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2

2018.04.04

황승경의 on the stage

비극 속 희극, 희극 속 비극

연극 ‘전쟁터의 소풍’

  • 입력2018-04-03 11:17:55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진 제공 · 창작공동체 아르케

    사진 제공 · 창작공동체 아르케

    창작공동체 아르케가 창단 10주년을 기념해 페르난도 아라발(86)의 ‘전쟁터의 소풍’을 선보이고 있다. 과연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망중한을 즐길 수 있을까.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 살벌한 전쟁터에 누가 소풍을 온단 말인가. 아라발은 프랑스 연극계의 대표적인 부조리극 작가이자 시인, 소설가, 영화 제작자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법학을 전공했음에도 그가 젊은 나이에 조국을 등지고 프랑스의 새로운 예술 조류에 몸담은 것은 3세 때 겪은 스페인 내전(1936년 7월~1939년 3월 인민전선 내각 성립에 반발해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군부가 일으킨 반란)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내전으로 그의 부친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행방불명됐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냉혹하고 무질서한 세상의 모순을 역설적이면서도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말이 안 되는, 더욱 황당한 해학적 웃음이 동반된다. 처녀작인 ‘전쟁터의 소풍’은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에 전 세계에서 다양한 해석으로 공연되는 대표적인 블랙코미디 레퍼토리다. 연출자 김승철은 ‘비정한 전쟁의 허무함’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이고 강렬한 무대방식으로 선사하며 관객을 압도한다. 


    사진 제공 · 창작공동체 아르케

    사진 제공 · 창작공동체 아르케

    f언제 포화가 쏟아질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혼자 참호를 지키는 ‘자뽀’(김혜은 분)는 외롭기만 하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미지의 인물 ‘칼’(박시내 분)이 있지만 맘껏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절실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그를 찾아 머나먼 곳까지 온다. 한껏 뽐낸 피크닉 차림의 자뽀 어머니(조은경 분)는 전쟁터도 사람 사는 곳이라며 전쟁의 잔학성과 부당함을 무시한다. 과거 기마부대로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이형주 역)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뽀는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포도주를 곁들인 산해진미 음식에 음악까지 더해진 만찬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적군 ‘제뽀’(유성준 분)가 포로로 잡히지만 그도 이내 만찬 손님이 된다. 

    엉겁결에 징집당한 자뽀와 제뽀는 전쟁의 당위성에 강한 의문을 품고 전쟁을 그만둘 의외의 방법을 알아낸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환호를 지르며 모두 한바탕 춤판을 벌인다. 그러나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축제장은 화염에 휩싸인다. 벅찬 기쁨으로 춤에 열중하던 그들은 한 명씩 포탄에 쓰러지고 무대에는 적막이 흐른다. 위생병(김관장 · 정다정 분)이 거둬들이는 죽은 이의 신발과 바닥을 뒹구는 철모는 무자비한 전쟁의 실상을 보여준다.
     
    배우의 침묵이 대사 이상의 예술이 되고, 음악 역시 또 다른 무대언어다.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 중 ‘라르고’,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 중 ‘환희의 송가’,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천국과 지옥’ 중 ‘캉캉’ 등 귀에 익숙한 선율이 흐르는 동안 배우들은 섬세한 표정과 절묘한 움직임을 곁들이며 극적 긴장도를 높인다. 극장을 가득 채운 소리와 몸짓의 열기로 관객 역시 극 중 인물과 혼연일체 돼 연극에 흠뻑 빠진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