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2

2016.04.06

스포츠

좋은 지도자 추일승 명장 되다

공격과 수비 분담 농구로 지도자 경력 13년 만에 고양 오리온 우승 일궈

  • 최용석 스포츠동아 기자 gtyong@donga.com

    입력2016-04-04 14:03:26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어느 날 영국 팝페라 가수 폴 포츠가 나오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게 됐습니다. 폴 포츠에게 노래가 있듯 내게는 농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폴 포츠가 부른 노래 가운데 가사가 ‘빈체로’로 끝나는 게 있습니다. ‘빈체로’는 영어로 번역하면 ‘I will win(나는 승리한다)’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코트에 나섰습니다.”

    한국 남자프로농구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추일승(53) 감독이 ‘2015~2016 KCC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7전4승제) 6차전에서 승리해 전주 KCC 이지스를 시리즈 전적 4승2패로 제압하고 챔피언 자리에 오른 뒤 남긴 말이다.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우승이란 내게 한 번쯤은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자 소원”이라 했던 추 감독이 그토록 바라던 정상에 올라섰다. 프로농구 감독으로 데뷔한 2003년 이후 13년 만에 이룬 값진 성과였다. 밀려오는 감격에 그의 입술은 떨렸고 눈시울은 붉어졌다.



    농구 전술 책 쓰고 TV 해설가로 활동

    추 감독은 우승 전까지 남자프로농구에서 ‘명장’이라는 수식어를 받지 못했다. 늘 공부하고 노력하는 좋은 지도자라는 평가는 받았지만, 명장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방점인 ‘우승’이라는 타이틀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 kt 소닉붐의 전신인 KTF에서 사령탑을 맡았던 2006~2007시즌 팀을 챔피언 결정전에 올려놓았지만 동갑내기 친구 유재학(53) 감독이 이끄는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게 시리즈 전적 3승4패로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절호의 기회를 놓친 그는 2년 뒤 야인이 됐다. 당시 모든 팀이 우승에 매달렸고, 챔피언에 오른 경력이 없는 추 감독의 컴백은 쉽지 않아 보였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그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폴 포츠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다. 추 감독은 “KTF에서 물러난 뒤 ‘지도자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그때 폴 포츠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고, 내가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게 농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 덕에 야인생활을 하는 2년 동안 잘 보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농구 공부에 몰두했다. 국내에서는 드문 농구 전술 관련 책을 쓰면서 다양한 전술과 전략을 연마했다. 농구 관련 전문매체를 만들어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소속 기자들과 경기장을 돌며 현장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썼고, TV 해설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농구와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힘든 시간을 보낸 뒤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팀 리빌딩(재건)이 절실하던 오리온이 2011년 추 감독에게 손을 내민 것. 그러나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팀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선수층이 엷었고, 주축 선수들은 부상 후유증으로 경기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자칫하면 우승은커녕 팀을 다시 만들다 감독직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오리온은 많은 변화가 필요한 팀이었다. 그는 팀 개혁을 위해 개인 연봉 일부를 양보하는 대신 계약 기간을 늘리기로 팀과 합의했다. 추 감독은 “오리온에 처음 왔을 때 팀 구조 등 많은 부분을 바꿔야 한다고 봤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기존 사고방식도 깨야 했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좋은 코치들을 만났고, 결국 오늘 꿈이 이뤄졌다”며 부임 당시를 돌아봤다.

    그는 팀 체질을 개선하고자 다른 감독들은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주축 선수 트레이드를 과감하게 실시해 원하는 선수를 지속적으로 모았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는 팀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신인드래프트 지명권을 창원 LG 세이커스 측에 넘겨주면서까지 리그를 대표하는 슈터 노장 문태종(41)을 영입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금의 오리온 전력을 만들어냈다.

    또한 추 감독은 오리온에 자신이 추구하는 ‘포워드 농구’를 이식했다. 그는 KTF에서 사령탑을 맡았던 시절에도 많은 포워드를 중심으로 한 농구를 선보였다. 비록 우승하진 못했지만 추 감독의 포워드 농구는 당시에도 큰 주목을 받았다. 추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농구 결승전에서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이 격돌했는데 미국은 센터 위주의 농구를 했다. 반면 러시아는 장신 포워드 중심의 외곽슛 위주로 플레이를 하며 세련된 농구를 펼쳤다. 그때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지도자로 변신해 포워드 농구를 실현해보고 싶었다”고 추일승표 포워드 농구의 탄생 비화도 공개했다.



    외곽슛 위주의 포워드 농구

    추 감독은 결국 포워드 중심의 공격 농구로 ‘좋은 센터를 보유한 수비가 강한 팀이 결국 우승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이른바 ‘스몰볼’이라 부르는 외곽슛 위주의 포워드 농구로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는 기량이 좋은 선수 1~2명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포워드도 다양한 색깔의 선수로 구성했다. 슛이 좋은 선수, 개인기술이 좋은 선수, 장신이지만 내·외곽 플레이가 가능한 선수, 신장은 크지 않지만 센터 구실을 해줄 수 있는 힘 좋은 선수 등 여러 성향의 선수를 데려왔다. 이를 통해 8~10명의 풍부한 가용 인원으로 다양한 색깔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추 감독은 “실업농구 시절 매니저로 활동했는데, 그때부터 충분히 해볼 만한 잠재력을 지닌 선수가 많이 못 뛰는 걸 봤다. 내가 감독이 된다면 그런 부분을 살려줘야겠다 싶었다. 주인공 한두 명이 많은 시간을 지배하다 보면 수비와 공격 모두 재미있는 농구가 될 수 없다고 봤다. 누구나 조금이라도 경기에 기여할 수 있는 농구, 선수들이 수비와 공격 모두 분담하는 농구를 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과 준비를 통해 ‘우승’이라는 소원을 성취한 추 감독. 그는 이번 우승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유가 있었다. 추 감독에게는 ‘비주류’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술을 잘 못 마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 농구계를 주름잡고 있는 명문대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농구에만 몰두하다 보니 경기 도중 프로농구계에 존재하는 불문율 같은 것을 깨기도 해 다른 팀 감독들과 사이가 멀어진 탓도 있었다. 그렇지만 추 감독은 자기 스타일을 고수했다. 스스로 가는 길이 옳다고 판단한 그는 묵묵하게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1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는 모든 걸 감내했다.

    추 감독은 “주류와 비주류, 우승 경험 없는 부분 등이 남모를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열심히 살았다면 부끄럽지 않다고 봤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는 관계없다. 연세대나 고려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다. 고로 난 비주류가 아니다. 우승을 못 하더라도 내 가족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되뇌었다. 결국 오리온에서 좋은 선수들을 만나 이렇게 영광된 자리에 올랐다”며 그동안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뒀던 응어리를 풀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