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티 한국어교육원에서는 학생 수준에 맞춰 한국어 강의를 진행한다(왼쪽). 카자흐 국립대 동방학부 한국어학과 게시판.
“몇 살까지 살고 싶습니까?” “예, 나는 팔십 살까지 살고 싶어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있는 알마티 한국어 교육원(교육원). 강의실 12곳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강의의 열기가 한여름 더위보다 더 후끈하다. 자기 수준에 맞는 수업에 참가한 카자흐스탄 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하다. 한국어 선생님의 말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따라 하며, 노트 필기도 빼먹지 않는다.
교육원 1층에 자리한 체육관 앞으로 다가서자 신나는 최신 한국 가요가 흘러나온다. 살며시 문을 열자 10명 남짓한 학생들이 모여 한국 아이돌그룹의 춤을 열심히 따라 하고 있다. 온몸이 땀에 젖은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리더를 따라 리듬에 맞춰 열심히 몸을 움직인다. 그런데 학생들 춤 솜씨가 여간 아니다. 당장 무대에 올라도 손색없는 수준(?)으로,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여름보다 뜨거운 배움의 열기
교육원은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어 보급 전진기지 구실을 톡톡히 수행한다. 학생 수준별로 30개 한국어 강좌를 개설, 학기당 약 900명의 고려인 및 현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 장단기 한국인 체류자와 교민 자녀를 대상으로 토요한글학교도 운영한다.
올해는 한국어가 가물가물해진 고려인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노인대학 운영이 화제다. 매주 수요일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 30여 명이 빠짐없이 교육원을 찾아온다. 어르신들은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배우는데, 특히 한국역사에 관심이 많다. 그동안 몰랐던 모국의 역사를 접하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귀중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노인대학 졸업생은 5월 11일 약 열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 뿌리의 소중함과 발전된 한국을 온몸으로 느끼는 귀중한 시간도 가졌다.
교육원의 한국 알리기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청소년 모국 체험연수와 옛 소련 지역인 독립국가연합(CIS)에서의 한국어 교육 연수, 동포청년 정보기술(IT) 세미나, 한국 전통놀이 체험 및 음식 축제 등을 개최한다. 이견호 교육원 원장은 “대학생 한국어 글짓기, 한국영화제, 태권도 심사, 한국문화의 날 같은 행사를 통해 카자흐스탄에 한국어 보급뿐 아니라 한국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원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과 문화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면, 카자흐 국제관계 및 세계언어대(카자흐 국제관계대)와 카자흐 국립대는 한국학 보급을 책임진다. 특히 카자흐 국제관계대는 카자흐스탄 내 한국어강좌 개설 대학 중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이 대학 동양학부에 한국어가 포함됐으나 올해부터 한국어 학과로 독립, 재학생 총 228명에 교수진도 12명에 이른다.
한국어능력시험에 몰린 사람들
한국어교육원은 다양한 행사를 갖고 현지인의 참여를 유도한다.
한국과의 활발한 교류도 눈에 띈다. 카자흐 국제관계대는 2003년 전주기전대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현재는 중앙대, 경희대, 아주대 등 한국의 17개 주요 대학과 교환학생, 복수학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교환학생으로 1년간 대전 배재대에서 한국어를 배운 아이게림(3학년)은 “한국어를 좀 더 배워 한국 관련 기업체에 취직하거나 통역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능숙한 한국말로 말했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한국학센터다. 한국학센터는 한국학 연구체계를 확립하고 한국학의 교육환경을 개선하려고 2012년 10월 9일 한글날에 맞춰 개원했다. 한국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 재원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해외한국학 씨앗형 사업의 지원을 받아 개설한 한국학센터는 동양학캠퍼스 202호에 자리 잡고 있다. 카자흐스탄 한국학 발전의 구심점 구실을 하는 이곳에는 컴퓨터 등 최신 시설이 갖춰져 있다. 한국학센터로 안내한 장호종 교수는 “한국학센터가 생기면서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CIS 지역을 포함해 본격적으로 한국학을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카자흐 국립대 한국어학과에도 현재 학사과정 98명, 석사과정 3명이 재학 중이다. 이곳은 1994년 한국어학과가 신설됐는데 현재는 터키, 일본, 중국학을 포함한 동방학부에 소속됐다. 지금까지 총 125명이 한국어학과를 졸업했고, 한국어 수요가 늘어나면서 재학생들의 자부심도 무척 크다. 카자흐 국립대 한국어과 학생은 2~3학년 때 최소 1학기 이상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이를 위해 연세대, 한국외대, 한양대 등 한국의 20여 개 대학과 교류협력 관계를 맺었다.
한국어과를 동방학부 소속이 아닌 정식 학과로 만들려고 백방으로 뛰는 김게르만 교수는 “한국어가 단순히 카자흐스탄 한인의 모국어가 아닌, 중요 외국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며 “한국어는 카자흐어와 같은 알타이어족으로 문법적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다른 언어에 비해 쉽게 배울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한국어 인기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외국인과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국어 사용 능력을 평가하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에서도 엿볼 수 있다. 4월 20~21일 교육원에서 치른 제30회 시험에는 카자흐스탄 응시생 470여 명이 몰렸다. 한류에 힘입어 한국어에 대한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기 때문이다. 교육원은 2012년 이전엔 1년에 한 번씩 시험을 치렀지만 지난해부터 봄과 가을에 두 번 치르고 있다.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시험에 응시한 살타낫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어능력시험은 1997년 도입된 이래 한류 확산과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증가 등의 영향으로 올해 1월 시험까지 누적 응시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1990년대 이후 카자흐스탄의 한국어 교육은 양적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011년 현재 카자흐스탄 각 교육기관에서 학생 약 3500여 명이 한국어 수업을 수강하고 있으며, 한국 경제력에 대한 카자흐스탄의 관심과 한류의 영향력으로 한국어 교육 열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알마티 한국어교육원에서 치르는 한국어능력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열기에도 현장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어려움을 호소한다. 한국어 교사가 부족해서다. 현재 강의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는 200명 정도인데, 여기에 동양학이 아닌 한국학으로서 역사나 정치, 경제 등을 강의할 전문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적절한 교재 개발과 보급도 또 하나의 과제다. 지난해부터 보급한 ‘카자흐인을 위한 한국어 1~6권’ 교재로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한류 열풍은 카자흐스탄도 예외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고 한국 가요를 자연스럽게 흥얼거린다. 4월 13일 교육원에서 치른 제3회 알마티 케이팝(K-pop) 예선전에는 98개 팀 300여 명이 카자흐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노래와 댄스 부문으로 나눠 치른 이날 대회에서 지원자들은 그동안 갈고닦은 재능을 마음껏 뽐냈다. 응원에 나선 관객들도 좋아하는 케이팝이 흘러나오자 입을 모아 따라 부르며, 몸을 흔들고 박수를 치며 한국 가요에 흠뻑 빠져들었다.
같은 날 한인을 대상으로 발간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엔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였던 이주노 씨가 한국 스타일의 엔터테인먼트회사를 설립, 현지 공략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씨는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해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거쳐 카자흐스탄은 물론 CIS 지역 및 러시아, 미국 진출까지 노리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노래와 춤을 즐기는 카자흐스탄을 베이스캠프로 삼은 것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카자흐스탄은 카자흐족을 비롯해 130여 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됐다. 현재 고려인 10만여 명이 거주하는 카자흐스탄은 우리 민족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37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이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끌려가 마지막으로 던져진 곳이 바로 카자흐스탄 우스토베 지역이다. 우스토베는 카자흐스탄 경제수도 알마티에서 톈산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4시간 정도 자동차로 달리면 도착하는데, 이곳엔 아직도 고려인 2, 3세 할머니들이 거주한다.
톈산산맥이 동서로 지나가는 고지대 분지에 위치한 알마티에는 지금 한국 및 한국어 배우기 바람이 그 어느 곳보다 세게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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