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갑자기 옆구리를 찌른다
악! 고대인들은 놀라움이나 두려운 마음을 표현할 때새의 우는 모습을 관찰했다그 내면에 관한 기록이 비명(悲鳴)에 남아 있다꼬리가 긴 새를 조(鳥)라 하고 꼬리가 짧은 새를 추라 한다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고 현관문을 열자어둠 속에 웅…
201204302012년 04월 30일문득 ‘젖통’이라 말하고 싶다
가슴을 바꾸다한복 저고리를 늘리러 간 길젖이 불어서 안 잠긴다는 말에점원이 웃는다요즘 사람들 젖이란 말 안 써요뽀얀 젖비린내를 빠는아기의 조그만 입술과한 세상이 잠든고요한 한낮과아랫목 같은 더운 포옹이그 말랑말랑한 말 속에 담겨 있…
201204232012년 04월 23일혹 당신도 화들짝 놀랐는지요
거기에 흰 털이 났습니다큰일이 났습니다 처음 흰 털을 발견했을 땐정말이지 화들짝 놀랐더랬습니다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의 기분이이해됐습니다 그녀는 거기 난 흰 털을염색하려다 빨간 털로 만들어버린 적이있었지요 그걸 보곤 배꼽 잡고 웃…
201204162012년 04월 16일김이 모락모락 구수한 밥 냄새
무쇠 솥양평 길 주방기구종합백화점수만 종류 그릇의 다정한 반짝임과 축제들 속에서무쇠 솥을 사 몰고 왔다―꽃처럼 무거웠다솔로 썩썩 닦아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다푸푸푸푸 밥물이 끓어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잦아든다그사이먼 조상들이 줄…
201204092012년 04월 09일난 매일 널찍한 마당에 선다
내 마당내 마당에는 매일 잉어 떼가 온다무언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파도의 산을 넘어내 마당에는 매일 은행나무가 성큼성큼 다른 길을 내고마치 사막의 설치류가 오솔길을 만들듯내 마당에는 매일 청개구리가 폴짝폴짝 담을 쌓는다담 사이에…
201204022012년 04월 02일슬프면서도 즐거운 이별
비행장을 떠나면서비행장을 떠나면서 나는 울었고 너도 울었지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들을 읽었고참한 소설 속을 걸어다니며 수음을 했지사랑이 떠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사막이 튀어나왔는데사막…
201203262012년 03월 26일푸시킨 시를 수십번 읽었던 시간
자두밭 이발소금성이발(金星理髮) 문 열었구나자두밭 출입문이 또 바뀌었다이발(理髮) 다음 글자는 지워졌지만붉은 ‘金星理髮’은 비 젖어 선명하다얼기설기 거꾸로 매단 문짝 그대로금성이발 문 열었네봄비에 들키면서 왔다첫 손님으로오얏나무 의…
201203192012년 03월 19일내 유년기의 홍콩 느와르 열병
세계의 느와르내게로 온 불량한 목소리는우연이었다.우리의 예산은 늘 빠듯하고여자들은 조금 더 나쁘거나남자들은 조금 덜 운이 좋았다.룰을 이해하기 시작하면불공평한 것들이 퍼즐처럼맞아떨어지는 쾌감이 있다.치명적인 아름다움은 어디에,라고 …
201203122012년 03월 12일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듯
획(劃)새들이 마주 오는 죽은 새들을 마주칠 때그들은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고 지나간다 바람은 그 높이에선 늘 눈을 감는다서로 다른 붓털이 만나서 만들어 가는 하나의 획 이상하게 한 획을 긋는 붓에서는 바람 냄새가 난다 붓을…
201203052012년 03월 05일가끔 상상해, 누군가 나를 껴안는
전기해파리내 몸에서 가장 긴 부위는 팔가장 아름답게 악행을 퍼트리는 것 두 팔을 천천히 휘저으며 나는 수족관으로 간다해양 지도를 펼치면 두 팔이 늘어나는 느낌 그의 오래된 수족관에는 입 벌린 가면들이 모여 있다 물결 사이를 가만히 …
201202272012년 02월 27일그날 밤 들려온 모르는 여자 노래
정말 위대한 여름이었다노래방에서모르는 여자의 노래를 들었다화장실에 갔다 오다 들은모르는 노래반주가 끝나고도 한 번 더불렸다우리 방에 들어와한 번 불러보았으나(오래전에 들은 것 같았지만)왠지모르는 노래사람들은 그게무슨 노래냐고 물었지…
201202132012년 02월 13일백지로 뛰어들던 날, 그 막막함
그날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따스한 모래 …
201201302012년 01월 30일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
아임 스트레인지 히어먼저 강을 제대로 건너는 일부터 시작해이토록 거대한 이정표를 본 적이 없지입이 벌어졌고 오누이는아직 훈련이 덜 된 것 같다영어 학원에 다녀야겠어, 동생은 부드러운 사투리로말했고 그것은 실패를 인정하는 어투오누이는…
201201092012년 01월 09일살면 살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
모른다꽃들이 지는 것은안 보는 편이 좋다궁둥이에 꽃가루를 묻힌나비들의 노고가 다했으므로외로운 것이 나비임을알 필요는 없으므로하늘에서 비가 오면돌들도 운다꽃잎이 진다고시끄럽게 운다대화는 잊는 편이 좋다대화의 너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외…
201112262011년 12월 26일정정한 거목 할아버지가 쓰러졌다
작아지는 몸당신 곁에 앉아 당신을 보는 것은작아지는 몸을 수수방관하는 일당신을 어루만져 작게 만들고 있는투명한 손 곁에서의 속수무책 당신은 작아지고 쭈글쭈글해지고샘처럼 어두워지고 당신이 산그늘에 누워 춥고 먼 골짜기들을 그리워할 때…
201112122011년 12월 12일엄마 생각하면 한없이 짠해집니다
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소녀가 미소를 짜고 있다소녀가 하품을 짜고 있다레이스가 길어지고 있다그 누구도 원치 않는 무가당 소녀가그 누구든 쓸 수 있는 글을 쓱쓱 써나가는 것처럼레이스를 짜고 있다가슴이 미어지고 있다고시원에서…
201111282011년 11월 28일거미는 곤충이 아니라 동물이다
동지(冬蜘)밤이고밤이면 길바닥마다 거미가 집을 짓는 계절이다.나는 쭈그려 앉아 투명한 거미집을 부순다.양손 가득 찢겨진 거미집을 묻힌 채얼굴을 감싸면 달이 떠오르는 소리 들린다.타원형의 긴긴 달이 떠오르는 계절이다.아이들이 가슴팍에…
201111142011년 11월 14일콜! 콜! 生을 펄떡이게 하는 마법의 주문
콜!콜!예컨대미용실 옆자리에 앉은 여대생이가수 현미처럼 파마해주세요라고 주문할 때예컨대택시를 타고 남가좌동 명지대를 가는데서울 31바9896 남진우 기사 이름이 하필 그럴 때예컨대베이징 올림픽 남자 핸드볼 경기에서 해설자가조치효 선…
201110312011년 10월 31일기념일 / 기념에는 기대와 ‘희망’이 있다
기념일식도에서 소장까지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우리는 꼭꼭 씹어먹는다.위를 기념하고쓸개를 기념하고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오늘은 누군가의 기일이며전쟁이 있었던 날,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농담에는 피가 부족하다.어제…
201110172011년 10월 17일‘줄넘기’, 연습을 한 사람만이 솟구친다
줄넘기줄넘기를 하고 있다.지면을 넘기며지면 위에 선다.발아래 지면이 팽창될수록망각이 깊어져다른 페이지 속으로 섞여 들어간 거짓말들처럼 두 발은 부드럽게 흩어질 뿐들러붙은 손하나 둘 셋 심장을 후려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지금 …
201110042011년 10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