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사건 직후 합참 지휘통제실에서 보고를 받는 이명박 대통령.
국방개혁을 예정대로 진행한다면 2025년경 출현할 한국군은 첨단 지휘통제(C4I) 능력을 기반으로 자주적 전쟁지도능력을 발휘하고, 북한의 핵심 목표에 대한 정밀 억제 타격력을 보유하며, 센서(ISR)에서부터 타격력에 이르는 복합체계를 보유한 선진 군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를 통해 핵심 전쟁수행능력을 미군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북한 위협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산이다. ‘국방개혁 2020’을 완결하려면 국방예산을 적어도 매년 8~9% 증액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전 정부의 국방개혁안에 비판이 쏟아졌다. 비현실적인 국방예산 증가라는 둥, 지상군 전력을 등한시하고 값비싼 무기를 사용하는 해·공군에 대한 지나친 배려라는 둥, 미국과의 연합방위를 소홀히 하는 좌파정책이라는 둥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현 정부 초기 다시금 국방정책의 전면에 등장한 육군 작전세력은 지난 정부의 정책을 뒤집으려고 의미 있는 시도를 했다.
2008년 4월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가 이상희 국방부 장관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그 첫 번째 사례다. 비밀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북한군이 기존의 군 구조를 수정해 경보병부대로 재편했고, 그 결과 북한 특수전 위협이 괄목할 만하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북한군 제2제대에 속해 있던 특수부대가 제1제대로 통합됨으로써 경보병 위주의 특수부대로 재편됐다는 것이 골자다. 또한 북한이 전방군단에 경보병 사단을 추가로 창설하고 전방사단의 경보병대대를 연대급으로 증편했다는 사실을 구체적 사례로 제시했다. 이 보고서 결론은 북한의 재래식 지상전 위협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北 지상전 위협증가 보고서
이 보고서 한 건이 이명박 정부의 국방정책에 끼친 영향은 컸다. 섣불리 해·공군 전력을 증강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대북 열세를 면치 못하는 지상군을 중심으로 국방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국방개혁 기본계획의 대통령 재가를 한 달 앞둔 그해 10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비밀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한다. “지상전 전력은 한국이 열세”라면서 “현 국방예산 구조에서는 2020년이 돼도 북한과 대등한 지상전 전력 확보가 어려우므로 재래식 전면전 위협에 대비하는 전력 보강이 절실하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향후 남북 간 충돌은 대규모 지상전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지상군 전력을 보강하는 데 국방재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는 국방부와 합참이 국방 선진화가 아니라 재래식 지상군 위주의 전통적 군대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에 경악했다. 국방부의 국방개혁안에 대한 재가를 거부한 청와대는 북한의 재래식 지상전력 위협보다 우리 군이 핵과 미사일 같은 비대칭 위협, 북한의 불안정 사태에 대비하기를 원했다.
육군의 차기 핵심 주력인 2개 기동군단 창설을 위해 전차, 자주포, 장갑차에 돈을 쓰려는 국방부와 의견 충돌을 빚은 청와대는 국방개혁안 재가를 미루다가 2009년 6월 마지못해 승인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묘한 단서를 달았다. “국방예산에 관한 사항은 좀 더 두고 보자”는 아리송한 말과 함께 마지못해 서명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모호한 태도 탓에 국방개혁안이 대통령 재가를 받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극심한 혼란이 생겼다. 이런 혼란은 이후 핵심적인 국방 목표 및 정책을 정하지 못한 채 육·해·공군이 서로 먼저 무기를 도입하려는 치열한 경쟁과 갈등을 낳았다. 특히 한미연합사가 수행하던 북한 특수부대 차단, 대화력전 임무가 한국군으로 이양되면서 서로 작전을 주도하려는 각 군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무기 도입의 최대 라이벌은 북한군이 아니라 바로 계룡대라는, 같은 건물에서 서로 다른 층을 사용하는 유니폼이 다른 타군(他軍)이었다.
2005년 ‘국방개혁 2020’ 수립 이전에 육군 군단의 작전 범위는 가로 30km, 세로 70km였다. ‘국방개혁 2020’에서는 이것이 100km×150km로 확장됐다. 그런데 현 정부의 ‘국방개혁 2030’에서는 이보다 확장된 150km×250km로 작전지역이 설정됐다. 이렇게 육군이 종심(縱深)을 깊게 타격하려면 신형 자주포와 다연장포 등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 경우 포탄의 고도가 2만ft(피트)에 달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조정과 통제 못 하는 합참
현재 우리 군의 공중 공역 관리 규정에 따르면 1만ft 이상은 공군 영역, 1만ft 이하는 육군 영역이다. 따라서 작전 범위를 재조정하는 새로운 전장운영 개념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전혀 준비하지 않은 채 육군 화력을 증강하는 계획만 밀어붙였다. 합참은 “육군 포병작전에 방해가 되니 공군은 비켜라”라며 공중작전 계획을 변경했다.
이렇게 되면 전시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 육군 포에 아군기가 격추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긴요한 항공작전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 즉 항공력에 따라 정밀폭탄이나 공대지미사일로 타격해야 하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한 방향으로만 날아가는 지대지미사일과 포탄은 되돌아오는 법이 없기 때문에 산 후면에 은폐돼 있거나 이동 중인 표적은 타격할 수 없다. 값비싼 지대지미사일을 아무 곳에나 펑펑 터뜨리는 비효율적 작전으로 개전 초기부터 고전할 개연성이 있다.
물론 미사일 전력을 증강하려는 육군 논리에도 일리는 있다. 항공기는 연간 140일에 달하는 한반도의 악천후 속에서는 작전이 제한되지만 육군 화력은 비가 오거나 벼락이 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북한의 조밀한 방공망을 고려하면 항공기 운용은 위험 부담이 크다는 주장이다. 육군 주장대로라면 북한은 비가 올 때 전쟁을 하면 된다. 그러나 수십억 원짜리 지대지미사일을 그것도 성능이 의심스러운 무기를 앞세우다 항공작전의 기회를 잃는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2010년 11월 연평도 사건 이후 공군은 북한의 핵심 목표를 은밀하게 타격하려면 5세대급 전투기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해군 역시 함정에서 북한의 핵심 목표를 타격할 수 있는 함대지미사일을 도입하려 한다. 한미연합사가 작전을 수행하던 당시에는 각 군 간 갈등이 이렇게 빚어지지는 않았는데, 그 임무가 한국군으로 이양되는 순간 각 군이 제각기 무기 소요를 제기하며 경쟁적으로 예산 확보에 돌입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 군의 중복된 무기 도입을 합참이 나서서 조정하고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각 군이 개별적으로 청와대에 무기 도입 계획을 제출해 예산을 확보하는 로비가 일반화하면서 한국군 전체의 체계적인 전장운영 개념이 실종된 것이다. 주인 없는 전장, 오직 무기 도입만 있는 전장이 된 셈이다. 최근 육군이 대통령 승인을 받은 2조5000억 원 규모의 미사일 전력증강 사업도 한미 간 전력증강의 가이드라인으로 설정된 ‘전략동맹 2015’와 별도로 추진되고 있다. 한미 연합작전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무기 중복 현상은 육군과 공군의 무인항공기 도입 경쟁에서도 나타난다. 북한 특수부대 차단 임무를 두고도 육군과 해군 사이에서 중복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육군의 대형 공격헬기 도입과 해군의 함정화력 보강이 그것이다. 작전 주도권 및 무기 도입을 둘러싸고 육군 패권주의와 해·공군의 반발이 충돌하는 양상이다. 갈팡질팡하는 이명박 정부의 국방정책이 각 군의 합동성 결여에 따른 대혼란을 낳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