본토 공격 ‘공갈’치는 북한과 그래도 대화라니…

    4월 17일 하원 외교위원회 예산안 청문회에 출석한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

    김정은이 이번 도발을 통해 ‘미국인도 본토 공격 공갈에 반응을 보인다’는 경험을 한 것이 향후 한반도에 던지는 그림자는 사뭇 암울하기 짝이 없다. 앞으로 미국과의 대화 무드를 조성하든 그렇지 않든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기술력을 높여갈 것이 분명하고, 대화의 판이 깨질 때마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하면서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에 미국 본토 핵 공격과 한반도 국지도발 위협 공갈을 늘어놓을 공산이 크다. 미국은 북한이 공갈로 긴장을 조성하다가 우발적인 계기로 실제 도발을 감행해 결과적으로 한반도에서 국지전이 발생할 개연성을 특히 우려한다.

    위기관리 국면을 조성해 김정은이 얻은 성과는 이것만이 아니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엘리트와 주민을 상대로 ‘미국을 굴복시켰다’고 홍보하면서 3대 세습체제의 공고화에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평통의 보스턴 한반도 통일포럼 참석 차 미국에 왔던 길정우 새누리당 의원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한국 내에서 ‘독자적 핵 무장론’이 커졌고,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이를 이유로 평화적이고 상업적인 원자력 이용을 위한 한국의 원자력협정 개정 요구를 거부할 명분을 강화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강화할수록 한국은 팔과 다리가 묶이는 악순환 고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북핵 위기관리 우울한 결론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은 4월 18일 상원 청문회에 나와 북한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철폐 등 미국과의 대화 조건을 제시한 것에 대해 “(협상을 위한) 첫 수(beginning gambit)로 볼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하기에 따라 또다시 대화에 나설 가능성을 내비친 셈이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미국이 북한에만 유리한 어정쩡한 대화에 쉽게 끌려 나갈 것 같지는 않다는 게 현지 외교 소식통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북한의 도발→보상·협상→재도발→재협상’을 거듭해온 북핵 20년의 패턴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말해왔고, 최근에도 그 기조를 잃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부대변인은 같은 날 “미국은 (북한과의) 신뢰 있는 진정한 협상의 문을 열어놓았다”며 “이를 위해 북한이 핵무기 포기(renouncing) 및 핵 프로그램 중단(discontinuing) 의무를 실질적으로 준수하려는 진지한 의도와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또 이런 협상이 진전되고 결실을 보려면 북한이 국제 의무를 지킨다는 증거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대화 전제조건을 명확히 제시했다. 물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 공산은 적고, 받아들이는 시늉을 하더라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대화를 통해 한반도 긴장을 완화할 필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워싱턴의 가장 큰 고민인 셈이다. 북한의 도발이 소강국면으로 접어든 자리에 남은 우울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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