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연임 안건은 84.6% 지지를 받아 싱겁게 통과됐다. 외국인 주주 대부분이 찬성한 덕분이었다. 이들 외국인 주주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 건 바로 해외 의결권 자문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의 찬성 권고였다. 도대체 ISS가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기에 외국인 주주들이 순순히 ISS의 말을 따른 걸까.
주총의 뜨거운 감자, ISS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이 3월 23일 서울 영등포구 KB국민은행 여의도 본점에서 열린 제10기 KB금융지주 정기 주주총회에서 개회 인사를 하고 있다(왼쪽). 김정태 KEB하나금융지주 회장은 이번 주주총회에서 3연임에 성공했다. [뉴시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몇 년 새 ‘의결권 자문사’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의결권 자문사들은 주총에서 논의되는 안건을 분석해 기관투자자에게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도록 권고하는 게 주된 임무다. 그동안 한국 자본시장에서는 의결권 자문사에 대한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들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의결권 자문사에 대한 재계와 투자자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ISS는 이런 분위기에서 치른 올해 주총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대기업 오너들의 지배구조 강화와 승계 작업에 브레이크를 거는가 하면, 최고경영자(CEO)의 연임에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외국인 주주들의 선택을 유도하는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안건에서 ISS의 권고가 사실상 주총의 결론이 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1985년 설립된 ISS는 ‘젠스타 캐피털(Genstar Capital)’이라는 사모펀드를 모회사로 한다. 본사는 미국 메릴랜드주 록빌에 있으며 현재 뉴욕, 캐나다, 영국, 일본, 싱가포르 등 전 세계 13개국에 18개 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ISS 인터넷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현재 ISS의 자문을 받는 세계 각국의 회원사는 1900여 개에 달한다.
ISS는 의결권 자문사 시장을 처음 개척한 덕에 현재 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2003년 후발주자로 뛰어든 미국 글래스루이스(GlassLewis&Co.)는 점유율이 20%에 불과하다. ISS에 따르면 법률학자, 회계사, 금융전문가로 구성된 직원 1100여 명은 매년 115개국에서 2만 개 이상 기업의 RI(Responsible Investing·책임투자)를 연구 조사해 4만 2000여 건의 주총 관련 안건에 관해 의결권 행사의 방향을 권고한다.
한국 상장사에 대해서도 연간 100여 건의 리포트를 내놓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본적으로 상장사에 관한 요약 보고서와 합병,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 선임, 정관 변경, 재무제표 승인 등 주총에 올라오는 모든 안건을 분석한다. 주 고객인 연기금, 자산관리 기관, 헤지펀드 등과는 연간 혹은 건당 계약을 맺어 보고서를 제공하고, 비용은 분석 기업과 안건에 따라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에 발표된 자료는 건당 10만~15만 원 선에서 구매 가능하다.
“오직 주주의 이익만 생각”
백복인 KT&G 사장이 3월 16일 대전 대덕구 KT&G 인재개발원 비전홀에서 열린 KT&G 제31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연임에 성공했다. [사진 제공 · KT&G ]
이에 하나금융은 주총을 한 달 이상 남겨놓은 상황에서 ISS와 사전 접촉에 나섰고, 김정태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는 노조 측 역시 최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과 ISS에 연임 저지를 위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당시 김정한 KEB하나은행 노조위원장은 “외국인 주주 비율이 높은 만큼 ISS 보고서가 주총 표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연임 반대 관련 의견서를 전달함으로써 주주나 기관투자자 등의 여론을 형성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ISS는 결국 김 회장의 연임에 찬성표를 던졌다. 김 회장이 재임하는 동안 실적이 개선됐고, 주주가치도 높아졌다는 점이 그 이유다. 지난해 하나금융 순이익은 2조 368억 원으로 2005년 12월 지주 설립 후 처음으로 2조 원을 넘어섰다. 중간배당까지 포함한 주당 1550원의 배당금 역시 역대 최대 수준이다.
또한 김 회장과 하나금융을 둘러싼 일부 의혹이 해소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KEB하나은행 노조는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독일 부동산을 사려고 대출받는 과정에서 하나은행이 외국환거래법을 위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최근 검찰은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내렸다. 또한 ‘창조경제 1호’로 꼽히는 아이카이스트 특혜 대출 의혹도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ISS의 영향력이 금융지주사나 공기업에 드리운 ‘관치’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정치적 외풍에 취약한 국내 기업의 경영 환경에서 ISS 같은 해외 의결권 자문사는 투자자들에게 객관적 지표를 제공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ISS는 의결권 자문에서 가장 기본이 ‘주주의 이익’인 만큼 그 외의 요소는 다 배제하고 오로지 지속 가능한 경영인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춰 주주와 회사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판단한 결과를 권고한다. 상당수 외국계 투자기관은 ISS 보고서의 권고와 다르게 의결권을 행사하려면 내부 절차를 거쳐 따로 소명해야 할 정도로 ISS의 영향력이 크다. 그간 데이터들을 보더라도 ISS의 분석 결과는 상당 부분 믿을 만하다고 볼 수 있다”고 평했다.
ISS는 올해 국내 기업 중에서는 하나금융 외 KT&G, KB금융 등의 주총 결과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3월 16일 열린 KT&G 주총의 주요 안건은 백복인 사장의 연임이었다. 사장 선임 안건이 통과되려면 출석 주주 의결권의 과반이 찬성하고 이 비율이 발행 주식 총수 4분의 1 이상이어야 한다. 이날 주총에서는 위임장 제출을 포함해 의결권을 가진 주총 참석 주식 수(9328만 7928주) 중 7114만 2223주가 연임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백복인 KT&G 사장은 3년 연임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당초 KT&G의 2대 주주인 IBK기업은행은 백 사장의 ‘셀프 연임’과 ‘CEO 리스크’를 문제 삼아 연임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에 관치라는 시선을 피하기 힘들었다. 기업은행 대주주인 기획재정부(기재부)가 사실상 KT&G의 경영에 관여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던 것. 현재 기재부는 기업은행 지분을 51%가량 보유 중이고, 이를 통해 KT&G에 낙하산 인사를 사장으로 내려 보내려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러한 관치 논란 속에서 백 사장이 연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외국인 주주들이 ISS 권고를 따른 덕분으로 풀이된다. ISS는 또한 기업은행이 제안한 사외이사 증원에 반대를 권했고, 주주들도 반대표를 던졌다. 현재 KT&G의 외국인 주주 비중은 의결권 기준 58.5%이다.
노조의 ‘회장 흔들기’도 저지?
3월 23일 오전 서울 중구 KEB하나은행에서 하나금융지주 정기 주주총회가 열렸다. [뉴스1]
ISS는 기업은행이 주주제안을 통해 추천한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배당 성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중점적으로 질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KT&G는 대표 고배당주로 주주 처지에서는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외국인 주주들은 그동안 KT&G가 고배당 정책을 펴왔기 때문에 연임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기업은행 역시 ISS와 콘퍼런스콜에서 ‘사외이사가 주주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주주 의견을 이사회에 전달하는 창구 구실을 분명히 하겠다. 하지만 배당 정책과 관련해서는 확답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한 걸로 알고 있다. 아무래도 배당 문제가 ISS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3월 23일 주총을 연 KB금융도 ISS의 권고대로 의결안을 처리했다. KB금융의 가장 큰 이슈는 노조가 내세운 사외이사 후보인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의 선임 여부였다. 권 교수는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의 맏사위라는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찬성표는 4.23%에 불과했다. 권 교수의 사외이사 선임이 전체 주주 이익에 반한다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ISS는 보고서를 통해 ‘권 교수가 금융사를 포함한 상장회사 이사회 활동 경험이 없어 이사로서 성과를 평가할 수 없다. KB금융 전체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분명히 제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KB노조는 지난해 11월 임시 주총에서도 근로자추천 사외이사 후보를 사측에 제안했지만 ISS는 그때도 반대 의견을 내놨다.
이처럼 하나금융과 KB금융의 주총 결과를 두고 일각에서는 금융권의 지배구조 이슈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고 평한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관치금융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음에도 당국의 뜻대로 움직이던 금융지주사들이 드디어 자율적인 민간회사로 거듭나기 시작했다는 분석인 것. 더욱이 금융권 노조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과도하게 ‘회장 흔들기’에 나섰던 상황에서 ISS의 객관적 판단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기업에 대한 외풍을 어느 정도 막아줬다는 평이다.
한편 외국인 투자자에게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의 신뢰도는 아직까지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국내 자문업 기업은 한국거래소 산하 한국기업지배구조원과 대신경제연구소 내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서스틴베스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 4곳이다. 이들은 KT&G, 하나금융, KB금융 주총에 앞서 기관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ISS와 반대되는 내용의 경우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의 분석 역량이 아직은 국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특히 인력 규모가 20명 안팎에 그쳐 늘어나는 수요를 충당하기 버겁다는 것이다. 국내 의결 자문사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된(2002년 설립)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경우 정기 주총 시즌에는 보통 15명에서 많게는 18명까지 인력이 투입된다.
국내 의결권 자문사 역량 키워야
한국기업지배구조원 관계자는 “전체 인력은 40명가량 된다. 최근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지만 아직까지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ISS와 비교해 역사나 규모 면에서 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ISS는 시총 상위 10위권에 드는 기업만 분석하는 반면, 국내 자문사들은 상장회사면 모두 분석한다. 외국 자문사에 비해 국내 사정에 밝은 만큼 현실성 있는 권고안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국내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국내 투자기관이 대부분 국내 의결권 자문사와 계약을 맺고 정기적으로 리포트를 받아보고 있지만 외국인 투자기관은 여전히 국내 자문사보다 ISS 권고에 의존한다. 의결권 자문 시장이 확대되는 추세인 만큼 국내 자문사들이 해외 자문사와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특정 주주의 이익이 과도하게 요구될 경우 다른 주주 혹은 회사의 이익이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이병태 KAIST(한국과학기술원)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장기간 전략적 투자를 하는 주주는 상관없겠지만 단기 수익을 위해 재무적 투자를 하는 경우는 ‘재투자’가 아닌 배당 등 눈에 보이는 성과를 쫓게 돼 결국 회사 성장에 도움을 주기 힘들다. 따라서 회사의 영속성, 사회적 가치 기여 등을 바탕으로 한 주주 이익의 대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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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란 기관투자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는 일종의 협약이다.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주요 기관투자자가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의결권 행사 지침인 것.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steward)처럼 기관투자자가 고객 돈을 제대로 운용하는지 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기관투자자의 역할을 단순히 주식 보유와 그에 따른 의결권 행사에 한정하지 않고, 기업의 경영 상황을 적극적으로 확인해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고객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그렇다고 강제성을 띠거나 법적 구속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2010년 영국이 처음 도입한 데 이어 네덜란드, 캐나다, 스위스, 이탈리아 등 10여 개국이 도입해 운영 중이고,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12월 한국판 스튜어드십 코드인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이 공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