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9월 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노동신문]
나진에 눈독 들이는 러시아
소련은 1949년 3월 북한과 협정을 맺고 1979년까지 30년간 나진을 조차(租借)했다. 당시 소련은 부동항(不凍港)이던 나진을 자국 영토로 만들려는 욕심까지 보였다. 러시아 역사를 보면 제정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전쟁을 해왔다. 냉전 시대에도 소련은 서방의 포위 전략에서 벗어나고자 극동과 발트해, 흑해 등에서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해 자국 영토로 만든 것도 부동항 정책의 일환이다.러시아는 2008년부터 나진과 자국 국경 지역인 하산을 잇는 54㎞ 구간의 철로를 개보수하고, 나진항을 복합 물류 허브로 만들기 위해 현대화하는 등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적극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고(故)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나진항 3번 부두 운영권을 49년간 확보했다. 이후 러시아는 2008년 10월 자국이 70%, 북한이 30% 지분을 갖는 합작회사 ‘라선콘트란스(RasonConTrans)’를 설립했다.
러시아는 3억4000만 달러(약 4500억 원)를 투입해 2013년 7월과 9월 각각 철도 개보수와 나진항 화물터미널 공사를 완공했다. 북한과 러시아는 러시아 쪽 20㎞ 철도 구간을 전면 보수하고, 북한 두만강역~나진의 30여㎞ 구간에 러시아식 광궤(1520㎜)와 북한식 표준궤(1435㎜)로 구성된 복합궤를 깔아 열차가 양국을 오갈 수 있게 했다. 나진항 3호 부두를 콘크리트로 재포장해 석탄을 싣는 이동식 크레인용 레일과 연료탱크를 새로 설치했고,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바다 수심을 기존 9m에서 12m가 되도록 준설까지 했다. 러시아가 이처럼 공을 들인 이유는 나진항이 자국 광산 지역과 아시아 항구들을 연결하는 최단 경로로서 석탄 수출 중개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3년 11월 방한한 푸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014년 11월, 2015년 4∼5월과 11월 등 3차례에 걸쳐 시베리아에서 나진항으로 수송된 석탄을 화물선에 선적해 포항으로 운반하는 시범운송도 진행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 장거리로켓 발사에 따라 그해 3월 “외국 선박이 북한에 기항한 뒤 180일 이내에 국내에 입항하는 것을 전면 불허한다”는 내용의 제재에 나서면서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더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북한과 러시아 간에는 석탄 수송이 계속됐지만, 북한이 2020년 2월 코로나19 팬데믹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의 국경을 봉쇄하면서 현재까지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중단된 상태다.
러시아는 김정일의 후계자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극동 지역 방문을 계기로 나진-하산 프로젝트 재재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9월 13일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김 위원장과 만나 군사·경제 등 양국 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양국은 정상회담과 관련된 공동성명이나 합의문을 일절 발표하지 않았지만, 나진-하산 프로젝트 재개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회담 후 러시아 국영 TV 로시야 1과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북한이 매우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다”며 “중국으로 가는 철도와 항구, 도로 같은 매우 좋은 ‘물류 삼각형’을 만들 수 있는 작업의 재개”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의 이 언급은 나진-하산 프로젝트 재개를 추진하겠다는 의미다.
“러시아와 북한 흥미로운 프로젝트 가져”
러시아 열차가 2013년 하산과 나진을 연결하는 철도를 처음으로 통과하고 있다. [러시아 철도공사 제공]
러시아는 그동안 북한에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재개하자고 수차례 제의했다. 코즐로프 장관은 6월 27일 러시아·북한 정부 위원회 화상회의에서 북한에 나진-하산 철도를 통한 수송 확대를 제안했다. 당시 코즐로프 장관은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나진항에서 석탄과 기타 화물도 취급한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연해주정부가 6월 18일 러시아를 비롯해 중국, 북한 등 3개국의 생산품을 한곳에서 거래할 수 있는 상공업 단지를 연해주에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당시 올레그 코제먀코 연해주 주지사는 하산과 국경을 접한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옌지를 공식 방문한 자리에서 “상공업 단지 조성으로 3개국 간 국제 협력 발전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도 코로나19 방역 조치가 해제되면 대규모 노동력과 함께 이 과정에 적극 참여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이미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에서 나진을 연결하는 도로를 완공하는 등 북한과 경제 교류를 준비해왔다. 훈춘 취안허 통상구에서 나진까지는 53.5㎞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중국 정부도 2009년 나진항 1호 부두와 2010년 나진항 4~6호 부두를 50년 동안 사용할 권리를 확보한 바 있다. 중국 정부는 훈춘과 나선(나진·선봉) 경제특구를 연결하는 신두만강대교도 완공했다. 이 다리의 정식 명칭은 ‘중조(中朝) 변경 취안허 통상구대교’다.
북한 지렛대 삼는 러시아
러시아가 나진-하산 프로젝트 재개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을 지렛대 삼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러시아는 미국 등 서방 제재를 뚫고 북한으로부터 부족한 재래식 포탄 등을 공급받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고 갈 발판을 마련했다. 게다가 북한에 위성과 핵잠수함 기술 등을 이전해 한미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 체제 구축을 견제할 수 있게 됐다. 주목할 점은 러시아가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나진항에 태평양 함대 함정들을 주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이를 통해 동해에서 북한과 해상 연합군사훈련 등을 실시할 수도 있다.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적극 추진해온 ‘신(新)동방정책’을 활성화하는 수단으로 북한을 이용할 수 있다. 신동방정책은 극동지역 개발로 러시아 경제발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 푸틴 대통령이 매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방경제포럼을 직접 주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 극동지역은 천연자원 보고이자 주요 식량 생산지이지만 제대로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극동지역을 개발하려면 많은 인력이 유입돼야 하는데, 러시아 국민은 대부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극동지역을 외면해왔다. 게다가 이 지역 젊은 층이 대거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해 극심한 노동력 부족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나진-하산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 극동지역 경제발전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러시아 석탄의 중간 기착지인 나진항이 발전할수록 아시아 각국으로 수출을 늘릴 수 있어 러시아로서는 이득이다.
러시아는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마체고라 대사는 “북한 노동자는 매우 근면하고 훌륭한 일꾼”이라며 “러시아는 앞으로 더 많은 북한 노동자가 일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북한에 밀 등 식량을 제공하고, 북한이 그 대가로 농업 분야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안을 추진할 수도 있다. 해외로 파견돼 일하는 북한 노동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에 따라 본국으로 돌아가야 해 북한 정부는 그동안 외화벌이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왔다. 러시아 정부는 안보리 제재 결의를 무시하고 북한 노동자를 대거 유입해올 수 있다. 나진-하산 프로젝트 재개는 러시아와 북한이 관계를 더욱 밀착하면서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사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