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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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휩쓴 ‘민심 쿠데타’ 열풍

장기집권 정당들 잇따라 대선 패배…미국 그늘 벗고 정치·사회 개혁 시동

  • 입력2005-07-22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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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남미 휩쓴 ‘민심 쿠데타’ 열풍
    급변하는 대륙 ‘중남미’ ‘어느 날 하느님이 수호천사에게 지구를 가리키며 중남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그곳에서 수만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총에 맞아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신이 그렇게 되길 원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불만 섞인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걱정이 됐던 것이다.

    수호천사는 사람들이 그린 지도를 보았다. 지도엔 중남미가 유럽은 물론 미국 캐나다보다 훨씬 작게 그려져 있었다. 수호천사는 자기가 하늘나라에서 보는 것과 사람들이 그린 지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엔 역사책을 보았다. 자신이 시간을 통해서 본 역사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중남미는 지도에만 작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도 작게 그려져 있었다.’(에두와르도 갈리아노의 ‘그들과 같은 사람들’ 중에서)

    지구상에서 한국과 정반대에 위치한 대륙이 중남미다. 그만큼 지리적으로 멀다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의 의식에서도 그만큼 멀리 있다. 그리고 모든 중남미행 비행기가 미국을 거쳐 가듯이 이 지역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대부분 미국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쉽게 말해 미국이라는 안경을 쓰고 우리는 중남미를 보았던 것이다.

    우리의 중남미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인가.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도 중남미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마약의 온상이며 민중을 선동하는 수많은 정치인과 빈번한 군사 쿠데타, 게릴라와 잔인한 독재자로 가득 찬 지역이었다. IMF 전까지만 해도 대다수 중남미 국가는 우리가 절대 본받지 말아야 할 ‘형편없는’ 국가들이었다. 이들은 그렇게 알려졌고, 우리의 반면교사와 같은 나라였다. 그들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는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중남미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큰 변화가 없는 사이, 이 지역은 최근 급격히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 변화는 8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민주화가 공고해지면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종속과 혼란으로 얼룩진 20세기를 지나 역사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21세기를 맞고자 하는 중남미인의 열망이 나타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한 단계 성숙한 이들의 의식이 새로운 정치환경을 만들었고, 이는 새롭게 변한 국제질서와 맞물려 중남미의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국민은 개혁을 거부하는 부패한 정당과 정치인들을 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과감히 선택했다. 최근 2년간 여러 선거에서 나타난 변화는 중남미를 과거의 눈으로 보고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선거과정이 투명해지고 공정해졌다. 부정선거로 얼룩졌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선거과정을 통해 가장 뚜렷이 나타난 점은 국민이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우선, 좌파 정권의 등장과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98년 12월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서 차베스 후보는 40년 동안 ‘사이 좋게’ 집권해온 민주행동당(AD)과 기독민주당(COPEI)이 공동으로 공천한 집권여당과 제1야당의 공동 후보를 압도적 차이로 물리쳤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후보시절 미국 입국이 거부되었던 차베스 대통령은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베네수엘라 건설을 역설하며 정치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99년 10월엔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메넴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발한 급진시민동맹(UCR)의 데 라 루아 후보가 집권당인 페론당의 두알데 후보를 1차 투표에서 10%가 넘는 차이로 물리치고 쉽게 당선됐다. 이 역시 10년간 계속된 메넴 정권에 대한 국민의 변화 열망이 결집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들어서자마자 실시된 칠레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는 라고스 후보가 당선됐다. 이는 1973년 아옌데 사회당 정권이 피노체트의 유혈 군사 쿠데타에 의해 붕괴된 뒤 처음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이다.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피노체트에 대한 국제적 심판이 논의되는 가운데 실시된 선거에서 칠레 국민은 아옌데의 후계자인 라고스를 선택한 것이다.

    둘째로 눈에 띄는 변화는 개혁을 추구하는 보수우파 정권의 등장이다. 7월2일 실시된 멕시코 선거에서 우파의 국민행동당(PAN) 폭스 후보는 71년간 집권한 제도혁명당(PRI)의 라바스티다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개표 직전까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박빙의 승부일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폭스 후보는 쉽게 승리했다. 이는 제도혁명당의 장기 지배와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의 염증과 불만이 표로 표출된 것이다. 1910∼17년 멕시코 혁명 후 만들어진 제도혁명당이 결국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되고 만 것이다.

    반면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은 헌법을 고치면서까지 이같은 변화에 거세게 저항했다. 금년 4월의 1차 투표에서 수많은 부정을 했지만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그러나 한 달 후 실시된 페루 결선 투표에서 후지모리는 국제사회의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단독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같은 독재에 저항해 톨레도 후보는 국민적 비폭력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국내외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는 후지모리 정권은 이제 매우 취약해졌다. 이로 인해 정국은 불안하고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어쩌면 후지모리 정권은 변화된 중남미에 외로이 떠 있는 섬이 될지도 모른다.

    1997년 영국의 홍콩 반환은 제국주의 시대의 종식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21세기를 맞아 중남미에서도 파나마 운하의 이양이 있었다. 이는 1977년 미국과 파나마간 체결된 ‘운하 협정’에 따른 것이다. 미국이 과연 운하를 넘겨줄 것인지에 대한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1999년 12월31일 미국은 운하 관리권과 부근 조차지를 86년 만에 파나마 정부에 넘겨줬다. 이 행사엔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 부부를 비롯해 멕시코의 세디오 대통령, 콜롬비아의 파스트라나 대통령, 코스타리카와 볼리비아 대통령 등 수많은 중남미 국가 지도자들이 참석해 파나마 운하 이양을 환영했다.

    지난 세기 중남미는 미국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해 그 그늘에 안주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유일한 생존책이었다.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의 개입정책에 저항해왔으나, 갈수록 힘의 차이가 커졌다.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세계 초강대국으로 변했고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의 영향권에 완전히 포함된, ‘미국의 후원(後園)’이 됐다. 그러나 이번 운하 반환은 파나마가 콜롬비아로부터 분리 독립한 1903년 이후 지속됐던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모든 중남미 국가들 역시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됐음을 의미한다.

    파나마 운하의 미국 지배로 시작된 20세기가 미국의 일방적 공격과 중남미 국가들의 수동적 대응으로 점철되었다면, 파나마 운하의 반환으로 시작된 21세기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쌍방적 관계로 나타날 것이다. 더구나 최근 베네수엘라 칠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공고화하면서 정치적 변화와 안정이 동시에 달성되고 있다.

    이제 중남미는 쿠데타로 날이 지고 새는 지역이 아니다. 더 이상 미국의 눈치를 보는 지역이 아닌 것이다. 아마도 중남미는 세계지도에서 그 실제 크기만큼의 영역을 차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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